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감독은 기술과 예술, 현장 경험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직업이다. 동시에 물리적 장비 운용과 다수의 스태프를 조율해야 한다. 산업의 구조와 오랜 문화 특성상 남성 중심으로 촬영감독이 이어져왔다. 실제로 현재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에 등록된 촬영감독 130명 중 여성은 단 9명에 불과하다.
엄혜정 촬영감독은 이 구조 안에서 기다리고 버티며 차근차근 경력을 이어왔다. 그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카메라가 무거운 건 똑같다”며 “카메라 무게보다도 무거운 건 책임감의 무게”라고, 촬영감독이라는 직업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설명했다.
엄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재학하며 연출이 아닌 촬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0년대 초반 현장에 발을 디딘 후엔 단편영화 ‘핑거프린트’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연출작 ‘즐거운 우리집’으로 유수의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으며,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부문에 초청받기도 했다. 2017년 ‘해빙’으로 첫 상업영화를 촬영하고,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인간수업’과 2023년 ‘하이쿠키’ 등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고 있다. 현재는 현장과 강단을 오가며 촬영감독으로서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촬영감독은 어떤 일을 하나요.
카메라를 세팅하고 촬영하는 모습 등만 떠올리기 쉬운데, 단순히 카메라만 잡는 게 아니라 영화의 전 과정에 참여합니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캐릭터와 배경을 분석해 어떤 조명과 렌즈로 촬영할지, 어떤 카메라를 선택할지 등을 정하죠. 어떤 컬러 톤으로 찍을 것인지, 어떻게 카메라를 무빙할 것인지도 고민하고요. 현장에서는 계획을 바탕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후반 과정에선 색보정(DI) 작업에 참여합니다. 완성본을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는 것까지가 작품의 마무리입니다.



현장 촬영 중인 엄혜정 촬영감독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
감독이나 다른 스태프와 의견을 나누고 소통할 일이 많겠어요.누구나 알겠지만 혼자 작품을 만들기는 어려워요. 사전 작업을 할 땐 감독님의 생각과 의도를 물어가며 시나리오 속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일을 하죠. 그 과정에서 미술감독, 조명감독 등 다른 파트의 감독들과 대화하고요. 현장에서는 다른 스태프 등과도 얘길 나눠요. 일도 일이지만 타인과 소통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작업을 진행할 땐 어디에 중점을 두나요.
영화는 텍스트로 된 시나리오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작업이잖아요. 시나리오를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완전히 새로 만든 세계를 잘 구현해야 하니까요. 구축한 세계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캐릭터가 어떤 사건을 통해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현장에서 계획이 무수히 바뀌기도 할 텐데요.
결국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우의 연기를 잘 담아내는 거예요. 리허설할 때 배우들이 어떻게 퍼포먼스를 하는지를 눈여겨봅니다. 리허설을 보며 준비한 렌즈, 심도, 카메라 위치, 높낮이, 화면에서 보이는 색온도 등이 맞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고 바꾸기도 해요. 손 움직임이 너무 좋으면 클로즈업을 추가하는 건 어떨지 감독님에게 제안하는 식으로요. 배우는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자기만의 연기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모습들을 캐치해서 잘 담아내려고 합니다.
영화 촬영과 드라마 촬영의 다른 점이 있다면요.
크게 다르진 않지만,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아무래도 호흡이 길죠. 등장인물이 처음에 보여줬던 성격이 점차 변하고 성장하는 구조가 대부분이고요. 하지만 촬영은 순서대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인물이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떻게 바뀌는지 놓치지 않는 것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찍고 있는 게 1회의 어느 지점인지, 3회의 어느 지점인지를 알아야 해요. 끊임없이 전체 드라마의 맥락을 생각해야 하지요. 영화는 길면 2시간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이야기를 보여줘야 하기에 훨씬 더 압축된 이미지들을 생각합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당연히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 뿌듯해요. 어려운 인물의 움직임, 어려운 카메라 무빙 등을 한두 번 만에 잘 찍었을 때나 그 촬영본이 나중에 편집본에서도 온전히 잘 쓰였을 때 등이요. 특히 배우가 하는 연기를 잘 담아냈을 때 더할 나위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역시 관객 수나 시청률이 쭉쭉 올라갈 때가 가장 기분이 좋죠.
‘직업병’도 있나요.
직업병은 아닐 수도 있지만, 촬영감독이라면 누구나 작품을 하는 중에 발 뻗고 편히 자기 힘들 거예요.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다면 하루는 조금 안도하는 거고요.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고 현장에서도 촬영본을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다 해도 변수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편집본을 확인할 때까지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가 완성될 때까지 다들 걱정을 안고 살아요.
촬영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가 있나요.
글을 잘 못 써서요(웃음). 우리나라는 대체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해 데뷔해요. 각색을 하더라도 감독의 손이 닿는, 그런 전통이 있죠. 직접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다른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보니 촬영이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유려하게 말이나 글로 풀어내지 않아도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사실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현장은 잘 몰랐어요.



엄 감독이 참여한 작품 ‘해빙’과 ‘하이쿠키’ 스틸컷
130명 중 9명, 여성 촬영감독이 되기까지
현장에 가보니 기대와 많이 달랐나요.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어요. 제가 영화 공부를 시작하던 당시만 해도 여성 촬영감독이 국내에는 없었어요. 1999년에 개봉한 ‘연풍연가’는 장동건과 고소영 배우가 나온 작품인데, 그 영화를 촬영한 김윤희 촬영감독님이 국내 첫 여성 촬영감독일 거예요. 현재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의 조합원이 13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여성은 9명입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신 여성 촬영감독도 꽤 계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카메라가 무거우니 여성이 하기는 힘들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죠.
남성이든 여성이든 카메라의 무게는 동일해요. ‘카메라’라는 물건을 남성이 주로 사용한다는 오랜 편견이 있을 뿐이에요. 카메라보다도 촬영을 할 때 져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훨씬 무겁죠. 그리고 예전에는 촬영 팀에 여자가 거의 없다 보니 지방 촬영에서 숙박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어요.
실제로 기회의 불평등이나 유리천장을 많이 느꼈나요.
상업영화 데뷔작이 2017년 개봉한 ‘해빙’인데, 2006년에 한 번 계약이 엎어진 적이 있어요. ‘해빙’을 2015년에 촬영했으니 약 10년 걸린 거죠. 이렇게 비유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사다리를 올라탔어요. 잡아야 하는 다음 사다리 칸이 남성 촬영감독에겐 1m 남짓한 거리에 있다면 저희에겐 한 3m 정도로 더 높고 더 멀게 느껴집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블록버스터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데 좋은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아요. 그다음 작품과 작품 사이의 기간이 길지요. 그럼에도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버텨야 합니다.
국내 영화계가 유독 그런 걸까요.
할리우드에서 마블 영화를 촬영한 최초의 여성 촬영감독은 2018년에 개봉한 ‘블랙 팬서’의 레이첼 모리슨인데요. 2017년 개봉한 ‘치욕의 대지’라는 작품으로 여성 촬영감독 최초 아카데미 촬영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분이에요. 그분이 노미네이트되고 난 후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이제 문을 열었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국내도 미국도 유리천장이 있다고 봐요. 전 세계 어느 분야에는 없겠습니까. 그저 버티고 또 기다리는 거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한번은 친구에게 “너무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여기서 멈춰야 할까”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때 친구가 “지금 촬영감독을 꿈꾸는 학생들에겐 롤 모델이 필요하다”며 “너마저 관두면 누구를 바라보며 일하겠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버티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강의도 하시죠.
주로 영상원에서 강의를 해요. 특강 요청이나 인터뷰 등도 종종 합니다. ‘촬영감독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들 시도해보세요’ 하는 차원도 있지만, 촬영감독이 단순히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임을 말하고 싶어서요. 감독은 모든 장면에 의도를 담아요. 우리는 계획적으로 그것을 찍죠. 이때 중요한 건, 관객은 전혀 의도한 장면처럼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예술의 영역인 것 같아요.
유튜브, OTT 등 플랫폼이 다양화됐고 영화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영화라는 개념이 처음 정립된 계기로 돌아가 보면, 뤼미에르 형제의 유료 상영이 시초예요. 단순히 영상을 관람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스크린을 보는 것이거든요. 지금도 극장이라는 어두운 방 안에 스스로 갇혀 영화를 보잖아요. 주위 사람이 반응하는 걸 느끼며 함께하는 경험까지가 영화인 것 같아요. 영화는 혼자 경험하는 게 아니에요. 좋은 영화 보면 ‘아, 내 친구도 이거 같이 봐야 해’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유튜브나 OTT의 흥행에도 영화가 없어질 것 같진 않아요.

“주위 사람 반응까지 경험하는 게 영화”
촬영감독의 일도 결국 ‘경험을 만드는 일’이군요.맞아요. 영화는 몇십 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살아남잖아요. 볼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주기도 하고요. 저 역시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영화이자 오래도록 기억되는 경험을 만들고 싶어요. 세월이 지났어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영화를 찍고 싶어요. 그리고 당연히 블록버스터도 해보고 싶고요(웃음).
스스로도 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부분이 있나요.
좋은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많이 강조합니다. 경험, 그중에서도 시각을 설계하다 보니 ‘촬영감독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가 결과물에 담겨요. 재밌게도 내가 어떤 장면을 찍었을 때 급한 마음으로 찍었는지, 편안한 마음으로 찍었는지, 심지어 저 배우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었는지 등도 다 티가 나요.
좋은 시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찍는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으려 노력해요. 예컨대 사적인 복수에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 얘기들이 많잖아요. 피해자가 당하는 상황이 영화의 핵심이니 잘 보여줘야 하지만, 꼭 포커스를 두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물론 최종 결정권은 감독님에게 있지만,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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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태식 사진제공 엄혜정 롯데엔터테인먼트 LG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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