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연하남에서 소시오패스로 ‘베테랑2’ 정해인
관객 수 1342만을 기록한 ‘베테랑’(2015)은 류승완 감독의 최대 흥행작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에 대적하는 이야기는 천만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어이가 없네?” “나 아트박스 사장인데”와 같은 수많은 장면이 아직도 회자되는 통에 개봉한 지 9년이 지났지만 많은 관객에게 여전히 각인돼 있다. 지금은 불미스러운 일로 구속되었지만 당시 유아인이 빌런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 상을 휩쓴 만큼 ‘베테랑2’ 제작 소식이 들릴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은 누가 속편의 빌런을 맡을 것인가에 쏠렸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정해인을 선택했다.
전편이 선악 구도가 명확한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서도철 형사와 강력범죄수사대의 업무 환경은 더 나빠졌다. “내가 정의요”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이버 레커’들이 이들의 수사를 방해한다. 그 속에서 사적 제재를 가한 뒤 전시하는 연쇄살인범 ‘해치’가 등장한다. 정해인은 서도철 형사의 눈에 들어 강력범죄수사대에 합류하게 되는 막내 형사 박선우를 연기했다. 박선우는 정의감 넘치는 경찰로 등장하지만, 생각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서도철은 물론 관객들의 의문을 자아낸다. 개봉을 이틀 앞둔 9월 11일 정해인을 만났다. 그는 “‘베테랑’이 개봉했을 때는 풋내기 신인이어서 관객 입장으로 신나게 영화를 봤었다”며 “그런 영화 속편에 캐스팅 제안을 받아 꿈인지 생시인지 생각했고, 개봉을 앞둔 지금은 100m 달리기 출발선 앞에 섰을 때처럼 두근거리고, 관객을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박선우를 어떻게 해석했나요.
나르시시즘과 소시오패스 성향이 다분한 인물로 봤어요. 자신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캐릭터죠. 혹은 반대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슥’ 하고 스며든 인물이기도 하고요. 동시에 목적과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범죄자 인터뷰 보며 캐릭터 연구
초·중반부의 정체가 모호합니다. 하나로 잡히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기 어렵지 않았나요.외적으로는 액션이 많이 부각됐지만, 캐릭터에 스스로를 동기화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박선우의 사연이나 전사(前史)도 만들어가서 감독님께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게 있으면 복잡해지기만 할 거다. 상황과 신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저도 그랬지만 관객분들도 선우의 행동에 계속 퀘스천 마크를 갖게 되실 거거든요. 그게 감독님이 원했던 포인트 같습니다. 감독님은 그러시더라고요. 정의롭다는 것에 대한 개념과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인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건 누구의 기준인가. 그래서 관객분들이 영화를 본 뒤에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에게는 누군가가 선으로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기도 하잖아요.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연기할 때 참고한 게 있다면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범죄자가 프로파일러와 면담하는 영상을 많이 봤어요. 공통적인 특징이 눈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거였죠. 심리학 책에서 봤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 상대방이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면 불쾌감을 느낀대요. 눈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행위죠.
그래서 ‘동공 연기’가 돋보였군요.
사실 저는 제가 카메라를 통해 어떻게 보일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는 거울을 많이 보면서 눈을 어떻게 움직일지, 안면 근육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계산을 많이 했어요. 박선우가 대사가 많이 없거든요. 명확한 느낌을 눈으로 표현해야 해서 그게 어려웠습니다.
멜로 눈빛 연기와 소시오패스 연기 중 뭐가 더 어렵나요.
둘 다 쉽지 않습니다. 요즘 시청자분들 수준이 높아져서 멜로에서 가짜로 하면 다 티가 나거든요. 그래도 고르라면 멜로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제가 소시오패스는 아니니까요(웃음).
소시오패스 연기가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MBTI가 바뀌는데요. 이번 영화를 찍을 때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제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했어요. 당시에 저를 고립시켰거든요. 집에서 은둔하며 사람도 잘 안 만나고요. 반대로 드라마 ‘엄마친구아들’을 찍으면서는 한없이 밝아지고 능글거리게 됐어요. 특히 최근 작품에서 웃을 만한 캐릭터를 맡지 않아 그런지 특히 더 많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캐릭터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편인가요.
저는 연기와 삶을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배우 생활을 건강하게 오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캐릭터마다 시간차는 있는 것 같아요. 박선우에게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던 건, ‘베테랑2’ 촬영 당시 캐릭터를 위해 사람을 피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그게 유지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유튜브 시대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속편을 만든 류승완 감독은 기본적으로 액션 장인이다. 1편의 중고차 사기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오프닝에 대적하는 주부도박단 체포 활극이 속편의 문을 연다. 강력범죄수사대가 해치를 추격하는 신에서는 파쿠르를 활용해 상하좌우로 오가는 액션이 펼쳐지고, 폭우가 내리는 건물 옥상 장면에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타격감이 전달된다. 류승완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정해인의 액션 실력에 100점 만점에 99.99점을 줬다. 0.01점이 빠진 이유는 너무 빨라서였다고.
남산 추격 신에서 너무 빨리 움직였다는 류승완 감독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빠르더라고요(웃음). 사실 제가 쫓는 분이 더 빨랐거든요. 쫓아가다 보니 저도 모르게 더 빨라졌던 것 같아요. 촬영 감독님은 20kg짜리 카메라를 메고 있으니까 힘드실 텐데 말이죠.
액션 거장, 류승완 감독의 현장은 어땠나요.
감독님만큼 안전한 액션 영화를 찍는 분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배우마다 다른 신체 능력을 고려해서 완벽한 콘티를 짜고요. 안 되는 걸 요구하지 않아요. 배우가 욕심을 내서 더 하겠다고 해도 말리십니다. “액션 하지 말고 배우는 연기하라”고 말하죠. 평소에는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허용하기도 하는데 액션 신만큼은 정확하고 날카롭게 찍으세요.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현장의 수장으로서 엄격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려운 신은 뭐였나요.
옥상 신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겨울에 옷이 젖으니 너무 추워서 몸이 둔해지더라고요. 주먹도 느리게 나가고요. 그런 상황에서 서로 합이 안 맞으면 다칠 수 있거든요.
칸에서 느낀 국가대표의 심정
정해인은 ‘베테랑2’에서 가장 힘들었던 액션 신으로 옥상 위 결투 장면을 꼽았다.
팬으로서의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고요. 동시에 무섭지 않을까, 우려도 했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혼자만의 걱정이었더라고요. 엄청 ‘츤데레’ 같은 면이 있으세요. 배울 점도 많았습니다. 배우들이 보통 자신이 걸리지 않는 신을 찍을 때는 힘을 빼고 연기하기도 하는데 선배님은 항상 모든 신에 최선을 다했어요.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황정민 씨는 인터뷰에서 정해인이 이번 영화로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저는 “선배님이 상을 타고 수상 소감에서 제 이름을 언급만 해달라”는 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5월 21일(현지 시간)정해인은 ‘베테랑2’로 인생 첫 칸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았다.
두 분이 대화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많았어요. 정말 친한 사이인데, 서슴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느껴져요. 오랫동안 믿음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겠죠. ‘베테랑’ 팀 선배들도 처음 온 저를 잘 챙겨주셨어요.
‘베테랑2’로 칸영화제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첫 칸 방문인데 떨리지 않았나요.
사실 엄청 태연한 척하려고 했거든요. 즐기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고요.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저는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무척 떨렸어요. 운동선수들은 오죽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좋았던 건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는 거였어요. 언젠가는 다시 칸영화제 초청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지만(웃음), 어머니가 건강할 때 같이 가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평생의 선물을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베테랑2’ 포스터
“저는 지금도 혼나고, 잔소리를 들어요. 해주는 말이 너무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수 없어요. 어릴 때부터 ‘늘 겸손하라’는 얘길 들으며 자랐고, 밥상머리 예절 같은 것도 엄격하게 배웠고요. 그렇게 큰 제가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게 될 때 부모님을 더 챙기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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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CJ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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