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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무비디깅 | 홍상수 신작, '수유천' 파헤치기

문영훈 기자

2024. 10. 04

홍상수는 한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 중 하나다. 사생활에 대한 오랜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관객은 홍상수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고 있다. 2024년 하반기에 찾아온 영화는 ‘수유천’이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수유천’ 포스터.

‘수유천’ 포스터.

홍상수의 신작에 관한 소식은 해외 영화제 수상으로부터 시작된다. 32번째 연출작 ‘수유천’ 역시 로카르노영화제의 초청을 받았고, 주인공 김민희가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김민희는 2017년 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여자연기자상)을 받은 바 있다. 7년 만에 로카르노영화제 연단 위에 오른 김민희는 연인 홍상수에게 수상 소감을 바쳐 다시금 화제에 올랐다.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준 감독님, 당신의 영화를 사랑한다. 함께 작업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홍상수가 영화로 말하는 것

영화가 시작하면 강사로 일하는 전임(김민희)은 하천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고 있다. 이 스케치는 베틀을 사용한 텍스타일 작품의 재료로 사용된다. 전임은 급하게 학교에서 올려야 하는 촌극의 연출을 삼촌 시언(권해효)에게 부탁한다. 촌극을 맡은 젊은 연출자가 제자 3명과 연애를 해 문제가 되는 바람에 사실상 쫓겨났기 때문이다. 시언은 유명 배우이자 연출자였으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지금은 강릉에서 카페를 하며 지내고 있다. 시언이 강릉에서 서울로 와 촌극 연출을 맡는 동안 전임이 의지하는 대학 교수 은열(조윤희)과 가까워진다.

전임은 시언과 은열과의 술자리에서 과거의 한 사건을 언급한다. 그가 미대를 오게 된 이유이고, 텍스타일 작업을 하게 된 이유다. 그는 한때 공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붕대를 감고 있던 전임은 파란 하늘을 보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본 그는 지금은 “평화롭고 깨끗한 상태를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시언이 학생들의 촌극을 지도하고 극을 올리는 동안 시언과 은열은 점차 가까워지고, 전임은 자신의 작업에 매진한다. 기존 홍상수 영화가 보여왔던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권해효나 극에 묘한 통속성을 부여해왔던 조윤희는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시언의 어깨에 손을 잠시 올렸다가 “저 돈 되게 많이 모았어요”라며 대놓고 시언을 꼬시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진다.

홍상수의 영화는 남녀가 술자리에서 지지부진한 대화를 나눠 지루하다든가, 관객을 고려하지 않은 평론가들만의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 비판은 유효할지 모른다. 남녀는 술을 마시고, 사랑 비슷한 걸 하고 대화를 나눈다. 서사 역시 별다를 게 없다. 사실 가장 큰 비판은 그의 사생활을 향한다. 원래 인터뷰를 꺼려온 그였지만, 홍상수와 김민희의 불륜이 알려진 2017년 이후 국내 관객을 위한 인터뷰나 기자 간담회 참석은 거의 하지 않았다.

홍상수는 말하는 대신 영화로 보여준다. 그의 영화에서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의 하루’(2023)에서는 시인 의주(기주봉)가 등장하고,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는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준희(이혜영)가 주인공이다. ‘클레어의 카메라’(2018)에서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사진을 찍는다.

‘수유천’에서는 전임의 텍스타일 작업이 의미심장하다. 영화 내내 전임의 텍스타일 재료가 되는 하천 스케치 장면이 바뀌는 날짜를 알리는 이정표처럼 끼어든다. 한 줄 한 줄 직접 짜내야 하는 텍스타일 작업은 1시간에 고작 5cm 나아간다. 2m짜리 직물을 완성하는 데 열흘이 소요된다. 매일 아침 스케치를 하고, 작업실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전임처럼 홍상수도 매우 성실한 예술가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래 홍상수 감독은 매년 꾸준히 한 작품 이상을 만들어왔다. 전임이 제작하는 텍스타일 작품은 각각 ‘플로잉 워터, 한’ ‘플로잉 워터, 중랑’ ‘플로잉 워터, 수유’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한강에서 중랑천, 수유천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임처럼 홍상수도 삶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고자 한다.

전임은 물을 바라보고, 패턴을 만들고, 느린 속도로 직물을 만들어낸다. 이건 홍상수가 작업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자신과 배우의 삶을 관찰하고, 구조화한 뒤 이를 카메라로 찍어낸다. 그래서 홍상수의 작품은 항상 감독의 삶과 동행한다. 홍상수는 로카르노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요즘 소주는 너무 독해서 막걸리를 마신다”고 말했다. 그게 최근 영화에서 소주 대신 막걸리와 와인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그의 영화는 그런 식이다. 주어진 것을 직면하고 그걸 영화로 만든다.

사생활과 관련된 비판을 받는 이유도 이와 연결돼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둘의 만남 이후에도 김민희는 홍상수의 영화에만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한때 잘나갔으나 유명 감독과의 스캔들 이후 일을 쉬고 있는 배우 영희 역을 맡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지금은 영화 출연을 하지 않고 건축을 공부하는 상원 역을 맡은 ‘우리의 하루’에서 관객들이 실제 사건을 떠올리는 이유다. 하지만 김민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성장하고 있다. 과거엔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나답게 사는 거야, 흔들리지 않고”를 굳게 다짐해야 했던 영희는 “저는 지금이 좋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전임이 됐다. 영희는 겨울 바다에 모로 누워 바람을 맞지만, 전임은 가을 하늘 평상 아래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

과거 홍상수 영화에서 번민하는 주인공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관찰자의 역할을 맡았다. 시언과 은열이 술을 마시고, 제자들이 상연하는 촌극이나 사랑싸움을 지켜보는 자리에 전임이 항상 앉아 있다. 이건 영화에서 감독이나 관객의 자리이기도 하다. 김민희가 배우를 넘어 홍상수 감독 영화의 제작 실장을 맡고 있는 현실과도 겹친다.

‘아가씨’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이후 홍상수 영화 외에 출연하지 않는 김민희에게 “배우로서 아깝다”(‘소설가의 영화’ 대사 중)는 평은 계속 나온다. 하지만 “지금이 평화롭고 깨끗하다”고 말하는 전임처럼 김민희의 연기는 편안해 보인다. 특히 텍스타일 작업에 몰두하거나, 낙엽을 흔들며 휘적휘적 움직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로카르노영화제 측은 김민희에게 최우수연기상을 안기며 “섬세함과 인내, 절제를 위한 대담함은 물론 그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해내 심사위원단 모두를 경탄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수유천’에서 시언 역을 맡은 권해효와 전임 역을 맡은 김민희.

‘수유천’에서 시언 역을 맡은 권해효와 전임 역을 맡은 김민희.

지극히 유치하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도 있다. 시언은 촌극을 끝낸 4명의 대학생에게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 소주와 맥주가 어지럽게 펼쳐진 테이블을 둘러싼 학생들은 “저 같은 사람이 아닌 사람” “잘 모르지만 계속 찾는 사람”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 등이 되고 싶다고 진지하게 털어놓는다. 술에 취하지 않은 관객들은 당황하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술자리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수유천’에 등장하는 어른들도, 캐릭터들도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여동생과 다투고 10년 동안 연락을 끊은 시언, 돈은 많지만 외로운 은열 역시 계속 번민하고 있다. “저는 지금이 좋다”고 확언하는 전임조차도 삼촌 시언을 오해한다.

영화는 수유천의 수원을 찾아 올라가던 전임이 시언의 부름을 받고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전임은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걸어 올라가 보는 것, 그게 32번째 작품을 만든 홍상수의 깨달음일까.


#수유천 #김민희 #홍상수 #무비디깅 #여성동아

사진제공 전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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