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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안타까운 사건

아들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이웃집 남자 살해해 구속된 정씨의 눈물

■ 기획·최호열 기자 ■ 글·김순희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4. 08. 10

지난 6월22일 새벽, 40대 주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이웃집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살인으로 이어진 이 사건의 전말을 취재했다.

아들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이웃집 남자 살해해 구속된 정씨의 눈물

세상에서 성추행만큼 치욕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아들이 보는 앞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면 그 수치심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6월22일 새벽, 강릉경찰서는 정모씨(48)를 살인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이날 자정께 술에 취해 자신의 집에 들어와 아들(11)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같은 마을에 사는 박모씨(43)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고 한다. 성추행에 따른 모욕감이 살인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 뒤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정씨를 찾았지만 그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며 면회를 거절했다. 대신 사건 담당 경찰과 남편 김모씨(48)를 통해 사건 정황과 정씨의 심경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남편 김씨는 “제가 그날 술에 취해 자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만약 제 앞에서 그런 일(성추행)이 벌어졌다면 그 놈을 집사람 대신 제가 죽였을 겁니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그런 걸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며 안타까움과 울분을 토했다.
“박씨와 저는 친한 사이는 아니고 한 장애인단체 사무실에서 몇 번 얼굴을 봐서 아는 정도였어요. 집사람과 저는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가끔 장애인단체 사무실에 갔었고, 박씨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장애인이라 그곳에 출입하곤 했지요.”
사건 당일, 정씨는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정씨의 집 맞은편에 있는 교회 앞에서 두 명의 남자가 술에 취해 떠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착각했다는 것을 안 집사람이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그 사람들이 ‘얘기나 하자’고 하더래요. 보니까 그중 한 명이 박씨였던 거예요.”
정씨가 집에 들어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두 남자’는 정씨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아저씨(정씨의 남편)에게 할말이 있어 왔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정씨가 “남편은 지금 잔다. 밤이 늦었고 술에 취했으니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박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관문을 두드리며 “그럼 커피나 한잔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정씨는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당시 정씨의 남편 김씨는 술에 취해 안방에서 잠들어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정씨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싱크대 앞에 있는데 박씨가 다가와 “우리 한번 접해(섹스를 지칭)보자”고 농을 건네며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정씨가 소스라치게 놀라 “뭐하는 짓이냐”고 항의하며 저항했지만 박씨는 멈추지 않고 그의 몸을 더듬더니 급기야 바지를 벗기기까지 했다. 이때 거실에서 자고 있던 아들이 일어나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있는 모습이 정씨의 눈에 들어왔다.
“집사람이 ‘애 보는 앞에서 망신 당하고 싶냐’면서 박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고 해요. 그런데 박씨가 밖에서도 계속 집사람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했다고 합디다. 그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 주방에서 칼을 들고 나갔다더군요. 제 정신에서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정씨는 박씨의 심장 부위를 찔렀고 박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엄마가 아저씨와 다투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어린 아이가 성추행이 뭔지, 강간이 뭔지 알겠습니까. 아들은 집사람과 박씨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고 해요.”

아들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이웃집 남자 살해해 구속된 정씨의 눈물

김씨는 “이제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가 싶었는데 그 꿈이 다 무너졌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정씨와 지난해 11월 재혼했다. 열한 살 난 아들은 김씨와 전처 사이에서 태어났다.
“97년도에 전처와 이혼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살다가 지난해 재혼했어요. 집사람은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고요. 집사람은 아들에게 친자식 이상으로 참 잘해줬는데….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아들은 ‘엄마, 엄마’하면서 집사람을 무척 따랐어요. 생각해보세요. 아이 앞에서 몹쓸 짓을 당한 집사람의 심정을 말입니다. 집사람은 그 당시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고 해요. 아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죽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김씨 아들의 담임이었던 김모 교사는 “3학년 말 새엄마가 들어온 후부터 그 아이의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했다.
“아빠와 단둘이 살 때보다 아이가 훨씬 밝아졌어요. 늘 냄새나는 옷을 입고 다녔는데 옷차림새뿐만 아니라 몸도 깨끗해졌어요. 지난 6월 초엔 4학년 전체가 1박2일로 현장학습을 갔어요. 그때 부모님이 자녀에게 써준 편지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엄마가 써주셨다면서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읽기도 했어요. 그걸 지켜보는 제 마음이 다 흐뭇해질 정도였죠.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서 몹시 안타깝습니다.”
김씨는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사건 이후 김씨는 아들을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직장생활과 아내의 옥바라지를 병행하느라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집사람과 재혼한 이후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행복을 맛보면서 살았는데…. 사실 집사람의 기억 속에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일이 자리 잡고 있어요. 20대 초반 강도에게 강간을 당해 그때 받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힘든 세월을 살았다고 해요.”
6월24일 구속 수감된 정씨는 검찰 측의 요청으로 7월 초 정신감정을 받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김씨는 “집사람과 같이 산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구속 수감된 아내의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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