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시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해 배우 엘리자베스가 방문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을 골라요.”
배우 엘리자베스(내털리 포트먼)는 안개 같은 캐릭터를 고르고 제대로 연기해내는 게 목표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열세 살 소년과 사랑에 빠진 서른여섯 살 그레이시(줄리앤 무어). 20여 년 전 ‘금지된 사랑(Forbidden Love)’이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신문 1면에 도배된 이들의 이야기는 독립 영화로 재현될 예정이다. 엘리자베스는 캐릭터 연구를 위해 그레이시의 집을 찾는다. 감옥에 다녀온 그레이시는 조(찰스 멜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셋과 그 사건이 벌어졌던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화목한 가정을 일구고 있다. ‘캐롤’로 유명한 감독 토드 헤인즈의 신작 제목 ‘메이 디셈버(May December)’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을 의미하는 단어다.
화목한데 기묘한 가정
서른 여섯, 열 셋에 만나 결혼한 그레이시와 조.
상상해보자. 신문 1면에 자신이 체포되는 장면이 실리며 미국 전역의 질타를 받았던 여성.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랑은 굳건하고 진실하며 영원하다고 믿거나, 적어도 남들에게 그렇게 보여야 했을 것이다. “내가 그레이시를 꼬셨다”고 말하는 조도 불변의 사랑에 일조하는 파트너였다. 세월이 지났고 열세 살 조 역시 서른 살이 넘었지만 이들 커플은 여전히 비난받는다. 일부의 이웃은 이 커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레이시의 집에는 주기적으로 인분이 배달돼온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그레이시의 마음속을 알기 위해 탐정 엘리자베스는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섬마을 서배너를 헤집고 다닌다. 20년 전 섹스하다 체포된 장소인 펫 숍의 창고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그레이시의 전남편 톰, 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자 조의 친구이기도 했던 조지, 그레이시의 변호사와도 대화를 나눈다.
그레이시와의 동일시를 위해 위태롭게 선을 넘기도 한다. 방사선사로 일하는 조의 병원을 찾아가 “당신과 몰래 만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고 유혹한다. 그렇게 연기를 위한 모자이크화를 채워나간다. 보다 못한 그레이시는 질문받는 사람에서 질문하는 사람으로 위치를 바꾼다. ”부모 말대로 당신은 배우를 하기엔 똑똑한 사람이었나요?“ 엘리자베스는 답한다. ”잘 모르겠어요.“ 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나에 대해 알려고 하다니.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사이, 조는 혼란을 겪는다. 조는 ”내가 그레이시를 유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그게 과연 맞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둘째와 셋째, 쌍둥이 남매의 졸업식을 앞두고 ‘빈둥지증후군’까지 그를 덮친다. 23년간 그레이시와 자식을 위해 버텼던 그가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차례다.
영화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으로 미국 전역에 충격을 준 ‘메리 케이 르투어노’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과거를 재현하는 장면은 없다. 서사는 그레이시와 조의 진술, 주변의 증언으로만 진행된다. 유혹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나. 그레이시와 조가 유지하는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왜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에게 이토록 집착할까. 영화의 몰입을 끊어놓는 난폭한 음악 사이사이에 질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세 배우의 연기다. 줄리앤 무어는 잘못 디디면 깨질 것 같은 빙판 위에 서 있는 캐릭터에 도가 텄다. 그의 연기는 유독 토드 헤인즈의 영화에서 반짝거린다. ‘세이프’(1995)에서는 알 수 없는 질병을 앓는 여성 역할을 맡았고, ‘파 프롬 헤븐’(2003)에서는 남편이 남자와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50년대 미국 남부 중산층 부인을 연기했다. ‘메이 디셈버’에서는 평소 자신의 신경을 긁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을 리시브하면서도 조 앞에서는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압권이다.
내털리 포트먼은 줄리앤 무어와 대적해 결코 지지 않았다.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레이시에 동화하는 야심에 가득 찬 배우 역할을 소름 끼치게 완성했다. 특히 거울 앞에서 그레이시가 과거 조에게 보낸 편지를 독백으로 읊고 나서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스트레칭하는 장면은 ‘블랙 스완’(2009)에서 흑조 연기를 해낸 뒤 ”나는 완벽했어요“를 외치는 니나 역할을 연상시킨다.
대스타 둘과 신예의 만족스러운 연기 삼합
제76회 칸 영화제에 초청된 ‘메이 디셈버’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내털리 포트만, 찰스 멜턴, 줄리앤 무어.
그래서 우리의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데 도달했는가. 엘리자베스는 배우로서 복잡(complex)하고 회색 지대(grey area)에 있는 인물을 탐구하고 싶어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근거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레이시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지에게서 자신의 어머니가 어릴 적 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내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그리고 관객)는 매우 흡족해 보인다. 관객 역시 그 순간 그레이시를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이상 성애를 하게 된 인물이라는 틀에 가둔다.
”조지의 말을 믿었나요? 불안정한 사람은 위험하죠. 나는 아주 단단해요.“
그레이시의 대사로 이제야 다 알았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와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레이시의 반박도 신뢰할 수 있는가. 일격을 맞은 엘리자베스는 그 상태로 영화 촬영을 시작한다. 열세 살 소년과의 사랑에서 그가 먼저 유혹했다고 주장하는 그레이시, 완벽한 연기를 위해 선을 넘는 엘리자베스, 서른여섯 살이 돼서야 사춘기를 맞이한 조. 세 사람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연기가 아닌가?“
#메이디셈버 #여성동아
사진제공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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