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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선택

정치학도 출신 김현정씨의 ‘내가 경험한 역술의 세계’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2003. 03. 05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국회의원 선거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던 한 여성이 뒤늦게 역술의 길에 뛰어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지난 99년부터 역술인으로 활동을 시작, 수차례 방송에 소개되며 일약 유명인이 된 김현정씨가 바로 그 주인공.그가 역술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이야기.

정치학도 출신 김현정씨의 ‘내가 경험한 역술의 세계’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운수좋은 날’이라는 역술카페를 운영중인 김현정씨(36)는 국내에서 가장 방송을 많이 탄 역술인 중 한명이다. 그는 MBC ‘화제 집중’, SBS ‘행복찾기’ ‘황현정, 류시원의 NOW’ ‘토요일은 간다’ ‘진실게임’ ‘한밤의 TV연예’ 등에 출연, 쇼프로그램 전문 역술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경력 4년의 신참 역술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이렇듯 단기간에 유명해졌을까? 먼저 그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연수를 하고 돌아온 유학생 출신 역술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처음 그가 역술가가 되겠다며 압구정동 거리로 나왔을 때, 그는 이런 경력 덕에 각 언론에 ‘화제의 인물’로 잇달아 소개됐다.
“처음엔 아침 방송에 신세대 엘리트 역술인으로 소개됐어요. 그걸 계기로 방송 쪽과 연을 맺게 됐는데,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사실 사주팔자 보는 건 비주얼이 약해 방송으로 보면 별 재미가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타로카드 점이나 수정구슬 점 같은 것들을 시도한 거죠. 배운 적은 없어요. 단지 방송용 소품이었어요(웃음).”
그는 방송에 출연하기 전 담당 PD나 작가에게 먼저 ‘컨셉트’부터 물어본다. 어떤 걸 시도하면 시청자들이 좋아할지 나름대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 캠프에서도 일한 적 있는 정치학도 출신답게 그는 미디어 활용에 대해 나름대로 몇 가지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쇼맨십이다.
그는 올 정초 SBS ‘한밤의 TV연예’에 출연 안재모, 한은정, 주얼리, 싸이의 사주를 뽑아주었는데, 이 방송 이후 그는 숱한 오해를 받아야 했다. 기독교 신자라 사주를 믿지 않지만, 방송에서 하는 행사니 한번 들어보겠다던 안재모가 그녀가 뽑아주는 사주 분석에 감탄에 감탄을 토했기 때문.
“안재모씨하고 혹 친척 아니냐고 뭐라고 그러더라고요. 워낙 이 동네가 시기 질투도 심하고, 루머도 많은 동네다 보니 누가 잘된다고 하면 그렇게 이상한 소리가 나와요. 보통 압구정동 역술원엔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 탤런트들이 많이 들러요. 어떻게 하면 뜰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많죠. 유명 연예인들도 간혹 들리는데 보통 입막음을 단단히 하고 가는 편이죠. 그냥 인생 상담이에요. 여자 사주 들고와 궁합을 보고 가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역술인의 길을 가게 됐을까?
“17세 때부터 이유 없는 방황이 시작됐어요. 세번의 자살 미수를 경험했고, 방과후면 거리를 돌아다녔죠. 대학에 갔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어요. 휴학하고 그냥 그렇게 붕 떠있는 생활을 계속했어요. 어머니가 저 때문에 신통하다는 점집이며 무당집에 허구한 날 드나드셨죠. 그때마다 저보고 내림굿을 받으라고 하대요. 어쩔 수 없는 사주라고, 만나는 무당마다 그렇게 말을 하니까 어머니는 펑펑 우셨어요. 그때 저는 ‘웃기고 있네’하면서 코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붕 떠있는 생활을 하다 그는 한 세미나에서 당시 전경련에 근무하던 남편 이모씨(56)를 만났다. 스무살의 나이 차이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편 이모씨와 94년 결혼했다. 남편 이씨를 만나면서 심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는 입학 10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동안 그는 한 국회의원의 선거캠프에 참여, 두번의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남편을 만난 이후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갔다. 그러나 남편 이씨가 직장에서 명예퇴직당할 상황에 처했던 지난 96년 가을, 그는 내림굿을 받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터져버렸다’고 했다.

정치학도 출신 김현정씨의 ‘내가 경험한 역술의 세계’

사주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상담자가 원할 경우 타로카드나 수정구슬을 꺼내들기도 한다.


“말문이 터졌다는 건, 신기가 내렸다는 거예요. 어느날 남편한테 그랬어요. ‘일주일 후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는데, 우리 돈 떼인대’ 하고. 진짜 일주일 후에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보증을 서준 사람이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남편이나 저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애들도 있고, 집안 체면도 있고 내림굿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싶었는데, 한 용하다는 선생님이 ‘공부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역술인의 길을 가게 됐죠.”
그의 친정아버지는 국영기업체 현직 임원이고 오빠와 동생은 한의사다. 그리고 막내동생은 현재 프랑스 유학중. 친정 체면이나 현재 대학 연구소에 있는 남편 체면상 신내림을 받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3년을 공부한 이후, 그는 지난 99년 일산에 역술원을 냈다. 그러나 막상 개업을 해놓고 보니 어떻게 운영해갈지 앞길이 막막했다. 결국 그는 6개월 만에 역술원의 문을 닫고, 역술 체인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역학 공부도 더 하고, 운영 노하우도 터득할 생각이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전화 상담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역술원. 당시 지원자가 적은 밤근무를 자처해 저녁 8시부터 새벽까지 상담을 계속했지만 한달 수입이라곤 3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가장 장사가 잘된다는 압구정동으로 터를 옮겼다. “장사 안되는 지점에서 고생할 만큼 했으니 이제 압구정점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떼를 써 무작정 짐보따리를 싸서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른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세간에 알려진 것은 모 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대졸 출신 역술인이라는 점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점 때문에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는 각종 쇼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타로카드 점이나 수정구슬 점 같은 특유의 쇼맨십을 선보였다.
“유명해져봐야 체인점에 있으면 역술가 자신은 돈을 벌기가 힘들어요. 보통 체인점이 6, 역술가가 4 정도 받는 식이죠. 그나마도 각종 비품비, 세금 같은 것까지 역술가 몫에서 제하니까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결국 2002년 여름, 그는 자신의 역술원을 개업했다. 그는 ‘신기로 본다’는 소리만큼은 죽어도 듣기 싫다고 했다. 사실 TV에서 보여준 수정구슬 점 등은 배운 것이 아니라 신기로 본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신기는 결코 쓰지 않으며 역술 비법을 전수해 상담한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어떤 신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냐고 거듭 묻자 그는 “이런 신은 어차피 잡신이고, 나는 신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뭔지 모른다. 나는 결코 신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주상 내년이면 신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대학에 다시 진학, 형제들처럼 한의사가 되겠다”고 장래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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