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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신작 ‘비밀과 거짓말’ 펴낸 작가 은희경

■ 기획·김유림 기자 ■ 글·황수정‘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 사진·문학동네 제공

2005. 03. 10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손꼽혀온 은희경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작가로 등단한 지 10년째인 올해 그가 소설 ‘비밀과 거짓말’을 발표한 것. 2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는 그가 이번 작품이 지금까지의 ‘은희경 소설’과 사뭇 다른 이유와 2년간의 미국생활에 대해 들려주었다.

4년 만에 신작 ‘비밀과 거짓말’ 펴낸 작가 은희경

소설가 은희경(46)이 참 많이도 변했다. 소설 ‘마이너 리그’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소설 ‘비밀과 거짓말’에서는 은희경만의 조소 띤 어조, 느닷없는 사건들로 상식을 전복시키던 의외성이 사라졌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작품을 한 권이라도 읽어봤던 사람이라면 ‘비밀과 거짓말’을 통해 작가가 분명히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은희경 역시 이번 작품은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원고를 다 써놓고도 그걸 정리해서 묶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어요. 어찌 보면 세 권에 나눠 쓸 이야긴데, 한 권에 압축해 넣는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시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비밀과 거짓말’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에 관한 책이다. 10년 전 발표한 성장소설 ‘새의 선물’의 다른 반복인 셈. 소설은 두 형제 영준과 영우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연대기적 사건들이 끼어들어 소설은 사연 많은 가족사로 발전한다. 다양한 소재, 선 굵은 이야기가 몇 권짜리 대하소설로 희석시켰어도 충분할 농도다.
“지금껏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유기적으로 한데 담아 봤어요. 형제 이야기, 신이 특별히 사랑한 이의 이야기,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를 떠돌며 사는 사람의 이야기…. 지금까지의 형식과는 다른, 무엇보다 요즘 세대에 맞는 대하소설을 썼다고 할까요?”
고향을 떠나 살던 주인공 형제는 아버지가 죽자 그가 남긴 유물을 찾아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오랜 가족사의 비밀과 맞닥뜨린다. 아버지 유품인 북채와 집문서를 건네받은 형제를 통해 소설은 객관적 관찰자 시점으로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성장기록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가고 있다. 10년 전 냉담과 냉소로 문제제기를 했던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과는 영 분위기가 다른 성장소설인 셈이다.
그의 말대로, 각각 다른 소재의 세 권짜리 책이 되고도 남았을 이야기를 신통하게 고리를 끼웠다. 집안의 비밀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느닷없이 밝혀지는 과정은 다큐멘터리로, 두 형제의 골 깊은 갈등은 이야기체로, 영화제작 일을 하는 영준의 내면은 도회적 단문으로.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달리기와 사색 즐기며 글쓰기 몰두
은희경은 2002년 7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시애틀 워싱턴주립대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며 이번 소설을 써내려 갔다. “조용히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행도 하고, 짬이 날 때마다 달리기를 했다”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지냈다”고 밝혔다.
“소설을 쓰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새의 선물’을 자주 생각하곤 했어요. 내 유년의 기억이나 경험은 그대로인데, 어떻게 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작품 분위기라든지 전개방식을 의도적으로 확장시켰어요. 그동안 독자들은 다들 몰라보게 성장했을 텐데 작가란 사람만 그대로 그때 옷을 입고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부채감이 있었던 거죠. 그런 중압감이 이번처럼 컸던 적도 없어요.”
세월이 그만 비껴가 주었을 리 없다. ‘새의 선물’을 쓸 때 곁에서 동화책을 읽던 딸이 어느새 훌쩍 커서 대학에 갈 나이가 됐다고 한다. 그 딸이 지금은 자신의 글을 맨 먼저 읽고 평해주는, 든든한 ‘제1 감독관’이라고.

4년 만에 신작 ‘비밀과 거짓말’ 펴낸 작가 은희경

작가란 수식어를 달고 산 지 올해로 딱 10년.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된 그는 그해 내쳐 ‘새의 선물’을 발표했다. 가슴속에서 작가의 꿈을 여물리던 시간까지 다 합치면 그의 글쓰기는 이미 30여 년쯤 ‘숙성’된 와인이다. 글짓기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던 초등학교 때부터 “글재주가 좋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
질문 하나를 던지면 다음에 올 질문까지 앞질러 답을 내놓곤 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유년의 기억, 성장통(痛)에 유난히 집착해온 그가 “이제 더는 성장소설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울컥 뱉어내듯 말했다. ‘은희경=성장소설’의 확고부동한 공식을 깨겠다는 선언이다.
“지금까지는 마치 내 얘기가 아닌 척 빙빙 돌려 말해 왔어요. 이젠 그렇게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내 육성 그대로에 귀 기울여 줄 독자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면 이번 소설에서 그는 꽁꽁 가둬 놓았던 속엣말을 힘겹게 풀어 놓았다. 어렵사리 아버지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것도 저 멀리 떠나보내려는 유년에 대한 마지막 ‘헌사’인지 모른다.
“아버지란 이름에 막연히 압도당했던 청소년 시절의 기억이 오랫동안 싫었다”고 조심스레 입을 떼더니 옅은 한숨을 실어 말을 보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깨달았어요. 과연 내가 그토록 멀리하려고 했던 것들이 나를 놓아 주었던가…. 자연스럽게 나란 존재의 뿌리를 고민해 보게 된 거죠.”
마흔 중반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군살 하나 없는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고 한다.
“미국에 있으면서 8km 달리기를 자주 했어요. 대회도 두 번 나갔고요. 올해는 하프마라톤에 도전해 볼까 해요. 소설 쓰기도 마라톤 같은 거여서 이젠 더 큰 스케일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은희경은 “앞으로는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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