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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작가의 공간

44년 문학 인생 기념하는 전집 펴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고은

“역사로부터 해방된 문학, 문학 그 자체로부터도 해방된 문학을 하고 싶다”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박상건(시인·문화선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 ■ 사진·박해윤 기자

2002. 12. 11

노벨문학상 주요 후보 중 한명으로 물망에 올랐던 시인 고은. 그는 한국시의 대들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에 입산, 도를 닦고 방랑하는 10여년의 세월을 거친 뒤 환속하여 ‘허무’에 바탕을 둔 생의 절망을 노래하는 시인이 됐다. 엄혹한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몇 차례나 투옥되기도 했던 그가 고희를 맞이해 문학인생 44년을 정리하는 전집을 냈다. 평생을 떠돌며 살아온 원로시인의 시세계는 웅숭하고 깊기만 하다.

44년 문학 인생 기념하는 전집 펴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고은
“생애의 절반쯤은/나그네였다.” 시집 <남과 북> 첫 장에 실린 서시 ‘저녁’의 첫 구절. 고은 시인(70)은 생애의 절반, 아니 칠십 평생을 길손처럼 살아왔다. 김승희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인 고은 시인. 60년대 허무주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유미주의자, 청진동 무교동 술집 골목의 현란한 스캔들 메이커. 그 시절 그는 여대생들 사이에서 ‘성(聖)고은’으로 불렸고, 남도 여기저기서 가짜 고은이 출몰했을 정도로 ‘고은 신드롬’은 대단했다.
<남과 북>은 지난 99년 버클리 대학에 있을 때 꿈속에서 만난 시상을 정리해 올해 7월 한달 동안 쏟아낸 무려 1백35편의 시를 묶어낸 시집. 현재 1백50여권의 저서를 갖고 있는 시인은 “이제 몇권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상태”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맘만 먹으면 하루에 원고지 2백장 정도는 쓸 수 있다는 괴력의 소유자. “시인이란 무릇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계를 노래하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시인 고은.
어릴 적부터 떠도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의 기구한 운명
1933년 전북 옥구군 용둔부락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살 때 이웃에 사는 머슴에게 글자 몇자 배운 것으로 책을 읽어낸 ‘신동’이었다. 월반을 해 군산중학에 수석 입학했고, 일본인 교장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묻자, “천황이 되겠다”고 대답해 퇴학처분을 간신히 넘겼던 유명한 일화도 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능했던 당시 소년 고은의 꿈은 화가. 그의 아버지는 비행기, 배, 기차 등 늘 떠나는 것만 그려대는 아들에게 “넌 왜 늘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는 말을 던졌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기와집이나 초가집을 그려넣곤 했다. 미룡초등학교 시절, 누군가 길에 흘리고 간 <한하운 시초>를 주워 밤을 새워 읽은 그는 날이 새도록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이라는 구절이 소년의 심장에 주술처럼 와 닿았다. ‘그래,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십리 황톳길이 그에겐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만난 소달구지, 장꾼들말고는 텅 빈 고향길. 시골 하늘에 수탉 홰치는 소리,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 대낮의 갑작스런 적막, 밥 짓는 저녁 연기… 이런 풍경들은 일찍부터 그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먼 훗날 시의 밀알이 되었다. 저녁은 늘 슬프고 숭고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유난히 ‘저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젓한 황톳길 대신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붉은 완장에 익숙해져 갔다. 좌우로 갈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데올로기 참상을 목도했다. 마을 청년들 지시에 따라 생매장한 시체들을 짊어지기도 했던 시절.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묻은 미완의 역사 현장이었다”는 그의 회고는 이 시절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길에서 만난 스님을 따라 출가했다. 법명은 일초(一超), 그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6년후 효봉 대종사를 은사로 모시고 득도 후 12년간의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두고 온 것 무엇이 있으리요만/무엇인가/두고 온 듯/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두고 온 시’)는 그의 싯구처럼 떠도는 것이 삶이요, 운명이었 시인. 그에게 시는 책과 이론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가슴속 울림 그 자체다. 그렇게 울어서 만든 시들은 사람들의 감탄사를 자아냈고, 그 세월이 쌓여 벌써 고희의 문턱에 이르렀다.
58년 ‘폐결핵’이란 시를 썼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기침은 누님의 간음”이라는 시. 결핵을 앓고 있던 친구를 위하여 지어준 시로, 화가인 그 친구는 유난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했었다.
“이 시에서 누이는 실제가 아닌 ‘전설적 누이’죠. 새벽 기침 소리가 유난히 좋았어요. 평론가들은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세월이 흘러 그가 “나에게 누이는 없었다”고 고백하자 평론가들은 당황했다. 누이는 그에게 상징적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병원에 갔다가 한쪽 폐가 없다는 진단을 받은 것. 떠돌고 술 먹고 하는 사이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떠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떠올렸다. 현실로 다가온 허구. 이 시에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얽혀 있다. 폐결핵에 걸린 친구는 이 시를 한국시인협회에 투고했고, 결국 조지훈 시인의 천거로 <현대시>를 통해 그는 문단에 데뷔할 수 있었다.

44년 문학 인생 기념하는 전집 펴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고은

고은 시인은 맘만 먹으면 하루에 원고지 2백장은 너끈히 쓸 정도다.

효봉선사 밑에서 머문 것도 잠시, 다시 절간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심정을 “떠난 아버지여 늘 살아 있는 스님이여/이제 저는 저대로 따로 동행자 하나 얻어야겠습니다”(‘송별’)라고 노래했다. 그 후 사흘을 빈 속으로 떠돌았다. 마지막에는 철길 위에 몸을 눕히고 죽음을 기다렸다. “여보쇼, 여보쇼…죽고 싶어 환장했소잉.” 길 가던 할아버지가 그를 구해냈다. 환속 후에도 선(禪)과 사회의 이음새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던 그는 그 시절, ‘빙빙 겉도는 사회적 사생아’로 살았다. 다시 자살 충동이 도져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다. 배에서 수없이 술병을 들이키다 쓰러졌다. 뱃고동 소리에 깨어보니 항구. 자살을 뜻대로 이루지 못한 그는 공동묘지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불면의 밤을 술로 지새웠다. 광란의 세월이었다. 무교동 골목 낙지집의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나뒹구는 술병. 그러다가 술병 사이에 구겨진 신문 쪼가리에 마주한 청년 전태일 분신 소식을 접했다. “일꾼도 사람이다!”라는 그 외침은 술독에 빠져 지내던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허무’는 투쟁의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찬란한 역동의 역사와 조우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민예총 등 80년대 그는 민주화의 불꽃으로 되살아났다.
그 시절 ‘고은’은 문인 주소록에서는 아예 지워질 정도로, 공포의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핵폭탄이었다. 어느 시인에게 편지를 쓰는 중에 남색 잉크가 떨어져서 빨간 잉크로 편지를 썼지만, 그 시인이 빨갱이로 몰릴까봐 아예 편지를 불태워버린,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결국 감옥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때마다 초월의 언어들을 화살로 쏘아댔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79년 YH사건 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가서는 한쪽 귀의 고막이 터져 청각을 잃었다. 이어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졌을 때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 갇혔다. 창 하나 없는 그 방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곳.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의 뇌리에 스쳤다.
감옥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며 구상한 대작 <만인보>
감옥에서의 유일한 탈출구는 옛일을 회고하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살아나간다면 지나간 길목에서 마주한 이들을 시로 써서 되살리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오랜 땅에서/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만인보> 서시). 대작 <만인보>는 그렇게 구상됐다. 머슴, 구두쇠, 게으름뱅이, 욕쟁이, 노름꾼, 창녀, 배고파서 하루 이틀 꼬박 굶고 물배만 채우던 고향 사람들, 의병, 인민군…. <만인보>는 이런 민중의 족보다. 그런 시 구상을 하면서 고문으로 짓이겨지는 시간들을 견뎌냈다. 군법회의에서는 종신형이 선고됐다. 6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사면, 석방됐다. 그리고 <만인보>는 시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온 실천적 지식인의 노래로 이어졌다.
“나는 이 기간을, 20년의 시련과 부자유에도 불구하고 가장 축제적이고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마도 이때의 내 시와 삶은 총체적으로 규정되어도 좋다고 여겨요.”
82년 특사로 풀려나온 다음해, 안병무 박사 댁에서 중앙대 이상화 교수와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의 안성 마정리 대림동산 장미골에 둥지를 튼 지 어언 20년째를 맞고 있다. 안성터전은 본래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로‘허무, 절망, 죽음’ 이라는 주제에 심리적으로 탐닉된 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 <만인보>와 <백두산> 대작이 나왔다. <백두산>은 5만 2천행, 7권에 이르는 대서사시로 항일 무장투쟁에 몸 바친 가족 2대의 삶과 투쟁을 그려냈다.
고은 시인은 눈물이 많은 편이다. 젊은 날 친구 하숙집에 찾아갔다가 등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당에 달빛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새벽 3시까지 운 적도 있다. 다 울고 나니 울음이 말라버릴 정도였다. 친구는 “우리 방에 귀신이 들어서 안된다”며 그를 쫓아내 10년 동안 그와 절교하기도 했다. 애증의 관계가 미묘하게 얽힌 미당의 빈소를 찾아가서도 천장만 올려보다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는 고은 시인. 아마도 그건 눈물의 화해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울음이 속 깊게 들어 있어야 해요. 우리 나라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하지요. 후르시초프 회상록을 보면 ‘숲속에 가서 실컷 울고 오면 훨씬 나을 텐데, 울어야 할 숲조차 없구나’하는 대목이 나와요. 거기에 크게 공감했어요. 울음이란 이처럼 인간의 맺히고 흐트러진 삶을 정화시켜줘요.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이 가능하죠. 실컷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아! 이 일상을 다시 가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거죠.”

44년 문학 인생 기념하는 전집 펴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고은

80년대 감옥의 단골손님이었던 고은시인. 그는 독재정권에 맞서 당당히 싸웠던 투사였다.

최근 그는 “요즈음 시인들이 너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토로해 화제가 됐다. 울 줄도 모르고, 불취의 정신과 정서의 나눔도 없는, 메마른 젊은 시인들에게 자기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작금의 시들이 가슴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데 대한 질책. 그의 주(酒)철학은 이렇다.
“술이란 다음날 고단한 몸과 지독한 환멸을 가져오죠. 그러나 술을 마신다는 건 몸을 한번 바쳐보는 거예요. 자기를 아끼고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계산’ 대신, 자신을 던졌던 낭만주의, 혁명시대의 시인들이 빛나 보일 때가 있지 않나요?”
시인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적 영감이 메마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취해 있었다던가. 고은 시인은 두홉들이 소주 4, 5병 정도를 마셔야 술기운을 느낀다고 한다. “시인은 술을 마셔야 경계가 없어지고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것은 건강의 지름길”이라는 지론.
미국 하버드 대학 연구교수와 버클리 대학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해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덧붙여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고희를 맞아 44년 문학을 총정리, 시, 산문, 자전, 소설, 기행, 평론 등 38권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집을 출판했다. 원고지 12만매 분량의 이 전집 <전생 연보>의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의미 있는 화두를 던졌다.
“한때 문학과 역사를 동일시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역사로부터 해방되는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부터도 해방되는 문학을 하고 싶다. 온갖 말들의 껍질을 벗겨내고 뼈와 가시만으로 남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그의 대표작으로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를 추천했다. 시인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아스라이 겹쳐지는 자서전적 풍경화 같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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