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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미국 출신 교황 레오 14세가 가져올 변화들

김명희 기자

2025. 05. 23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돼 ‘레오 14세’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예상 밖의 선출, 그리고 ‘새로운 사태’ 회칙을 계승하겠다는 선언은 변화하는 시대 속 교회의 응답을 예고한다.

5월 8일 오후 6시 8분(현지 시간), 바티칸 시스티나성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콘클라베 이틀째, 네 번째 투표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됐다는 신호에 성베드로대성당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환호성과 박수로 화답했다. 약 1시간 20분 후, 도미니크 맘베르티 수석 부제 추기경이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 나타나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우리에게 교황이 있습니다)”을 외쳤다. 이어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70) 추기경이 성베드로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외부에선 유력 후보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베팅 업체가 제시한 당선 확률은 1% 수준이었다. 한국인 성직자로는 유일하게 이번 콘클라베에 참여한 유흥식 추기경(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첫 투표에서 몇 분이 두드러지게 표를 얻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투표에서 후보자가 확 줄어들었으며, 네 번째 투표에서는 (레오 14세 쪽으로) 표가 확 쏠렸다”고 밝혔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선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 133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하는데,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100표 이상을 획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까지 267명의 교황 가운데 12번째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미국 국적 교황이다. 가톨릭계에서 미국 출신 교황은 정치·경제적으로 과도한 영향력을 우려해 사실상 금기시됐으나, 이번 선출은 이러한 흐름을 깼다. 그가 선택한 교황명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며 용기, 강인함, 리더십을 상징한다. 교황청 대변인에 따르면 신임 교황이 레오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제256대 교황 레오 13세(재위기간 1878~1903)를 잇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레오 13세는 노동자와 이민자의 권리, 사회 정의를 강조한 교황이다. 그는 1891년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산업화 시대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성을 다루고 가톨릭 사회 교리의 새로운 기초를 세웠다. 레오 14세는 자동화와 인공지능(AI) 등이 인간의 일자리,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인간의 노동과 삶을 향한 교회의 응답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콘클라베 직후 강복의 발코니에 선 레오 14세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교황이 세상에 내리는 사도적 축복)’로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기원했다. 이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건넨 첫인사이기도 하다. 레오 14세는 그 평화의 의미를 “부활하신 예스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이는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이며, 겸손하고 인내하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라고 설명했다.   

노동권, 이민자의 권리, 사회 정의 강조한 레오 13세 계승 

레오 14세는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계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로 일했고, 프랑스·이탈리아 혈통의 아버지는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시카고 남부 돌턴 지역에서 자란 그는 시카고성모승천성당 복사로 활동하며 신앙심을 키웠다. 1982년 사제로 서품됐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만난 사진이 시카고성모승천성당 100주년 책자에 실릴 정도로 활동이 활발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1977년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했고, 교황청에서 설립한 로마의 성토마스아퀴나스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노회는 공동체 삶과 절제, 나눔, 화해를 중시한다. 그는 이 수도회가 처음으로 배출한 교황이기도 하다. 1998년 시카고 관구장, 2001년 수도회 총장에 선출돼 12년간 전 세계 회원들을 두루 만났다. 아우구스티노회 한국지부 측은 “한국은 2002년, 2003년, 2008년, 2010년 네 차례 방문했는데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형제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형제들의 물음에 귀 기울여주시고 대답해주시는 분”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2010년 강남 봉은사를 방문했을 때는 스님들과 바닥에 앉아 차를 마셨다. 당시 그는 젓가락질도 익숙했으며, 차량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고, 짐도 스스로 들었다고 한다.

미국인이지만 20년간 페루에서 사목하며 깊은 인연을 쌓았고, 2015년에는 페루 시민권도 취득했다. 치클라요 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는 팬데믹 중에도 먼 지역을 직접 운전해 오가며 신자들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식량과 물품을 싣고 산악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프랑스 통신사 AFP는 그를 “온화한 말투의 미국인, 빈민을 섬긴 목자”로 평가했다.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주교 인선을 총괄하는 교황청 주교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의 발언과 행적은 온건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그동안 SNS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에 반대 의사를 밝혀왔다. 추기경 시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와 JD 밴스 부통령 후보를 비판한 가톨릭 매체의 글을 공유하기도 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그를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다양한 의견을 포용할 수 있는 “다리 놓는 인물”이라 평했다. 

실제로 레오 14세는 교황 취임 후 균형 잡힌 노선을 걷고 있다. 숙소는 전통적인 교황 거처인 사도궁 교황 아파트를 선택했다. 이는 과거 교황들이 집무하며 삼종기도를 인도했던 장소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은 검소함을 택해 교황청 사제들의 숙소인 ‘성녀 마르타의 집’에 거주했지만, 레오 14세는 전통과 실용을 조화롭게 수용하고 있다. ‘어부의 반지’도,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도금한 은반지를 낄 정도로 청빈을 강조했으나 레오 14세는 과거의 교황들처럼 순금을 선택했다. 초대 교황 베드로가 어부였던 데서 비롯된 어부의 반지는 교황의 인장과 마찬가지다.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신임 교황은 자신만의 어부의 반지를 갖게 되며, 교황이 사망하면 어부의 반지도 함께 파쇄된다. 

레오 14세는 그동안 한국을 4차례 방문했다. 아우구스티노회 측은 그에 대해 “형제들의 물음에 귀기울여주시는 따뜻한 분”이라고 전했다.  

레오 14세는 그동안 한국을 4차례 방문했다. 아우구스티노회 측은 그에 대해 “형제들의 물음에 귀기울여주시는 따뜻한 분”이라고 전했다.  

5월 18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열린 즉위식에는 전 세계 200여 개국 정부 대표와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20여만 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다. 이날 레오 14세는 강론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사태’를 인용하며 다시 한번 레오 13세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우리는 증오·폭력·편견·차이에 대한 두려움 등 너무나 많은 불화를 겪고 있으며, 지구 자원을 착취하고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는 경제 논리로 많은 상처를 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배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걸어갑시다.”

콘클라베에서 즉위식까지, 짧은 기간 동안 레오 14세는 검소함과 포용, 전통과 개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페루 빈민들과 함께했던 사목의 삶, 교회 내 다양성을 향한 실천,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레오14세 #교황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아우구스티노회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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