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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가 사는 법

매일 가계부 쓰는 남자 이종훈의 실속 인생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최희정 ■ 사진·조영철 기자

2003. 01. 14

대개의 남자들은 돈도 별로 없으면서 펑펑 쓰고는 호탕하다는 소릴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호탕한 남자는 순간뿐, 뒤돌아서면 후회하는 남자가 되곤 한다. 그러면서도 작은 돈에 일일이 신경 쓰는 남자를 보면 쫀쫀하다고 빈정거린다. 이런 와중에 주부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왔던 가계부를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하며 실속있게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매일 가계부 쓰는 남자 이종훈의 실속 인생

이젠 하루라도 가계부를 들춰보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는 이종훈씨.


이종훈씨(32·신세계푸드시스템 전략기획팀)는 직장 내에서 다소 별난 사람으로 통한다. 회사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마친 그는 동료들과 잡담하는 대신 늘 자판기에서 ‘나홀로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다. 가끔 동료들이 농담삼아 “남자가 무슨 가계부를 쓰냐? 그런 건 아내에게 맡겨라”고 말하지만 그는 가계부를 쓰는 일이 즐겁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그에게는 ‘가계부 쓰는 남자’라는 귀여운 별명까지 붙었다.
“내년에 내집 장만을 하면서 분가를 할 계획이거든요. 부모님이 조금 도와주시긴 했지만 결혼 전부터 줄곧 저축한 돈으로 장만하는 거라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내집 장만의 목표와 아이들 교육에 대한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기에 가계부 쓰는 일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가계부를 쓰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그의 가계부에는 적금, 신용카드 대금, 각종 공과금 자동이체 내역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양념통닭 1만원, 약값 2천원, 버스비(왕복) 1천1백원 등의 글자가 깨알같이 적혀있다. 가계부만 봐도 그가 얼마큼 꼼꼼하고 알뜰한 남자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97년에 결혼해 다섯살, 두살배기 딸 둘을 두고 있는 그도 사실 대학졸업 때까지는 지갑에 돈이 떨어지면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부모님께 타서 쓰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해왔다. 결혼 전에도 월급을 몽땅 부모님께 맡기고 용돈만 타서 쓸 만큼 돈에 대해서는 거의 무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자신이 부모님을 모셔야 되는 입장이 되고 또 자녀들이 커가는 걸 보니 앞으로 들어갈 교육비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수입에 맞는 규모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번거롭더라도 가계부를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가계부를 사다주면서 가계부 쓸 것을 권유했어요. 그러나 직장일뿐만 아니라 집안일까지 신경써야 하는 아내는 가계부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쓸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고요. 가계부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했어요.”
“가계부 쓰는 건 쫀쫀한 게 아니라 치밀한 거죠”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던 그가 마음을 굳게 먹고 본격적으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것은 5개월 전, 모 은행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러 갔다가 우연히 은행 웹사이트에 있는 가계부를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그 가계부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만 클릭해주면 그때그때 자신의 자산과 부채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계좌통합프로그램은 물론 각종 신용카드 사용 내역 등을 자동으로 알려주어 자신의 그날그날 수입 지출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느 가계부처럼 반찬 값, 쌀값 등을 영수증까지 붙여가며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지 않아도 되고 일일이 전자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수입 지출 금액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도 그의 구미를 당겼다.
“곗돈 관리다, 우리 사주 관련 통장이다, 증권관련 계좌다 해서 이 통장 저 통장 많이 만들어놨더니 각종 계좌이체가 혼란스럽더라고요. 도대체 돈이 어디서 어떤 용도로 빠져나가는지 제대로 알 수 없던 차에 잘됐다 싶어 그날로 바로 이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어요.”
주로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가계부를 쓰는데 버스 요금이나 담뱃값 등 하루치 잡비는 한번에 기록하고, 점심값은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가 일주일치를 한번에 몰아서 기록한다. 주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 지출도 일정해 가계부에 쓸 내용도 그다지 복잡하진 않다고 한다.

이씨는 자신이 쓰는 가계부는 30만~40만원의 용돈 관리가 대부분이라 사실 오리지널 가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일 항목별로 나오는 그래프를 보면서 자신의 현재 자산과 부채, 수입 지출을 체크해볼 수 있고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지출을 삼가겠다는 마음이 생겨 용돈관리에 짭짤한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가계부를 정리할 때 가끔 동료직원들이 와서 ‘그거 쓰면 뭐가 달라지냐’고 묻곤 합니다. 그때마다 씨익 웃고 말아요. 일일이 말해주어도 직접 쓰지 않으면 잘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가계부를 쓰면서 좋은 점은 수입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지출을 하다보면 점차 가정의 미래까지 설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다소 번거로울지 모르지만 습관이 되면 재미있고 하루라도 가계부를 살펴보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예요.”
그의 연봉은 대략 3천4백만원 정도. 이중에서 20~30%는 저축을 하고 연금과 세금을 제하고, 신용카드 대금, 각종 공과금을 결제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에 근무하는 아내의 수입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생활비나 교육비, 부모님 용돈 등을 아내의 수입에서 쓰고 나머지는 아내가 알아서 쓰도록 한다. 아직까지는 아내와 함께 가계부를 쓰지 못하고 혼자 쓰는 것이 좀 아쉽기도 하지만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그는 가계부 월말 통계를 낼 때 예산 금액보다 결산 금액이 적어 흑자가 된 경우에도 그냥 안심하고 지나치지 않는다. 그가 가계부를 꼼꼼하게 적는 것은 무조건 절약해서 저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합리적이고 건전한 소비생활로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가계부를 쓰는 참된 의미라고 여기고 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도 가계부를 쓰는 걸 보면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 버릇 들이기 나름입니다. 증권이다, 부동산이다 해서 재테크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소소한 돈 씀씀이에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해서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소소하게 나가는 돈이 무섭더라고요. 가계부를 쓰면서 비로소 적은 돈부터 알뜰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무조건 쓰고 보자는 무분별한 소비심리와 한번에 크게 벌어보자는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는 요즘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며 가계부를 즐겁게 쓰고 있는 이종훈씨의 마음을 한번쯤 되짚어 보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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