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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나는 퇴근 후 ‘야학’으로 다시 출근한다

한지현 LG전자 CTO인사팀 선임

2023. 06. 06

매주 화요일 나는 퇴근 후 바로 태청야학으로 출근한다.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칠 뿐이지만 삶에 대해 배우는 곳. 나는 3년 차 야학 선생님이다. 

학생들이 서울 중랑구 태청야학에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학생들이 서울 중랑구 태청야학에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야학에 간다”는 말을 꺼내면 낯설고 생소해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심훈의 ‘상록수’를 이야기하며 흑백으로 드리워진 옛 풍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야간 대학원과 혼동해 무엇을 공부하느냐고 나에게 되묻는 분도 종종 있다. 나도 처음 야학에 오기 전까지는 야학이 무얼 하는 곳인지, 이런 공간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했으니까.

간단히 말하면, 야학은 성인들에게 문해교육을 하는 기관이다. 가정환경, 사회구조, 경제적 문제 등으로 제도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한글 교육부터 중등교육까지 제공하며 최근에는 스마트폰, 키오스크 사용법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모든 교육은 무상으로 이루어지며, 내가 다니는 태청야학 또한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무료로 운영되는 사회교육 시설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아직 주변에는 ‘야학’이라는 기관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칼럼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나는 6년 차 직장인이자, 태청야학의 선생님이다.

직장인, 그리고 선생님

태청야학 학생들이 쓴 일기.

태청야학 학생들이 쓴 일기.

매주 화요일 퇴근 후, 서울 지하철 7호선 먹골역 인근 태청야학으로 향한다. 사무직 직장인에서 ‘지혜반’ 글쓰기 선생님으로 변신하기 위해선 목소리 크기, 말투부터 마음가짐까지 점검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사무실의 조용한 직원이 아니다. 교실 저 멀리까지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해 모두를 나에게 집중시키고 말 것이다. 사전에 출력물을 가져가야 하는 날에는 폰트 크기도 주의해야 한다. 학생들은 잘 안 보일 수도 있으니, 물론 글씨는 클수록 좋다.

나는 2021년 처음 태청야학에 왔다. 이곳에 문을 두드리게 된 건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점차 시니컬해지고 내 안위만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했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던 찰나 지인 추천으로 태청야학이라는 공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온전히 남을 위한 일을 해보면 내 모습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로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큰 신념 없이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야학은 내 삶의 굳건한 일부가 되었다.



우선 우리 학교를 소개하고 싶다. 태청야학은 1974년 ‘태릉경찰서 직업소년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1995년 재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해 폐교됐으나 이후 전임 교사와 졸업생을 중심으로 태청야학 후원 모임 겸 친목 단체인 ‘작은사랑’을 만들어 제2의 개교를 선언했다. 현재 한글부터 중등 과정까지 총 4개 반이 운영되고 있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수업이 이루어진다. 수준별로 기초 한글부터 맞춤법, 심화 글쓰기 수업과 수학·과학·영어 등 다양한 과목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스마트폰 교육 시간에는 문자를 보내고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연습도 한다.

야학에 오는 학생 중엔 70대 여성이 많다. 이곳을 찾은 분의 사연을 들어보면, 어린 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하고 동생들을 돌보거나 일을 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릴 적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야학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곤 한다.

내가 매주 한 번, 퇴근 후 야학에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피곤할 텐데 정말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의 수업을 들으러 온다. 학생들도 각자 일이 있다. 야채 행상, 목욕 관리사, 급식 요리 등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학교에 온다. 선생님뿐 아니라 학생들도 퇴근하고 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걸음이 불편한 분도 계시다. 그런데도 고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학교에 나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책상 앞에 앉는다.

동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두들 하는 말이 있다. 가르치러 왔는데 우리가 오히려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것. 배움에 대한 열정 하나로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나의 태도, 배움과 열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길거리 간판을 읽게 되어, 이름 석 자를 쓰게 되어, 미처 읽지 못했던 편지를 읽게 되어 기쁘다는 그 문장 뒤에 야학의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거쳤을 어려웠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결국 해내고야 마는 용기와 강인함에 다시 한번 학생들을 존경하게 된다. 학생들은 글을 알고 난 후의 삶이 참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말하신다. 그들의 삶의 도전과 행복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서, 그 배움의 길에 동행할 수 있어 감사하다.

야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다.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본인 이름 석 자로 불리며, 매일 학우들과 함께 웃으며 공부하는 사회생활의 공간이다. 또한 야학에서는 정규교육 이외에도 매년 학생들과 소풍, 수학여행, 시화전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나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처음 야학을 찾아 비교적 많은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오면서 점차 여러 이벤트가 열리고 활기를 찾아가는 모습이 기쁘다. 최근에는 서울 암사동 유적에 학생들과 함께 소풍 가서 보물찾기, OX 퀴즈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4월 후원 행사를 열었을 때다. 학생들과 전임 교사,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밥을 먹었다. 사실 나는 온종일 서빙을 담당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보낸 하루였다고 자부한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태청야학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떠난 소풍.

태청야학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떠난 소풍.

태청야학이 개교한 지 50년이 다 돼간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는 것은 박승일 교장선생님, 강선미 교감선생님께서 중심을 잡아주셨기 때문이다. 현재 총 24명의 교사가 수업뿐 아니라 교무부, 편집부, 연구부, 학생부, 홍보부, 행사부 등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며 야학을 이끌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많은 신입 교사가 합류했다(교사 지원은 언제나 대환영입니다). 1974년 개교 이래 태청야학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물줄기는 아니었지만 배움에 목마른 분들을 해갈해줄 시냇물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흘러가며 사회에 꼭 필요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앞서 말했듯 태청야학은 순수한 마음으로 모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무료로 운영되는 사회교육 시설이다. 별도의 수익 사업도 없고 정부의 지원도 충분치 않기에 제반 운영 자금을 교사들의 자발적인 회비와 전임 교사 및 졸업생 중심의 작은사랑 회원들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다. 혹시 살아가다 문득 야학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면, 많은 관심과 후원은 언제나 감사하다. 직장인 칼럼으로 시작했는데 태청야학 홍보로 끝난 기분이다. 그만큼 야학이 내 삶의 일부가 됐다. 사실 직장 생활하면서 야학 일도 병행하는 것이 쉽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끔 2가지 일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기분에 괜스레 씁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은 나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를 줄 수 있고, 나의 삶은 야학에 온 이후로 더욱 행복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직장인 독자 중 봉사에 대한 의지를 마음속 고이 간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우선 야학의 문을 두드려보기를 권한다. 혹시 모르지 않나, 당신의 삶이 변하는 경험을 마주하게 될지도!

#태청야학 #한지현 #직장인칼럼 #여성동아

한지현
LG전자 CTO인사팀에서 일하는 6년 차 직장인. ‘사람’과 ‘글’을 좋아한다. 사람과 글이 있는 공간, 태청야학에서 지혜반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음악, 미술처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태청야학 교사 지원과 후원은 언제든 감사하다.

사진제공 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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