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이전에는 ‘다방’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TV나 영화에서 보고 들었던 아가씨, 마담 등이 떠올라서다. 하지만 요즘 다방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빽다방’, 즉석 떡볶이 전문점 ‘청년다방’ 등의 등장으로 다방은 좀 더 친근하고 대중적인 인상을 갖게 됐다. 사실 본래 다방(茶房)은 차나 음료를 두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는 뜻이니, 커피 전문점 이름 뒤에 이 단어가 붙는 것이 그리 의아하진 않다.
과거 도심 산업의 메카이자 역동적인 현대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을지로가 재개발 및 정비 사업 추진과 함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종합 전자상가인 세운상가는 을지로 재개발이 이슈가 될 때마다 거론되는 곳으로, 1980년대 용산전자상가 등이 생겨나며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핫플 ‘세운나 다방’ 덕분에 세운상가는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다.
세운나 다방은 세운상가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운영해온 찻집이다. 대표 문혜숙 씨는 35년간 세운나 다방을 관리하던 고모님께 3년 전에 이곳을 물려받았다. 당시 주위에서 업종 변경, 대대적인 리뉴얼 등을 권했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추억과 옛것의 고귀함’이라는 뚝심으로 세운나 다방의 이름과 역사를 지켜냈다.
이 공간은 정갈하게 정리돼 있는 빈티지 무늬의 다방 컵과 난로 위에 끓고 있는 주전자, 천장에 달린 꽃망울 모양의 조명, ‘맥심’이 적힌 알록달록한 보온병까지 그 시절 다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 정도다. 과거에는 상가 주민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드나들었다면 지금은 10~20대 젊은 층이 주 고객이다. 문혜숙 대표는 “옛날 감성을 억지로 흉내 낸 곳은 많지만 진짜는 극히 드물다”며 “젊은 친구들은 1970년대 특유의 차분함과 안락함을 신선하고 희소성 있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와 첫 오픈 당시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요.
지금 세운나 다방은 약 40년 전의 모습과 거의 일치해요. 기존의 것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주방만 리뉴얼했거든요. 사실 주방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낙후된 부분만 수리했으니까요. 또 손님들이 다방을 찾았을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전기, 수도 시설을 더욱 철저히 정비했어요. 소파, 테이블, 소품 등 이 공간을 채운 대부분은 세운나 다방이 처음 생겼을 때 사용했던 것들이에요. 옛날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세운상가에서 카페 운영의 연장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전혀요. 고모님이 장사를 접겠다고 했을 때 바로 “제가 인수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고모님은 제게 정말 각별한 분이에요. 생업으로 바쁘신 데도 저희 가족을 늘 챙겨주시고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자신의 일처럼 품어주셨거든요. 고모님은 1970년대부터 세운나 다방에서 일하셨어요. 약 10년 동안 카운터에서 경리를 보시다가 1984년에 이곳을 인수하셨죠. 현재 이 공간은 당시 고모님께서 채워놓으셨던 것들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요. 구석구석 고모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고모님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당시 장사도 안됐고 카페 운영의 노고를 잘 알고 계셨으니까요. 사실 저에게 카페가 생소하진 않아요. 과거 연세대학교 앞에서 카페를 운영했었거든요. 그래서 카페 유지와 관리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곳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잘해내고 싶은 의욕도 컸습니다. 고모님께서 오랜 시간 완강하게 거절하셨지만 결국 제 뜻을 헤아려주시고 세운나 다방의 대표 자리를 물려주셨어요.
과거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옛것의 고유성을 지키고 싶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것들의 고결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유럽이나 일본에는 100년 넘은 카페가 많아요. 그곳이 주는 안정감과 고귀함은 누구도 절대 따라 할 수 없죠. 세월이 준 선물이니까요. 또 공간을 채우는 가구, 소품, 분위기는 그 시대와 사회의 스토리가 스며든 역사적 산물과도 같아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이 소중한 것들을 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새롭게 바꾸는 것보다 기존 걸 보존하는 것이 더 힘든 일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매 순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세운 2가지 원칙을 떠올렸습니다. ‘원형은 보존하고 편의와 관련된 부분만 강화하자’고요. 그래서 1970년대 특유의 몰딩 처리와 장식적 요소, 가구, 소품 등은 원래 것을 그대로 유지했어요. 카페 운영과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전기, 수도, 가스 등만 최신 시설로 교체했고요.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특별할 건 없어요. 깨끗이 청소하고 최대한 조심히 다루는 수밖에요. 세운나 다방을 인수받았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하고자 당시 사용하던 소파 9개를 버렸어요. 정말 너무 후회돼요. 이렇게 많은 손님이 찾을 줄 알았다면 잘 보관해놨을 거예요. 아쉽지만 지금 남은 것들이라도 잘 보존하자는 마음에 시간이 날 때마다 쓸고 닦으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들도 대표님의 철학이 담긴 이 공간을 좋아할 거라 예상했나요.
상상도 못 했어요. 특별한 홍보도 없이 이렇게 유명해진 게 너무 신기해요. 매일 꿈꾸는 기분이에요. 사실 2023년 6월에 세운나 다방을 정리하려고 했었어요. 손님도 없고 세운상가 철거 등에 대한 이슈로 마음이 붕 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곳을 우연히 찾은 사진작가님이 “너무 좋다. 대박 날 거다”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세운나 다방을 접으려 한다”고 했더니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레트로의 모든 걸 갖췄으니 홍보만 잘되면 문전성시를 이룰 거라며 호평했죠. 그 후 사진작가님의 말대로 젊은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블로그와 SNS 등에 이곳을 태그하며 유명해진 것 같아요.
NCT와 정동원 씨는 이곳에서 유튜브를 찍었어요. 덕분에 해외 손님도 늘었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손님은 상가 상인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전부였거든요. 당시에는 이렇게 젊은 고객이 많이 찾아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죠. 지금은 99%가 10~20대 손님이에요. 사실 이들에게 미안한 점도 많아요. 방학 기간이나 주말에는 학생 손님이 몰려 웨이팅을 해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평불만 없이 웃으며 입장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고마워 울컥할 때도 있어요.
블로그나 SNS에는 대표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후기가 많아요. 젊은 층을 대하기 부담스럽진 않나요.
저는 오히려 젊은 세대가 편해요. 요즘 MZ세대는 남을 불편하게 안 해요. 주위 사람을 배려하고 깍듯해서 오히려 젊은 층을 상대로 장사하기가 너무 수월해요. 그렇다고 제가 먼저 손님들에게 다가가진 않아요. 먼저 말을 걸거나 과도한 친절을 보이면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잘 알거든요. 대신 손님이 먼저 대화를 요청하면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하려고 노력해요.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 친절한 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모습을 손님들이 예쁘게 봐주는 것 같아요.
요즘 레트로 콘셉트의 매장이 넘쳐나요. 그럼에도 MZ세대가 이 공간을 선택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요.
‘찐’ 레트로니까요. 과거의 다방을 현대식으로 꾸며놓은 것이 아닌, 진짜 옛날부터 운영했던 흔적들이 MZ세대를 자극한 것 같아요. 1970~80년대를 산 사람들은 세운나 다방을 그저 평범한 공간으로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시절을 지내지 않은 젊은 층은 이 모든 것을 신선함과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맛있는 메뉴 덕분에 세운나 다방을 재방문하는 이들이 많다고요.
이곳에서 커피를 시키는 손님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전통차와 팥빙수를 주문해요.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도전 정신으로 이 메뉴들을 주문해요. 하지만 막상 먹어보고는 “너무 맛있다”는 반응을 보이죠. 세운나 다방에서 판매하는 모든 메뉴는 제가 만들어요. 유자차, 오미자차, 매실차 등 모두 직접 담근 청을 사용하죠. 세운나 다방 운영 철칙 중 하나가 ‘재료에 돈을 아끼지 말자’예요. 아무리 콘셉트가 좋고 친절해도 결국 맛이 없으면 손님들이 떠나가거든요. 이를 고려해 최대한 신선한 재료로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어 대접해요. 손님들이 감사하게도 너무 맛있게 먹어주시고요.
가장 반응이 좋은 메뉴는 무엇인가요.
팥빙수요. 눈꽃빙수에 직접 공수한 인절미, 팥, 시리얼을 올려 완성한 메뉴예요. 팥빙수를 개발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마냥 옛날 레시피를 고수할 순 없었거든요. 요즘 세대가 좋아하는 한 끗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를 위해 전국 팥빙수 맛집을 다니며 맛을 분석했고 오랜 시간 연구했어요. 그러다 내린 결론이 재료는 옛날 느낌을 살리되 얼음, 우유, 연유를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조합으로 제조하는 거였어요. 걱정도 많았지만 다행히도 많은 분이 좋아해주셔서 뿌듯합니다. 또 요즘은 크로플도 잘 나가요. 크로플은 저희 아들과 함께 개발한 레시피예요. 크로플 위에 인절미 조청과 아이스크림, 견과류를 올리죠. MZ세대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들이 도와줘서 더욱 수월하게 레시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안타까운 부분도 있어요. 저는 건강을 생각해서 최대한 덜 달게 재료를 조합하거든요. 하지만 맛이 너무 밍밍하다며 연유를 찾는 이들이 있어요.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먹어줬으면 하는데, 이런 반응을 보면 조금 아쉬워요.
세운나 다방을 방문하는 젊은 층 덕분에 몇 년 후에는 세운상가가 다시 핫해질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되면 너무 좋죠. 제 소망이기도 하고요. 세운상가에는 전시장, 디저트 숍 등 구석구석 재미있고 흥미로운 가게들이 많아요. 상가 주민들은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고 해요. 손님의 발길이 뜸한 타 가게와 달리 젊고 북적북적한 분위기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세운상가의 운영시간을 늘렸으면 좋겠어요. 대부분 오전 11시에 오픈해서 오후 6시에 문을 닫아요. 보통 대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오후 4~5시쯤 이곳을 방문하는데 여유롭게 즐기질 못 하더라고요. 또 직장인들은 퇴근 시간과 겹쳐 주말에만 이곳을 찾고요. 폐점 시간을 2시간만 늘려도 세운상가는 충분히 더 활성화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세운상가 재개발, 철거 등의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겠어요.
세운상가가 재개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세운상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컨셉추얼하게 각 상가를 정비하면 외국인들이 즐비한 핫 플레이스로 거듭날 수 있어요. 세운상가 일대는 30년 이상 연식 있는 건축물이 전체 건물의 97% 정도를 차지해요. 젊은 층과 외국 관광객들은 이를 보고 새로움과 설렘을 느낍니다. 세운상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산물과도 같아요. 수많은 돈이 들어가는 재개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들을 보존하고 관광 상품화하는 것에 힘썼으면 좋겠어요.
고모님에 이어 대표님까지, 의도치 않게 가족 사업이 됐어요. 점찍어둔 후계자가 있나요.
딱 한 명 있어요. 저희 며느리요. 몇 달 전에 장난 식으로 “나중에 이어받아라”라고 말했는데 반응이 좋진 않더라고요(웃음). 며느리가 지금 30대인데 아이를 낳고 좀 키운 뒤 40대 후반 쯤에 이곳을 운영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카페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안목도 키울 수 있거든요. 또 소소하게 용돈벌이도 할 수 있고요. 저는 세운나 다방이 20년 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정기적으로 보수 작업은 하겠지만,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이 고결함이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사람들이 세운나 다방을 통해 오래된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할 수 있도록요.
#세운나다방 #세운상가 #정동원 #NCT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이전에는 ‘다방’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TV나 영화에서 보고 들었던 아가씨, 마담 등이 떠올라서다. 하지만 요즘 다방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빽다방’, 즉석 떡볶이 전문점 ‘청년다방’ 등의 등장으로 다방은 좀 더 친근하고 대중적인 인상을 갖게 됐다. 사실 본래 다방(茶房)은 차나 음료를 두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는 뜻이니, 커피 전문점 이름 뒤에 이 단어가 붙는 것이 그리 의아하진 않다.
과거 도심 산업의 메카이자 역동적인 현대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을지로가 재개발 및 정비 사업 추진과 함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종합 전자상가인 세운상가는 을지로 재개발이 이슈가 될 때마다 거론되는 곳으로, 1980년대 용산전자상가 등이 생겨나며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핫플 ‘세운나 다방’ 덕분에 세운상가는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다.
세운나 다방은 세운상가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운영해온 찻집이다. 대표 문혜숙 씨는 35년간 세운나 다방을 관리하던 고모님께 3년 전에 이곳을 물려받았다. 당시 주위에서 업종 변경, 대대적인 리뉴얼 등을 권했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추억과 옛것의 고귀함’이라는 뚝심으로 세운나 다방의 이름과 역사를 지켜냈다.
이 공간은 정갈하게 정리돼 있는 빈티지 무늬의 다방 컵과 난로 위에 끓고 있는 주전자, 천장에 달린 꽃망울 모양의 조명, ‘맥심’이 적힌 알록달록한 보온병까지 그 시절 다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 정도다. 과거에는 상가 주민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드나들었다면 지금은 10~20대 젊은 층이 주 고객이다. 문혜숙 대표는 “옛날 감성을 억지로 흉내 낸 곳은 많지만 진짜는 극히 드물다”며 “젊은 친구들은 1970년대 특유의 차분함과 안락함을 신선하고 희소성 있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와 첫 오픈 당시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요.
지금 세운나 다방은 약 40년 전의 모습과 거의 일치해요. 기존의 것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주방만 리뉴얼했거든요. 사실 주방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낙후된 부분만 수리했으니까요. 또 손님들이 다방을 찾았을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전기, 수도 시설을 더욱 철저히 정비했어요. 소파, 테이블, 소품 등 이 공간을 채운 대부분은 세운나 다방이 처음 생겼을 때 사용했던 것들이에요. 옛날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세운상가에서 카페 운영의 연장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전혀요. 고모님이 장사를 접겠다고 했을 때 바로 “제가 인수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고모님은 제게 정말 각별한 분이에요. 생업으로 바쁘신 데도 저희 가족을 늘 챙겨주시고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자신의 일처럼 품어주셨거든요. 고모님은 1970년대부터 세운나 다방에서 일하셨어요. 약 10년 동안 카운터에서 경리를 보시다가 1984년에 이곳을 인수하셨죠. 현재 이 공간은 당시 고모님께서 채워놓으셨던 것들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요. 구석구석 고모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고모님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당시 장사도 안됐고 카페 운영의 노고를 잘 알고 계셨으니까요. 사실 저에게 카페가 생소하진 않아요. 과거 연세대학교 앞에서 카페를 운영했었거든요. 그래서 카페 유지와 관리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곳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잘해내고 싶은 의욕도 컸습니다. 고모님께서 오랜 시간 완강하게 거절하셨지만 결국 제 뜻을 헤아려주시고 세운나 다방의 대표 자리를 물려주셨어요.
과거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옛것의 고유성을 지키고 싶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것들의 고결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유럽이나 일본에는 100년 넘은 카페가 많아요. 그곳이 주는 안정감과 고귀함은 누구도 절대 따라 할 수 없죠. 세월이 준 선물이니까요. 또 공간을 채우는 가구, 소품, 분위기는 그 시대와 사회의 스토리가 스며든 역사적 산물과도 같아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이 소중한 것들을 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새롭게 바꾸는 것보다 기존 걸 보존하는 것이 더 힘든 일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매 순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세운 2가지 원칙을 떠올렸습니다. ‘원형은 보존하고 편의와 관련된 부분만 강화하자’고요. 그래서 1970년대 특유의 몰딩 처리와 장식적 요소, 가구, 소품 등은 원래 것을 그대로 유지했어요. 카페 운영과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전기, 수도, 가스 등만 최신 시설로 교체했고요.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특별할 건 없어요. 깨끗이 청소하고 최대한 조심히 다루는 수밖에요. 세운나 다방을 인수받았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하고자 당시 사용하던 소파 9개를 버렸어요. 정말 너무 후회돼요. 이렇게 많은 손님이 찾을 줄 알았다면 잘 보관해놨을 거예요. 아쉽지만 지금 남은 것들이라도 잘 보존하자는 마음에 시간이 날 때마다 쓸고 닦으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들도 대표님의 철학이 담긴 이 공간을 좋아할 거라 예상했나요.
상상도 못 했어요. 특별한 홍보도 없이 이렇게 유명해진 게 너무 신기해요. 매일 꿈꾸는 기분이에요. 사실 2023년 6월에 세운나 다방을 정리하려고 했었어요. 손님도 없고 세운상가 철거 등에 대한 이슈로 마음이 붕 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곳을 우연히 찾은 사진작가님이 “너무 좋다. 대박 날 거다”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세운나 다방을 접으려 한다”고 했더니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레트로의 모든 걸 갖췄으니 홍보만 잘되면 문전성시를 이룰 거라며 호평했죠. 그 후 사진작가님의 말대로 젊은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블로그와 SNS 등에 이곳을 태그하며 유명해진 것 같아요.
수십 년의 세월이 담긴 세운상가, 그대로 보존됐으면
벽 한쪽에는 가수 NCT, 정동원 등 연예인 사인이 가득해요.NCT와 정동원 씨는 이곳에서 유튜브를 찍었어요. 덕분에 해외 손님도 늘었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손님은 상가 상인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전부였거든요. 당시에는 이렇게 젊은 고객이 많이 찾아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죠. 지금은 99%가 10~20대 손님이에요. 사실 이들에게 미안한 점도 많아요. 방학 기간이나 주말에는 학생 손님이 몰려 웨이팅을 해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평불만 없이 웃으며 입장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고마워 울컥할 때도 있어요.
블로그나 SNS에는 대표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후기가 많아요. 젊은 층을 대하기 부담스럽진 않나요.
저는 오히려 젊은 세대가 편해요. 요즘 MZ세대는 남을 불편하게 안 해요. 주위 사람을 배려하고 깍듯해서 오히려 젊은 층을 상대로 장사하기가 너무 수월해요. 그렇다고 제가 먼저 손님들에게 다가가진 않아요. 먼저 말을 걸거나 과도한 친절을 보이면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잘 알거든요. 대신 손님이 먼저 대화를 요청하면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하려고 노력해요.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 친절한 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모습을 손님들이 예쁘게 봐주는 것 같아요.
요즘 레트로 콘셉트의 매장이 넘쳐나요. 그럼에도 MZ세대가 이 공간을 선택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요.
‘찐’ 레트로니까요. 과거의 다방을 현대식으로 꾸며놓은 것이 아닌, 진짜 옛날부터 운영했던 흔적들이 MZ세대를 자극한 것 같아요. 1970~80년대를 산 사람들은 세운나 다방을 그저 평범한 공간으로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시절을 지내지 않은 젊은 층은 이 모든 것을 신선함과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맛있는 메뉴 덕분에 세운나 다방을 재방문하는 이들이 많다고요.
이곳에서 커피를 시키는 손님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전통차와 팥빙수를 주문해요.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도전 정신으로 이 메뉴들을 주문해요. 하지만 막상 먹어보고는 “너무 맛있다”는 반응을 보이죠. 세운나 다방에서 판매하는 모든 메뉴는 제가 만들어요. 유자차, 오미자차, 매실차 등 모두 직접 담근 청을 사용하죠. 세운나 다방 운영 철칙 중 하나가 ‘재료에 돈을 아끼지 말자’예요. 아무리 콘셉트가 좋고 친절해도 결국 맛이 없으면 손님들이 떠나가거든요. 이를 고려해 최대한 신선한 재료로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어 대접해요. 손님들이 감사하게도 너무 맛있게 먹어주시고요.
가장 반응이 좋은 메뉴는 무엇인가요.
팥빙수요. 눈꽃빙수에 직접 공수한 인절미, 팥, 시리얼을 올려 완성한 메뉴예요. 팥빙수를 개발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마냥 옛날 레시피를 고수할 순 없었거든요. 요즘 세대가 좋아하는 한 끗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를 위해 전국 팥빙수 맛집을 다니며 맛을 분석했고 오랜 시간 연구했어요. 그러다 내린 결론이 재료는 옛날 느낌을 살리되 얼음, 우유, 연유를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조합으로 제조하는 거였어요. 걱정도 많았지만 다행히도 많은 분이 좋아해주셔서 뿌듯합니다. 또 요즘은 크로플도 잘 나가요. 크로플은 저희 아들과 함께 개발한 레시피예요. 크로플 위에 인절미 조청과 아이스크림, 견과류를 올리죠. MZ세대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들이 도와줘서 더욱 수월하게 레시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안타까운 부분도 있어요. 저는 건강을 생각해서 최대한 덜 달게 재료를 조합하거든요. 하지만 맛이 너무 밍밍하다며 연유를 찾는 이들이 있어요.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먹어줬으면 하는데, 이런 반응을 보면 조금 아쉬워요.
세운나 다방을 방문하는 젊은 층 덕분에 몇 년 후에는 세운상가가 다시 핫해질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되면 너무 좋죠. 제 소망이기도 하고요. 세운상가에는 전시장, 디저트 숍 등 구석구석 재미있고 흥미로운 가게들이 많아요. 상가 주민들은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고 해요. 손님의 발길이 뜸한 타 가게와 달리 젊고 북적북적한 분위기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세운상가의 운영시간을 늘렸으면 좋겠어요. 대부분 오전 11시에 오픈해서 오후 6시에 문을 닫아요. 보통 대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오후 4~5시쯤 이곳을 방문하는데 여유롭게 즐기질 못 하더라고요. 또 직장인들은 퇴근 시간과 겹쳐 주말에만 이곳을 찾고요. 폐점 시간을 2시간만 늘려도 세운상가는 충분히 더 활성화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세운상가 재개발, 철거 등의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겠어요.
세운상가가 재개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세운상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컨셉추얼하게 각 상가를 정비하면 외국인들이 즐비한 핫 플레이스로 거듭날 수 있어요. 세운상가 일대는 30년 이상 연식 있는 건축물이 전체 건물의 97% 정도를 차지해요. 젊은 층과 외국 관광객들은 이를 보고 새로움과 설렘을 느낍니다. 세운상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산물과도 같아요. 수많은 돈이 들어가는 재개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들을 보존하고 관광 상품화하는 것에 힘썼으면 좋겠어요.
고모님에 이어 대표님까지, 의도치 않게 가족 사업이 됐어요. 점찍어둔 후계자가 있나요.
딱 한 명 있어요. 저희 며느리요. 몇 달 전에 장난 식으로 “나중에 이어받아라”라고 말했는데 반응이 좋진 않더라고요(웃음). 며느리가 지금 30대인데 아이를 낳고 좀 키운 뒤 40대 후반 쯤에 이곳을 운영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카페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안목도 키울 수 있거든요. 또 소소하게 용돈벌이도 할 수 있고요. 저는 세운나 다방이 20년 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정기적으로 보수 작업은 하겠지만,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이 고결함이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사람들이 세운나 다방을 통해 오래된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할 수 있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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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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