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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못말릴 여자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 이강원이 털어놓은 남미 견문록

“천복과 천액을 타고난 기구한 팔자의 나라, 남미. 그 복잡미묘한 매력에 푹 빠졌어요”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 조영철 기자

2002. 11. 14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로 알려진 이강원씨가 4년 만에 돌아왔다. ‘탱고’의 아르헨티나와 ‘게릴라’의 나라 콜롬비아로 대변되는 남미를 겪어낸 체험담을 들고서. 외교관 부인이라는 안락한 신분 대신 ‘프리랜서 글쟁이’임을 내세워 남미 곳곳으로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그는 우리에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인 남미의 문화와 실상을 매력적으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 이강원이 털어놓은 남미 견문록
4년 전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김승영 전 아르헨티나 대사의 부인 이강원씨(55).
일견 화려해보이는 외교관 부인의 실상을, 때로는 ‘부엌데기’나 ‘이사 전문가’, 혹은 ‘운전기사’ ‘미용사’ ‘관광가이드’라 칭하며, 특유의 글솜씨로 솔직하게 알려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남미 견문록’을 펴냈다. 그의 책 <탱고와 게릴라>에 부제를 붙여본다면, ‘이강원의 ‘남미 속속들이 뒤집어보기’쯤 되지 않을까. 외교관 남편을 따라 브라질과 자메이카, 코스타리카와 콜롬비아, 아르헨티나를 넘나들며 보고 느끼고 살았던 이씨는 거리낌 없는 필치로 자신의 눈에 비친 그곳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하고 있다.
‘남미 인디오’라는 전생에 걸맞게 13년을 남미에서 보내
외교관 부인 생활 30여년. 그중 13년을 남미에서 보냈으니, 이씨에게 남미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를 입증하는 사실 한 가지. 몇년 전 그의 전생을 봐준 유명한 법사 왈, “당신 전생의 한 사이클은 남미의 인디오였소” 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은 평생에 한번 가볼까 말까 한 남미 국가를, 그것도 다섯 나라에서 머물렀을 수가 있겠는가. 이래저래 그와 남미는 ‘찰떡 궁합’인 모양이다.
이씨는 남미에서도 가장 색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게릴라’로 대표되는 콜롬비아와 ‘탱고’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가 그 두 나라.
“빙하부터 산맥, 사막에 이르기까지 콜롬비아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타고났어요. 반면에 대낮 대로에서 무장강도가 총질을 하고 최첨단 장비를 갖춘 게릴라들이 출몰하는 나라죠. 그야말로 천복과 천액을 함께 타고난 나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세계 최고의 에메랄드와 커피 수출국, 네덜란드에 이어 화훼 수출 2위, 백금 수출 4위, 중남미에서 셋째 가는 석유 생산…. 이처럼 자원의 광맥이 무궁무진한 이 나라의 또 다른 얼굴은 세계에서도 악명 높은 마약수출국이 아니던가. 40년째 종식되지 않는 내전으로 게릴라들의 무장 총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곳.
이 살벌한 곳에서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으로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피가 뜨겁고 호기심 많은 이씨는 결코 편안한 공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프리랜서 글쟁이’임을 내세워 구호물자를 한 트렁크 싣고 위험한 정글지역까지 들어갔다. 그 결과 최대 게릴라 집단 FARC와 정부군의 역사적인 평화회담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14세 소년 게릴라 앙드레와 여성 게릴라들을 만났다. 먹고 살기 힘들어 제 발로 찾아 들어가거나 혹은 꾀임에 넘어가 게릴라가 되는 소년들.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또는 성적 노리개로 푸릇푸릇한 ‘생명’을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일명 ‘꼬마벌’인 그들. ‘21세기판 홀로코스트’를 목격한 이씨는 그제서야 ‘일주일을 살면 장편소설 한편, 한달을 살면 단편소설 한편, 1년을 살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던 남미의 실상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며 착잡해 했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어요. 수난의 역사는 너무도 오래고, 부정의 뿌리는 너무나 깊으니까요.”
콜롬비아보다는 사정이 나아보이는 듯싶지만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다. ‘국가 파산’에 가까운 엄청난 외채, 두집 건너 한집에 실업자가 있는 현실, 중산층은 붕괴하고 빈곤층만이 증대하는 현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캐나다와 호주를 따돌리며 세계 5대 강국의 대열에 섰던 ‘남미의 진주’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영화는 쇠락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도취증’이 아직도 지도자층의 눈을 가리고 있어 국민의 길디 긴 비명에 귀를 막아버리는 곳. 이씨는 마치 제 나라의 일인 양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이과수 폭포, 풍요롭기 그지 없는 팜파스, 남쪽 파타고니아에 자리잡은 대초원과 만년설의 빙하…. 이런 풍요로운 자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지금도 ‘에비타’를 그리워하는데, 그건 국민을 묶어주는 구심점이 그만큼 없다는 얘기와 같아요.”
그러나 남미 국가 중에서도 유럽에 가까운 아르헨티나는 이런 경제적 위기와 무관하게 문화적인 긍지만큼은 단단히 돋우고 서 있다. 아르헨티나의 국가보다 더 유명한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거리 곳곳에서 지금도 그 아름다운 스텝을 밟고 있으며, 전세계에서부터 몰려드는 탱고 마니아들로 인해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롱런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퍼포먼스 그룹 <델 라 구아다>의 탄생지도 이곳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남미의 문화란 아직 낯설기만 하다. 이씨는 그런 우리들에게 남미의 문화에 대해 길라잡이를 해준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남미의 문화는 ‘비빔밥 문화’.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인디오 문명 위에 중동 피와 로마 피가 섞인 스페인 문명이 덧칠되었고 거기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맛까지 가미되었으니, 일견 맞는 평가일 법하다. 그렇지만 이씨는 거기에다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잘 섞어주고 맛을 내는 고추장이 빠져있으니 이 나라가 폭력, 쿠데타, 테러, 마약 등이 콩가루처럼 흩어진 게 아니냐”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 못지않은 ‘한’을 품고 사는 남미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맛보라고 제안한다.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 이강원이 털어놓은 남미 견문록

남미는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심각한 외채와 내란에 신음하는 ‘이중성의 나라’다.

“중남미 문학은 상상력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노벨상 수상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중남미 문학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지요. 읽다보면 우리네 정서와 부합하는 게 참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국어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한 이씨는 남미의 문인들과도 깊은 친교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스페인어 시집 <민들레 마을>을 펴내기도 했다. 우리 문학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황무지와도 같은 이 땅에 한국문학의 씨앗을 뿌리는 마음. 그런 노력 끝에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작가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엄청 콧대가 높거든요. 국립미술관 같은 곳은 웬만해서는 장소를 내주질 않아요. 하지만 전 스페인어 시집을 냈을 때 국립미술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죠. 전 그걸 작지만 상징적인 행위라 보고 있어요. 문화 교류의 작은 물꼬가 저를 통해서라도 터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죠.”
공식적 행사에서 한국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외교관 부인의 위치를 떠나 그는 마음으로 남미인들에게 다가갔다. 남미 국제 시인 페스티벌에서는 스페인어로 낭송되는 자신의 시에 맞춰 우리의 ‘살풀이춤’을 선보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수건에 밟혀 엎어지질 않나, 땀띠가 수북하게 나질 않나… 한여름에 살풀이춤을 사사하느라 죽도록 고생했지만, 제 춤에 몰두한 시선들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이 싹 잊혀지는 것 같더군요. 살풀이라는 것이 한을 풀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잖아요. 그런 의미를 설명해주면 더욱 감동을 받더군요.”
이런 그의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에서 각각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의 주간지 <헴뻬>에서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 연말에 다시 아르헨티나 땅을 밟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저는 탱고 가수를 비롯해 참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한번은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합석을 해서 그의 직통 연락처까지 받았지요. 정말 잘생기고 매너 좋더군요. 그가 동양의 중년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상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가 그들과 친분을 맺는 방법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이씨는 그걸 ‘정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특징적인 한 마디 대화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헤어지고 돌아와 명함 정리를 하면서 뒷장에 반드시 기입해둔다. 겉치레 인사는 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화하고, 작은 선물이라도 만남의 기념품으로 꼭 건넨다(기자도 인터뷰가 끝나고 그로부터 남미의 ‘아카시아 기름’을 선물로 받았다). 손님을 초청해서 잔치를 치른 경우는 메뉴에 대한 반응까지 기록해둘 정도로 부지런을 떤 결과라는 얘기다. 그러나 부지런도 관심과 열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 아무래도 그는 친구 만드는 친화력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다.
“이게 다 대한민국 홍보잖아요. 전 스스로를 가리켜 ‘문화 장돌뱅이’라고 말해요.”
예로부터 남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의 위를 공략하라고 했던가. 음식만큼 사람들을 내 편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은 없다는 걸 일찍이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에서 ‘부엌외교’라는 단어로 표현한 그는 남미에서도 그 솜씨를 톡톡히 발휘했다.
15가지 현란한 색색 다른 고명을 얹어 만든 1인용 신선로부터 시작해 생선전, 불고기와 잡채, 그리고 후식으로 먹는 앙증맞은 약과와 매작과, 만두… 그중에서도 남미인들을 감동시킨 건 후식모듬이었다고 한다. 3색 매작과, 생강란, 밤과자, 깨과자를 투명접시에 담아 5색 미니 조각보를 깔아 대접하면 그들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하고 감탄을 연발한다고 한다. 김치 맛을 본 남미인들 대부분은 두 종지씩은 거뜬히 비울 정도로 ‘김치 마니아’가 된다고 하니, 그의 손끝에서 무르익은 ‘음식 외교’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외교관의 위는 철밥통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한번은 콜롬비아인 친구집에 초청받았는데 까만 멸치 같은 걸 내왔더군요. 알고보니 개미를 튀긴 거더군요. 속으로는 기겁했지만 ‘맛있다’고 말하면서 결국 다 먹었죠. ‘뭘 이 정도 가지고… 이 세상에 엽기요리가 좀 많아?’ 생각하면 눈 질끈 감고 먹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입에 잘 맞는 맛있는 음식도 많다고 한다. 특히 팜파스 지역에서 자란 최상품의 쇠고기를 이용한 아사도 숯불구이는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길다란 쇠꼬챙이에 고기를 꾀어 나무를 태운 숯 위로 10시간 가량 은근하게 익히는 것인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라고. 그 외에도 매운 고추와 양파를 볶아서 야자수 기름 넣고 쌀과 콩을 함께 볶다가 돼지 창자에 속을 넣어 순대처럼 먹기도 하고, 옥수수를 갈아 밀전병처럼 지져먹는 것도 고소하고 맛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아이하코. 우리나라의 삼계탕을 꼭 닮았다고 한다.
이처럼 외국의 이색풍물을 ‘공짜로’ 보고 느끼고 나아가 외국의 상류층들과 교류하니 겉보기에는 무척 화려해보이지만, 외교관 부인 노릇은 실상 어려움이 더 많다고 한다. 끝도 없이 이삿짐을 싸야 하는 ‘철새 생활’이 그 하나라면(기자와 만났던 날도 그는 전날 이사를 끝낸 후였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짐을 다 가져오려면 앞으로 두세번은 더 이삿짐 정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아이들의 교육과 진로 부분이다.
“지금은 다들 번듯하게 커서 문제가 없지만 자라는 동안 아이들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무엇보다 바쁜 엄마 아빠 때문에 혼자 있다보니, 일곱살이 넘도록 손가락을 빠는 등 이상행동을 해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죠. 다 큰 지금이야 여러 곳의 문화를 접하고 자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인정하지만요.”
그는 두 딸을 두고 있는데 각각 연세대 영문과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성립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가 외국 대학을 제치고 일부로 국내 대학에 진학시켰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한국에 머문 기간이 통틀어 6년 정도 될까요? 둘다 외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잘하죠. 2~3년 주기로 한국에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이럴수록 모국어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굳이 국내 대학 진학을 고집했고요. 또한 전 모국어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외국에 있을 때는 둘만 있으면 꼭 한국말을 쓰도록 했어요. 반대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안은 영어를 쓰게 했고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큰딸 윤정씨(33)는 의상과 시각디자인분야를 공부한 뒤 현재 암스텔담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다. 윤정씨의 경우 아르헨티나에서 유명한 콜론 극장에서 머리카락으로 만든 옷을 전시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성악가 조수미 외에는 어떤 한국인도 입성하지 못한 콧대 높은 극장에 당당히 입성했기에 그는 큰딸의 성공을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한다. 극장 측에서 ‘한국 아르헨티나 40년 수교 기념 행사’라는 타이틀을 붙이자고 하는 데 동의하는 바람에, 일을 진행시켰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씨는 단호하게 “대사관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사관 예산이나 인력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어요. 콜론 극장 같은 경우 아무 예술가나 입성할 수 없기로 유명한데, 한국인 디자이너의 쇼가 열린다는 건 ‘외교 대박’감이잖아요. 유감스럽게도 마치 물의를 일으킨 양 알려져 그 의미가 축소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워요.”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준 두 딸 때문에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이강원씨는 한국에 정착할 준비를 하면서 요즘 이런저런 꿈에 부풀어있다. 중남미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고 반대로 우리 문학을 남미에 소개하는 일에 ‘교량’역할을 하고도 싶고, 외교관 생활 30여년 동안 틈틈히 모은 에스닉 장신구 컬렉션으로 작은 박물관을 꾸며보고픈 욕심도 있다. 나아가 몇년 전부터 마음속에서만 준비해온,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이강원식 한국음식을 담아낸 요리책을 만들어야 겠다는 각오도 다지는 중.
세계가 비좁다는 듯 호기심과 열정으로 달려드는 여자, 이강원. “사람 만나기를 못 말리게 좋아하는 여자”라고 자평하는 그의 얼굴 어디에도 쉰다섯이라는 나이가 읽혀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그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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