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엔 어른이 되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단정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스스로 구축한 세계에서의 안온함.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로 가득하고 짊어져야 하는 짐은 늘어난다. 이따금씩 타인의 존재가 나의 삶을 침범해오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치부해버리기 쉽다. 본질적인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다른 인간의 존재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원작 소설 한 구절을 빌리면,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따뜻한 파문을 일으킨다.
영화는 1980년대 아일랜드 소도시 뉴로스의 겨울 풍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빌 펄롱은 석탄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블루칼라 소시민이다. 아내와 다섯 딸에게 무뚝뚝하지만 사려 깊은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하다. 재가 잔뜩 묻은 육체의 고단함은 가족들을 만나기 전, 손을 깨끗이 씻으며 털어버린다.
거리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할 무렵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갔다가 한 여자아이를 목격한다. 수녀원으로 체포당하듯 들어가는 소녀.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인 채 집으로 향하던 그는 딸의 친구이자 이웃에 사는 소년과 마주친다. 땔감을 주우러 먼 길을 걷는 소년. 그의 아버지는 소문난 알코올 중독자다. 두 사람에 대한 짧은 응시는 펄롱에게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펄롱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채로 펄롱을 낳았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어머니의 고용인인 윌슨 부인이 해고를 결정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펄롱과 어머니는 윌슨 부인의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펄롱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마을에 일자리를 얻고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그의 수입은 다섯 딸을 키우기에 빠듯하다. 펄롱은 생각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처지가 되는가.
펄롱이 과거를 회상하며 고민에 휩싸이자 현실적인 아내 아일린이 그의 동요를 눈치챈다. “우리 괜찮은 거지?”라고 묻는 남편에게 집안에서 현실을 맡고 있는 아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마을엔 크리스마스의 온기가 가득하지만 펄롱의 내면에는 찬바람이 돈다. 펄롱이 소녀들을 가두고 착취하는 수녀원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자 수녀원장 메리는 그를 불러 조용히 압박한다. “자네 딸이 곧 우리 학교에 들어와야 하지 않나.” 그리고 침묵을 종용하는 돈봉투를 내민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1922년 설립한 기관이다.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자 입양 기관으로 만들었지만,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 장애인,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들도 이곳에 가두어졌다. 모두 ‘타락한 여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아일랜드 정부의 침묵하에 이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어린아이는 강제로 입양 보내졌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까지 유지됐다.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클레어 키건은 2021년 출간한 동명의 소설을 통해 막달레나 세탁소 이야기를 발표했고, 이듬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당시 역대 가장 짧은 부커상 최종 후보작으로 유명해졌다. 영국의 한 평론가는 “키건은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이 소설을 번역한 홍한별 번역가는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고 썼다. 2023년 11월에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 소설은 화제를 불러 모으며 2024년, ‘밀리의 서재’ ‘알라딘’ ‘예스24’ 등 유명 온라인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혔다.
펄롱의 갈등하는 내면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영화화되며 훨씬 간결해졌다. 소설에서는 비교적 펄롱의 심리가 서술되지만 영화는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다. 관객들이 무뚝뚝한 아일랜드 남자를 이해할 수 있는 건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눈동자 때문이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36p)
책에 서술된 펄롱의 고민은 영화 속에서 잠을 못 이루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 퇴근 후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는 모습, 흔들리는 트럭을 운전하는 우수에 찬 눈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바뀌었다. 킬리언 머피는 감독에게 대사를 최소화해줄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오펜하이머’ ‘피키 블라인더스’로 알려진 팀 밀란츠 감독에게 소설의 영화화를 제안했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펄롱은 이웃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좁은 마을에서 수녀원과 척진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석탄을 파는 것으로 아내와 다섯 딸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다. 아내의 말대로 “세상에는 살기 위해 무시할 것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펄롱은 번민을 거듭한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1980년 5월 야학 교사였던 박용준의 마지막 일기를 인용한다. 그는 이 문장을 읽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의 방향성이 정해졌다고 덧붙였다. 한강 작가가 ‘동호’라는 소년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했듯 키건은 펄롱을 통해 국가가 폭력에 침묵한 실제 사건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소설과 영화가 국제 유수의 문학상과 영화상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짚어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펄롱의 내면을 따라가며 관객 역시 모른 척하고 지나친 많은 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연출한 팀 밀란츠 감독 역시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비탄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슬픔에서 빠져나오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한 성인의 생일과 어울리는 영화다. 모두가 펄롱과 같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2024년을 보내며 놓치고 지나간 것들에 눈길을 잠시 멈추고 보다 나은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처럼사소한것들 #클레어키건 #여성동아
사진제공 라이카시네마
흔들리는 펄롱의 눈
‘이처럼 사소한 것들’ 포스터.
거리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할 무렵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갔다가 한 여자아이를 목격한다. 수녀원으로 체포당하듯 들어가는 소녀.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인 채 집으로 향하던 그는 딸의 친구이자 이웃에 사는 소년과 마주친다. 땔감을 주우러 먼 길을 걷는 소년. 그의 아버지는 소문난 알코올 중독자다. 두 사람에 대한 짧은 응시는 펄롱에게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펄롱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채로 펄롱을 낳았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어머니의 고용인인 윌슨 부인이 해고를 결정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펄롱과 어머니는 윌슨 부인의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펄롱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마을에 일자리를 얻고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그의 수입은 다섯 딸을 키우기에 빠듯하다. 펄롱은 생각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처지가 되는가.
펄롱이 과거를 회상하며 고민에 휩싸이자 현실적인 아내 아일린이 그의 동요를 눈치챈다. “우리 괜찮은 거지?”라고 묻는 남편에게 집안에서 현실을 맡고 있는 아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마을엔 크리스마스의 온기가 가득하지만 펄롱의 내면에는 찬바람이 돈다. 펄롱이 소녀들을 가두고 착취하는 수녀원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자 수녀원장 메리는 그를 불러 조용히 압박한다. “자네 딸이 곧 우리 학교에 들어와야 하지 않나.” 그리고 침묵을 종용하는 돈봉투를 내민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1922년 설립한 기관이다.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자 입양 기관으로 만들었지만,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 장애인,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들도 이곳에 가두어졌다. 모두 ‘타락한 여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아일랜드 정부의 침묵하에 이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어린아이는 강제로 입양 보내졌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까지 유지됐다.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클레어 키건은 2021년 출간한 동명의 소설을 통해 막달레나 세탁소 이야기를 발표했고, 이듬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당시 역대 가장 짧은 부커상 최종 후보작으로 유명해졌다. 영국의 한 평론가는 “키건은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이 소설을 번역한 홍한별 번역가는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고 썼다. 2023년 11월에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 소설은 화제를 불러 모으며 2024년, ‘밀리의 서재’ ‘알라딘’ ‘예스24’ 등 유명 온라인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혔다.
펄롱의 갈등하는 내면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영화화되며 훨씬 간결해졌다. 소설에서는 비교적 펄롱의 심리가 서술되지만 영화는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다. 관객들이 무뚝뚝한 아일랜드 남자를 이해할 수 있는 건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눈동자 때문이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36p)
책에 서술된 펄롱의 고민은 영화 속에서 잠을 못 이루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 퇴근 후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는 모습, 흔들리는 트럭을 운전하는 우수에 찬 눈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바뀌었다. 킬리언 머피는 감독에게 대사를 최소화해줄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오펜하이머’ ‘피키 블라인더스’로 알려진 팀 밀란츠 감독에게 소설의 영화화를 제안했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놓치고 지나간 것들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주인공 펄롱은 수녀원에 잡혀 들어가는 소녀를 목격하고 고뇌에 휩싸인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1980년 5월 야학 교사였던 박용준의 마지막 일기를 인용한다. 그는 이 문장을 읽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의 방향성이 정해졌다고 덧붙였다. 한강 작가가 ‘동호’라는 소년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했듯 키건은 펄롱을 통해 국가가 폭력에 침묵한 실제 사건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소설과 영화가 국제 유수의 문학상과 영화상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짚어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펄롱의 내면을 따라가며 관객 역시 모른 척하고 지나친 많은 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연출한 팀 밀란츠 감독 역시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비탄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슬픔에서 빠져나오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한 성인의 생일과 어울리는 영화다. 모두가 펄롱과 같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2024년을 보내며 놓치고 지나간 것들에 눈길을 잠시 멈추고 보다 나은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처럼사소한것들 #클레어키건 #여성동아
사진제공 라이카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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