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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헌신적인 사랑

10년 넘게 치매노인 무료로 돌봐온 선호재·정숙자 부부

“노인들 얼굴이 순한 양처럼 될 때 가장 기뻐요”

■ 기획ㆍ김정은‘여성동아 인턴기자’ ■ 글·박윤희‘자유기고가’ ■ 사진·정경택 기자

2005. 06. 09

치매노인을 모시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 하지만 선호재 목사와 정숙자 부부에게 이들 치매노인은 ‘아기’ 같은 존재다. 오갈 데 없는 치매노인 60명을 모시고 사는 샘터마을의 선 목사 부부는 오늘도 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고 있다.

10년 넘게 치매노인 무료로 돌봐온 선호재·정숙자 부부

선호재 목사와 정숙자 원장 부부. 선한 눈웃음이 꼭 닮았다.


경기도고양시에 위치한 치매전문요양원 샘터마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선호재(58)·정숙자(55) 부부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들 부부는 친자식조차도 포기해 오갈 데 없는 치매노인들을 10년 넘게 친부모처럼 모시며 살고 있다. 함께 생활하는 치매노인들만 해도 60여 명. 치매노인들과 먹고 자느라 부부가 한이불 속에서 잠든 지도 퍽 오래됐다. 치매노인들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효자’ ‘효부’가 따로 없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은 꼭 아기 같아요. 밤에 잠도 안 자고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투정을 부리죠. 그럼 제가 ‘할머니 그만 자자’ 하고 팔베개를 해주며 토닥거리면 아기처럼 금방 잠들어요.”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을 ‘아기 같다’고 표현하는 선호재 목사. 그만큼 할머니들을 대하는 그의 마음이 ‘어머니’처럼 세심하다.
“할머니들에게 언제 어떤 사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할머니들과 함께 잠을 자요. 주무시다가 이불에 코가 눌리기라도 하면 호흡 곤란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고, 또 화장실에 가시다가 이불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잖아요. 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큰 사고가 안 나게 하려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다 보니까 늘 피가 마르는 것 같아요.”
선 목사가 치매노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지금은 고인이 된 장모님 때문이다. 그는 딸만 셋인 집안의 맏사위로 결혼과 동시에 장모님을 모셨다. 그러다 지난 90년 장모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자 다니던 교회에 사표까지 내고 장모님을 간호했다.
“저희 어머니가 5년 동안 누워 계셨는데 의식도 없는데다 욕창으로 엉덩이와 뒤통수가 다 썩어들어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남편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돌봤어요. 썩어가는 상처를 매일 2시간 간격으로 치료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선 목사의 효심 때문이었을까. 기적이 일어났다. 장모님이 쓰러진 지 5년 만에 병석에서 일어난 것. 그러자 이번에는 선 목사가 쓰러졌다. 갑자기 시력이 떨어진 선 목사는 6개월 동안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희망이 없다’고 했는데 6개월 후 차츰차츰 앞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다행히 괜찮아졌어요. 저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늘 누워서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남편이 저와 어머니를 함께 돌보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10년 넘게 치매노인 무료로 돌봐온 선호재·정숙자 부부

선 목사 부부는 치매노인 60여 명을 매일 토닥거려주고 주물러주며 극진히 모시고 있다.


선 목사가 치매 앓던 장모 모시며 시작된 샘터마을

하늘도 무심하다고 해야 할까. 가족들의 건강이 모두 회복돼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어느 날 선 목사 집안에 또다시 날벼락이 떨어졌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선 목사 부부가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 부부가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외치며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아 결국 찾아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길바닥에 엎드려 기어다니고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치매더라고요. 자꾸 밥 달라고 하시고, 드렸다고 말씀드려도 ‘날 열흘이나 굶겼잖아’ 하시는 거예요.”
이쯤 되면 장모님을 ‘내 인생의 방해꾼’이라고 천번 만번 원망할 법도 한데 오히려 선 목사는 그런 장모님을 가엾게 여겼다.
“남편 없이 장모님 홀몸으로 세 딸 다 키워서 결혼시켰어요. 호강은 아니더라도 한창 자식들한테 효도받을 나이인데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대변, 소변도 못 가리게 되셨으니 가엾잖아요. 제가 돌봐드려야죠.”
그런데 그는 병간호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신연령이 유치원생이 되어버리니까 예전에 친하던 동무들도 어머니를 만나기 꺼려했어요. 사람들이 다 말 상대를 안 하니까 외톨이 신세가 되었죠. 그때 남편이 ‘장모님한테 친구를 만들어줘야겠다’고 하더군요. 기왕 어머니 돌보는 것, 자식 없는 치매노인들 다섯 분만 더 모셔야겠다고 이리저리 사람을 알아봤어요.”
선 목사는 자녀가 교도소에 갔거나 중증 장애인이어서 도저히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치매노인들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치매노인들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 ‘선 목사의 간호를 받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 목사는 수차례 거절했지만 죽음을 앞둔 말기 암환자들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선 목사 부부는 당시 외아들 구영씨(29)가 고3 수험생이었는데도 13평 남짓한 집에서 암환자 7명을 무료로 돌봤다. 그러다 지난 95년 비좁은 집을 떠나 지금의 샘터마을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동안 치매노인을 무료로 돌봐준다는 소문을 듣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아버지를 저희 집 앞에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희는 그런 자식들 욕 안 해요. ‘오죽했으면 부모를 버렸을까’ 하고 이해를 하는 편이죠. 효자가 아니라 성자라도 치매노인을 모시기 힘들거든요. 치매가 ‘가정파괴범’이란 말도 있잖아요. 그만큼 한 가정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무서운 병이에요.”
샘터마을에서는 할머니들에게 ‘자녀가 있습니까?’ ‘친척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과거를 잊은 치매노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울컥한 마음에 엉엉 울어버리기 때문이다.
“치매부모 부양 문제 때문에 자식이 이혼을 한 할머니, 병든 자녀를 둔 할머니, 자식이 사업에 실패한 할머니, 또 자식들이 이민을 가면서 버림받은 할머니 등등 샘터마을에 계신 한분 한분의 할머니마다 차마 말 못할 사연들이 많아요.”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깊은 치매노인들인 만큼 샘터마을에 처음 맡겨질 때는 모두들 표정이 어둡고 사나운데, 샘터마을에서 지내기 시작하면 얼마 안가 할머니들의 표정이 순한 양처럼 밝고 평화롭게 바뀐다고 한다. 선 목사 부부는 그때가 가장 기쁘다고 말하며 웃었다.

10년 넘게 치매노인 무료로 돌봐온 선호재·정숙자 부부

할머니들끼리 서로 돕는 모습 볼 때 보람 느껴

‘순한 양’이라고는 하지만 치매노인들이 24시간 다소곳이 누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담장을 뛰어넘어 탈출을 시도하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한밤중에 환영과 환청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는 할머니도 있다. 또 화장실에서 표백제를 벌컥 들이마시려고 하는 할머니, 대변을 본 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여기저기 문지르거나 먹는 할머니, 옷을 벗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할머니 등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이 거의 매일 이곳 샘터마을에서 일어난다. 그런데도 어느 한 구석 더럽혀져 있다거나 악취가 새어나오지 않는다.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할머니들 목욕시켜드리고 옷에 오물이 묻으면 금방 새 옷으로 갈아입혀 드려요. 어떤 날은 할머니 한 분이 목욕을 일곱 번이나 하는 경우도 있어요. 노인들이 대소변을 못 가리니까 기저귀를 채우긴 하는데 그래도 실수를 많이 하세요.”
샘터마을 할머니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있다. 그것도 세탁이 잘돼서 눈부시도록 하얀색이다.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옷에 오물이 묻어도 눈에 잘 안 띄거든요. 그래서 관리가 소홀해지면 살이 썩어들어가는 욕창이 생길 수도 있어요. 노인들이 하얀색 옷을 입고 있어야 얼른 알아차려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릴 수가 있죠.”
꽃나무가 많은 것도 샘터마을의 자랑거리다.
“치매노인들이 꽃을 보고 향기를 맡으면 건강에 아주 좋아요. 남편이 ‘원예치료’를 하기 위해 원예사 자격증을 따서 꽃나무들을 열심히 가꾸고 있어요. 철쭉, 영산홍, 관음죽, 수국, 한련화 등 워낙 식물들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저희 집을 화원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꽃나무에 물주기는 할머니들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 한손으로 스프레이를 쥐고 조작운동을 하다 보면 굳어 있던 손도 어느덧 부드럽게 풀린다고 한다. 치매노인들 특성이 워낙 운동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화분을 여기저기 옮겨달라는 주문도 자주 한다고. 그런가 하면 소녀시절 동네 뒷산에서 진달래꽃 따 먹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라서인지 먹어서는 안 되는 철쭉꽃을 따 먹는 할머니도 있다. 그럴 땐 몸이 좀 더 건강한 할머니가 이를 제지한다.
“같은 치매노인이더라도 상태가 좀 더 좋은 분은 다른 노인들이 엉뚱한 짓을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을 해요. 저희도 미처 알아채지 못할 때 ‘꽃을 따 먹는다’ ‘대변을 주머니에 숨겨 두었다’ ‘빨래비누를 먹고 있다’고 일러주죠. 먼저 치료된 할머니들이 상태가 나쁜 다른 할머니들을 도와주실 때 이 일의 보람을 느껴요.”
‘가족 봉사단’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샘터마을 운영은 선 목사와 부인 정숙자 원장을 중심으로 정 원장의 친동생인 정금자(45), 정은자씨(42)가 함께 하고 있다.
“금자가 치매노인을 둔 가족 상담과 후원자 관리를 하고 있고 은자가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일을 해요. 가족들이 똘똘 뭉쳐서 치매노인들을 돌보기는 하지만 아마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샘터마을을 이렇게까지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요즘 경제난 때문인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운영비가 샘터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할머니들이 병이 나면 병원에 모시고 가는데 치료비나 입원비가 1백만 원 넘게 나올 때가 있어요. 한번은 약값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 접수창구 직원에게 ‘외상으로 주면 다음에 돈을 갖다주겠다’고 사정했더니 ‘안 된다’며 그 자리에서 약 봉지에 있는 약을 다 털어내더라고요. 그럴 땐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서 남들한테 피해를 주나’ 싶어 한숨이 나옵니다.”
친자식들에게조차 버림받는 미움의 대상 치매노인. 선호재·정숙자 부부가 ‘업둥이’를 품에 안듯 치매노인들의 위태로운 생명을 사랑으로 꽉 붙들고 있긴 하지만 샘터마을 사람들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까마득히 높아만 보였다.
샘터마을 후원 계좌번호 : 국민은행 243-21-0112-731(예금주 선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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