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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당찬 여성들

뚱뚱한 여자들 위한 ‘빅 우먼 패션쇼’무대 선 전강미·이수연·남선희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2005. 05. 11

지난 4월 초 서울 삼성동 섬유센터에서는 별난 패션쇼가 열렸다. 옷 사이즈 88 이상을 입는 20명이 무대에서 그들만의 숨겨진 끼를 맘껏 발휘한 것. 여기에 모델로 출연한 전강미, 이수연, 남선희씨를 만났다.

뚱뚱한 여자들 위한 ‘빅 우먼 패션쇼’무대 선 전강미·이수연·남선희

“사이즈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마세요.” 지난 4월 초 서울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옷 사이즈 88 이상의 ‘뚱뚱한 여자’들의 깜찍한 반란이 있었다. 20명의 당당한 ‘빅 우먼’ 모델들이 화려한 패션쇼를 선보이며 ‘뚱뚱한 여자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준 것. ‘2005 코리아 빅 우먼 패션쇼’에 모델로 참가한 전강미(32·주부), 이수연(22·회사원), 남선희씨(19·학생). ‘뚱뚱한 여자’라는 표현에는 비하의 뜻이 담겨 있어 별로라며, 자신들을 ‘빅 우먼’이나 ‘통 큰 여자’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그들은 모두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처음에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모델이 됐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 몸매로?’ 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래서 당당하게 되물었죠. ‘아니, 이 몸매가 어때서요’ 하고요.” (전강미)
전씨는 동대문시장에 있는 ‘큰 옷’ 가게에서 패션쇼 포스터를 보고 모델 오디션에 지원하게 됐고, 남씨는 평소 애용하던 큰 옷 전문 인터넷 쇼핑몰에서 ‘빅 사이즈 모델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됐다고 한다. 반면 이씨는 친구 따라갔다가 뜻하지 않게 모델이 되었다고.
“학창시절 친구가 오디션을 보는데 가족이나 친구가 응원하면 점수를 더 준다고 했다며 응원하러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갔다가 제 끼를 보신 심사위원들이 즉석에서 오디션을 보게 해주셨어요.”
오디션장엔 총 2백여 명이 모였는데 전국에서 온 ‘통 큰’ 학생·주부·직장인들이 발산하는 열기와 끼로 달아올랐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패션쇼 생각을 하면 행복하다고 한다. 강렬한 꽃무늬가 담긴 볼레로에 연두색 쫄티, 몸에 착 달라붙는 보라색 미니원피스, 하늘하늘한 실크 소재의 연한 핑크색 톱에 9부 바지 등 평소에는 입어본 적 없는 옷들을 마음껏 입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패션쇼가 단순히 즐거운 추억으로 끝난 것만은 아니다. “예쁜 옷을 직접 만들어 입고 싶어서 패션디자인과에 들어갔다”는 남씨는 이번 패션쇼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말도 없고 소극적이고 자신을 꽁꽁 숨기려고만 했는데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전씨와 이씨도 남씨가 진짜 많이 변했다고 입을 모은다. 옷 입는 것만 해도 오디션장에서 처음 봤을 때는 살이 하나도 안 보였다고 한다. 몸을 온통 옷으로 다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목까지 목도리로 꽁꽁 싸맸다는 것.
“예전엔 이런 파진 옷은 꿈도 못 꿨는데 이제는 파진 옷도 입고 밝은 색 옷도 입게 됐어요. 교복 말고 치마는 한 번도 입지 않았는데, 이번에 모델료로 받은 20만원짜리 상품권으로 치마를 살 거예요.”
남씨는 또한 패션쇼에 참여했던 20명이 대부분 남자친구가 있는 걸 보며 세상 남자들이 모두 날씬하고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예전엔 자신감이 없어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남자 생각을 안 했지만, 이제는 사귈 수 있을 거 같아요. (전)강미 언니 남편 같은 좋은 남자 만나고 싶어요.”
전씨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이씨도 “너무 멋진 분”이라고 거든다. 전씨는 첫아이 낳고 8kg이 더 쪄서 스스로 주눅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남편은 늘 “나한테만 예쁘면 된다”며 “남의 시선에 기죽지 말고 당당해지라”고 말해줬다는 것.

뚱뚱한 여자들 위한 ‘빅 우먼 패션쇼’무대 선 전강미·이수연·남선희

빅 우먼 패션쇼 모델로 선 남선희, 이수연, 전강미씨. (사진 왼쪽부터)


세상엔 전씨의 남편처럼 멋진 남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많다. 패션쇼를 준비하던 중 신문에 그들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에 오른 기사를 보고 누군가 심한 댓글을 달아놓아 한동안 다들 속상했다고 한다.
이씨는 “사람들이 너무 말을 툭툭 던진다”며 “뚱뚱한 사람들한텐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도 상처받을 거 다 받는다”고 토로한다.
“언젠가 일하러 가는데 아파서 택시를 탔던 적이 있어요. 도착해서 내리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살 좀 빼요’ 하는 거예요. 아저씨가 급하게 가버려서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전씨도 “고등학교 때 교회 청년부 모임에서 어떤 오빠 한 명이 ‘성격 나쁜 여자는 두들겨 패서 고치면 되지만 뚱뚱한 여자는 돈 많이 든다’고 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며 “우리는 남에게 절대 상처 주지 않는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언어폭력을 하면서 상처를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전씨는 뚱뚱한 건 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설움을 당해야 한다고. 아파서 쉬겠다고 했더니 “너도 아프냐?”며 “그냥 일하라”는 소리를 듣고 끝까지 일하다 집에 가서 끙끙 앓았던 적도 있고, 미팅 나갔는데 남자한테 “운동 좀 하셔야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충고를 들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 때 날씬하고 예쁜 아이는 학교를 거의 나오지 않아도 A+를 받고,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는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들어도 C를 받는 것도 보았다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설움이 싫어 다이어트도 해봤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씨는 “뚱뚱하지 않았다면 패션모델이 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겠냐”며 “지금은 현재에 충실하며 현재를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한다.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그게 더 불행하다는 것. 전씨 역시 “사랑하는 남편과 건강한 아들이 있어 이대로도 행복한데 주위 사람들 때문에 뺄 생각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뚱뚱하면 건강도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뚱뚱한 사람이라고 전부 건강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몸집이 큰 여자들은 지방뿐 아니라 근육도 붙기 때문에 힘이 세죠. 제 아들 둘이 아주 유별난데, 다들 ‘건강하고 힘이 센 너니까 키운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살은 뺄 생각이 없어요(웃음).”
이들은 패션쇼에 함께 섰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터넷에 77사이즈 이상 입는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는 ‘통 큰 여자들의 모임’이란 카페(cafe.daum.net/tongkengirl)도 만들었다고 귀띔한다. 앞으로 카페를 통해 회원들끼리 물물교환도 하고 각종 이벤트도 마련하면서 “통 큰 여자들의 재미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뚱뚱한 것은 그들에겐 아무 문제가 안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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