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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남성의 눈으로 바라본 여성문제

남성의 눈으로 성차별 사회 꼬집는 연재만화 '상위시대' 그리는 황경택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글·조희숙 ■ 사진·최문갑 기자

2003. 04. 03

아직 아이도 없고 바가지 긁는 마누라도 없다. 갓 서른 넘은 총각에 그 흔한 여자친구 하나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보통 남자 황경택씨.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요리가 취미라는 그의 만화는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간다.

남성의 눈으로 성차별 사회 꼬집는 연재만화 '상위시대' 그리는 황경택

지난해 11월부터 한겨레신문에 ‘상위시대‘를 연재하고 있는 만화가 황경택씨(30). 그는 드물게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다루는 신세대 만화가다.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대학시절 여성학과 아동학 관련 수업을 챙겨 들을 정도로 관심사가 남달랐다는 황씨. 투덕투덕한 외모와 달리 “여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여들었던 아동심리학 수강생 중 EQ지수가 가장 높은 학생이었다”며 자랑이다.
“미팅에 나가면 으레 남자들이 돈을 내야 하고 결혼할 때도 함께 살 집은 남자가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잖아요. 성차별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여자들처럼 저 같은 남자들한테도 그런 의무감이 부담스럽거든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성차별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며 걸리는 문제를 하나씩 제기하는 셈이죠.”
현재 10회까지 연재된 그의 만화 속에는 ‘무딘 남자’의 시각으로 본 다양한 여성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그중 한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어느날 여자친구가 이유 없이 짜증을 내자 자기에게 싫증난 것으로 착각한 남자는 급기야 헤어질 결심까지 한다. 남자들은 ‘그날’을 모르니 제발 힌트라도 달라는 식.
“여성의 생리에 관한 소재는 제 경험담이었어요. 예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짜증이 잦고 만사 시큰둥한 거예요. 정말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나 싶어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며칠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날’이라 예민했었다고 설명해주더라고요. 여자친구가 말해주기 전까지 ‘생리전증후군’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여자 후배가 담배를 입에 물자 흠칫 놀라거나 성추행범으로 오해받은 남자 이야기, 똑똑하고 건강한 여자가 최고라고 입을 모으지만 결국 지나가는 예쁜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는 남자들의 모습 등등. 만화의 소재는 그의 경험담이나 가족, 친한 선후배들 모습에서 조금씩 찾아온 것들이다.
그는 전국에서 러브호텔이 없는 유일한 곳이라는 전북 임실군 출신이다. 중학교 때까지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 말씀에 일찌감치 그림을 접었다.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시절 탈춤반에서 활동하면서부터.
“마당극을 공연하기 위해 사람들을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창작의 즐거움에 빠진 거죠. 군 제대 후에 평소 관심이 있던 만화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그 길로 매일 ‘우리만화연대’를 찾아갔죠.”

남성의 눈으로 성차별 사회 꼬집는 연재만화 '상위시대' 그리는 황경택

그는 개그만화와 성인만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만화연대는 시사만화가 박재동씨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만화가와 지망생들의 모임. 그는 우리만화연대의 문턱이 닳도록 찾아가 청소와 잔심부름을 자청하며 선배 만화가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1년 만에 그곳 간사직을 맡게 된 그는 기관소식지에 3년간 ‘간사의 일기‘라는 만화를 연재하며 독학으로 만화의 기본기를 다졌다. 그리고 지난해 1월 민족예술총연합에 시사만화 연재를 시작으로 지금의 ‘상위시대‘까지 오게 된 것. 그가 ‘상위시대‘를 연재하게 된 배경에는 만화가 박재동씨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우리만화연대에서 제가 그렸던 ‘간사의 일기‘를 눈여겨보셨던 모양이에요. 신문사에서 만화가를 물색하던 중 선생님께서 저와 선배 한분을 추천해주셨어요. 처음엔 직장 내 성희롱처럼 굵직한 여성문제를 다뤘는데 몇회 연재하고 나니까 소재가 금세 바닥나더라고요. 이제는 소소한 일상을 관찰하는 중이에요.”
결혼도 안한 미혼 남성인 그가 여성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대다수의 남자들이 여성문제에 둔감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만한 적임자도 없다. 게다가 남동생과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5년째. 그는 여느 주부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살림솜씨에도 탄력이 붙었다. 직장에 다니는 동생과 달리 하루종일 작업실을 겸하고 있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는 여성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는 셈이다.
“청소는 소질 없지만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이번 설에도 고향에 내려가서 칼질은 제가 도맡아했을 정도죠. 어느날 찌개도 끓이고 여러가지 반찬으로 저녁상을 차려놨더니 퇴근해 돌아온 동생이 입맛이 없다며 몇술 뜨다 일어서는 거예요. 정말 섭섭하더라고요.”
그는 비뚤어지거나 헝클어진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정리정돈에도 일가견이 있다. ‘살림 친화적인’ 성격은 오남매 중 그를 포함한 3명의 남자 형제들의 공통점이다. 그의 형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동생들을 혼내는가 하면 동생은 오래전부터 어머니와 명절음식 장만을 해왔다고.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다’고 말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그의 부친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만화를 그리면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성차별을 참 많이 접하게 돼요. 얼마전에는 식탁에서 ‘여보, 국 좀 떠줘’라는 형님과 ‘엄마, 물 줘’라는 조카를 보며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대물림되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죠. 하지만 모든 게 여성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에요. 도대체 드라마 보며 우는 남자를 왜 놀리는 거죠?(웃음)”
밥줄이 끊겨도 여성문제의 소재로 삼을 만한 일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황경택씨. 그는 여성문제와 같이 무거운 주제뿐 아니라 개그만화와 성인만화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당분간은 다양한 여성문제를 지적하고 독자들과 함께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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