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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한 자리 놓고 모두가 무한 경쟁 중인 대치동… 모범생도 아파요”

대치동 ‘금서’ 펴낸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손성은 원장

김명희 기자

2025. 09. 10

서울 대치동 한복판에서 20년간 아이들의 마음을 돌본 소아정신과 의사가 ‘사교육 1번지’의 민낯을 기록했다.
그는 입시 성공을 향한 단일 노선 경쟁이 부모와 아이 모두를 병들게 한다고 말한다.



개그우먼 이수지가 연기한 ‘대치동 제이미 맘’의 이면에는 씁쓸한 현실이 숨어 있다. 배변 훈련조차 되지 않은 네 살 제이미는 수학과 영어학원에 다닌다. 미래에 있을 지도 모를 수행평가를 대비한다며 제기차기 과외 선생님까지 찾는 엄마의 모습은, 영유아 시기부터 시작되는 대치동식 조기 사교육의 단면이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떠도는 ‘교육 로드맵’은 그 실태를 잘 보여준다. 놀이 학교에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4세 고시’를 준비하고, 이어 명문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7세 고시’를 치른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된 선행학습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중학교 과정을, 5~6학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사교육의 사다리’는 아이와 부모를 한번 발을 들이면 쉽게 내려오지 못하게 한다.

대치동에서 20년간 소아정신과를 운영하며 아이들의 마음을 치료해온 손성은 생각과느낌 클리닉 원장은 최근 책 ‘이제는 멈춰야 할 대치동’을 펴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생각과느낌 클리닉 위아래 층에는 내로라하는 입시 학원들이 들어서 있고, 길 건너에는 지난해 수능 현역 만점자를 배출한 대형 학원이 버티고 있다. 손 원장은 대치동을 “자녀라는 ‘보물’의 가치를 최상으로 높이려는 완벽주의 부모들이 모인 곳”이라고 설명한다. 의사, 변호사 등 고학력 부모들이 ‘내 아이도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잘되길’ 바라며 안정적이고 부유한 삶을 위한 ‘교육 게임’에 뛰어든다. 그러나 지나친 조기교육과 경쟁은 아이들을 창의성 대신 특정 직업의 틀 속에 가두고, 좌절과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마저 빼앗는다. 그가 20년간 목격한 현실은 냉정하다. 대치동식 교육에 몰입한 아이 중 상당수가 틱, ADHD, 강박증, 시험 불안, 우울증 등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부모 역시 불안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가정이 흔들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손 원장은 “성공이나 행복으로 가는 기차는 한 노선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부모가 아이의 속도와 방향을 존중할 때 비로소 다른 길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손성은 원장은 대치동은 자녀를 완벽하게 키우려는 부모들의 열망이 모여 분출된 곳이라고 말한다.  

손성은 원장은 대치동은 자녀를 완벽하게 키우려는 부모들의 열망이 모여 분출된 곳이라고 말한다.  

‘제이미 맘 패딩’은 뒤처지지 않으려는 불안 심리 

‘이제는 멈춰야 할 대치동’이 대치동 ‘금서(禁書)‘가 됐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실제로 대치동의 한 서점 사장님이 “이런 제목의 책을 매대에 놓긴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일부 학원 강사나 교육 종사자들은 ‘학원을 없애자’는 내용으로 오해하기도 했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치동에는 ‘성공하려면 이 길로 가는 열차에 타야 한다’는 로드맵이 있습니다. 일단 거기에 올라탄 부모님들은 절대 내리려고 하지 않아요. 내리는 순간 도태되고 실패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문제는, 입시 성공 역에 도달하는 방법이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경로가 무수히 많고, 다른 길로도 성공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가장 ‘검증된’ 노선에 아이를 태우려다 보니 4세 고시, 7세 고시 같은 극단적 현상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아이가 그 과정에서 아프고 지쳐갑니다. 저는 현장에서 매일 그 모습을 봐 왔어요. 공부를 시키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입시 성공과 행복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정해진 로드맵대로 가서 성공한 아이들도 많잖아요. 

그런 방식이 잘 맞는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계속 그 길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모든 아이가 같진 않잖아요. 사실 첫째 교육에 성공한 부모님들이 제일 위험해요. 아이마다 성향이 다 다른데, 첫째의 성공 로드맵을 둘째와 셋째에게 억지로 덮어씌우면 아이가 상처받고 공부를 싫어하게 됩니다. 아이가 스스로 ‘달리고 싶어지는 순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강요와 과도한 선행은 그 포인트를 없애버리기도 합니다.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같은 열차에 태우는 건 문제입니다. 특정 학원이나 코스가 ‘엘리트의 시작’이라는 착각 속에 수많은 부모님이 아이를 옭아매지만, 실제로는 그 길을 거치지 않고도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내 아이의 속도와 방향을 제대로 아는 것. 그리고 아이가 잠시 뒤처져 보이더라도 ‘끝이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열두 번도 바뀝니다. 입시 기차는 한 노선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의 믿음과 선택이 아이의 여정을 훨씬 더 다채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치동 7세 고시’로 대표되는 조기 사교육의 문제는 뭘까요.

인지적으로 아직 이해가 어려운 것을 억지로 배우면 아이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공부와 문자를 싫어하게 됩니다. 공부를 조금 일찍 시키려다 오히려 공부의 ‘싹’을 잘라버리는 셈이죠. 부모와 자녀 관계도 악영향을 받으며, 아이들은 시험 불안이나 우울증에 일찍 노출될 수 있습니다. 특히 4~7세는 부모가 생각하는 이성과 논리의 시기가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꽃피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조기 사교육은 놀이터에서 뛰놀며 발달해야 할 공간지각능력, 균형감각, 신체 협응력, 사회성 등을 빼앗습니다. 예를 들어 숙제는 눈과 손의 협응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힘들어합니다. 저는 뇌를 1층(감각 뇌), 2층(감정 뇌), 3층(인지 뇌)으로 설명합니다. 1, 2층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3층 공부만 계속 시키면 전체가 균형을 잃고 흔들립니다. 성적이 안 나올 때 절망을 이겨내고 다시 도전해보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너무 어려운 과제와 과도한 양은 아이를 지치게 합니다. 수학 문제 하나를 붙잡고 고민하고, 포기했다가도 다시 해보는 ‘매달림의 경험’을 허용할 필요가 있어요.  

‘대치동 제이미 맘’처럼 같은 브랜드의 패딩, 가방, 보석으로 치장하는 현상은 왜 나타날까요.

남들이 좋아 보이는 것, 비싸서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에요. 차별화하고 싶고, 앞서가고 싶은 욕망이죠. 동시에 ‘나만 안 하면 소외될 것 같다’는 불안 심리도 작용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배제를 힘들어합니다. 본능만 따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쪽지 시험 못 봤다고 다그치면 수능도 망칩니다”

책에서 “모범생도 아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서도 어떤 위험 신호가 보이시나요.

강박증, 과도한 꼼꼼함, 번아웃이 대표적이에요. 모범생으로 살던 아이가 갑자기 글이 눈에 안 들어오거나, 공부하고 싶어도 강박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성 저하, 청각 예민, 소음 민감, 시험 불안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뇌의 균형이 깨진 결과일 수 있습니다. 전교 1등 아이들을 많이 봐왔는데, 성적이 좋아도 좌절·인내·균형감각이 부족하면 위기에 취약합니다. 수능장에서조차 잡음이나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면 실력 발휘가 어렵습니다. 공부만 잘한다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균형을 잡고 위기를 넘길 힘이 필요합니다.

시험 때 심하게 긴장하는 아이, 원인이 부모에게 있을 수 있다고요.

모든 아이는 잘하고 싶어 합니다. 시험 전 불안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런데 그 불안이 과도해지는 경우는 대개 아이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기대와 간섭이 얹어지면 그 무게는 배가됩니다. 시험은 아이의 시험인데, 부모가 마치 자기 시험처럼 여기면서 준비 과정까지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는 범위조차 잘 모르는데 부모가 전부 파악하고 챙기고 있으면 이미 균형이 깨진 겁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아이의 시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어요. 학원 쪽지 시험, 영어 단어 시험 같은 사소한 부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아이가 자기 짐만 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부모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가 게임·스마트폰 중독입니다.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게임과 영상은 시각 자극을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만 반복하면 다른 감각계 발달이 뒤처질 수 있어요. 아이들이 여기에 빠지는 건 단순히 ‘나쁜 습관’이 아니라, 즐겁게 살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만족을 느낄 통로가 게임이나 영상뿐이라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죠. 부모는 흔히 ‘휴대폰만 없애면 공부를 잘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열정을 단순히 차단하는 건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가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무엇을 할 때 몰입하는지를 어릴 때부터 관찰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저는 예체능 교육을 권하는 편입니다. 음악, 미술, 스포츠처럼 몸과 마음을 함께 쓰는 활동이 아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죠.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할 일이 없어 휴대폰을 찾는 게 아니라, 뒹굴며 생각하거나 소설·만화책을 읽으며 스스로 시간을 채우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청소년들의 성범죄·동성애·관계망상 등 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은 생명력입니다. 인간의 본능이자 삶의 에너지죠. 아이들을 억압하고 경쟁 속에 가두면, 이 생명력은 다른 방식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사춘기에 이르면 부모도 막기 어렵죠. 요즘은 SNS로 인해 작은 행동 하나라도 평생 기록으로 남게 돼 그 결과는 더욱 심각합니다. 성은 권력욕, 물질욕과도 비슷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관계와 성의 방향이 왜곡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몸을 존중하는 법’과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 불쾌하거나 불행할 때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왜곡된 쾌감을 찾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지루하고 힘들어서 자위를 하거나, 청소년이 음란물을 탐닉하는 건 일종의 생존 반응입니다. 놀이, 운동, 건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게 해주면 그 욕구가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될 가능성이 줄어들어요. 

“아이 안에 스스로를 돕는 힘 있다는 걸 믿으세요”

청소년 자녀의 연애에 대해 부모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까요.

아이 성향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화해서 말하긴 어려워요. 이성 교제가 공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아이가 판단력을 갖추도록 돕는 것입니다.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미성년자인 아이가 부모를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관계, 자존감을 바탕으로 이상한 사람에게는 “No”라고 말할 힘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고방식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아이는 스스로 안전한 관계를 선택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학업과 병행할 줄 알며,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이죠.

“아이가 발달해가는 힘은 아이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부모가 모든 걸 통제해야 아이가 잘된다고 믿는 건 착각입니다.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지금도 숨 쉬게 하는, 더 큰 힘이 존재합니다. 그 힘이 아이를 좋은 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순간, 불안과 조급함에서 벗어나 아이를 놓아줄 수 있어요. 설령 그 힘을 믿기 어려워도, 아이 안에 스스로를 돕는 힘이 있다고 가정하고 대하면 부모의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은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아이를 축복하고, 웃어주고, 간섭을 줄이고, 부모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 집안일도 함께 하는 게 좋아요. 부모의 말은 아이에게 강력한 암시가 됩니다. “너는 잘 살아갈 거야”라는 축복의 말은 아이의 생명력을 더 건강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들에게 ‘덕담’을 권합니다. 덕담이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말이니까요. 이런 태도가 아이의 내적 힘을 활성화해 스스로 발달해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대치동의 치열한 현실 속에서도 부모와 아이가 서로의 여정을 믿고 응원할 때 경쟁보다 더 오래가는 힘이 생긴다고 말하는 손성은 원장. 그의 책은 금서(禁書)가 아닌 치유의 성장을 견인하는 금서(金書)란 생각이 든다. 

#대치동사교육 #손성은원장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뉴시스 사진출처 핫이슈지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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