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에서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히트곡들을 재해석한 버전으로 다시 사랑받는 경우는 흔하다. 최근 몇 달간만 해도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이 뉴진스 목소리를 통해 넷플릭스 ‘너의 시간 속으로’ OST로 재탄생했고,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는 세븐틴 도겸이 부른 ‘단발머리’, 소녀시대 태연이 부른 ‘꿈’ 등 조용필 곡이 OST로 사랑받았다. 그루비룸은 올 1월 르세라핌 허윤진과 협업한 곡 ‘Yes or No’를 발표했다. 브라운아이드걸스가 2008년에 발표한 ‘Love’를 샘플링한 곡이다.
그런데 JYP나 하이브, YG 등 대형 기획사 중에서 최근 유독 SM 소속 가수들의 리메이크 및 샘플링 행보가 두드러진다. 올 1월 5일 라이즈가 발표한 싱글곡 ‘Love 119(러브 원원나인)’은 밴드 이지(izi)가 지난 2005년 KBS 드라마 ‘쾌걸춘향’ OST로 발표한 ‘응급실’을 샘플링한 곡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첫사랑의 두근거림과 아픔을 응급 상황에 빗댄 노래다. 뮤직비디오에는 CD플레이어와 줄 이어폰 등 추억 속 소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홍보 프로모션 역시 뮤직비디오 속 미래에서 온 문자메시지와 연결해 과거로 돌아갔다. 별도로 마련된 ‘Mail Box’ 페이지에 접속하면 뮤직비디오 주인공처럼 멤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 큰 호응을 얻었다.
라이즈의 신곡 공개 열흘 후 에스파는 ‘시대유감(時代遺憾) (2024 aespa Remake Ver.)’을 깜짝 공개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발표한 ‘시대유감’은 사전심의제 철폐의 계기가 된 곡이다. 원곡이 획일화된 시대의 답답한 틀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담았다면 에스파는 개성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청춘의 모습을 세련되게 녹였다. SM 관계자는 “‘시대유감’은 음악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관통하여 젊은 세대의 심경을 반영하는 메시지가 담긴 상징적인 곡이다. 그런 곡을 4세대 대표 아이돌로 꼽히는 에스파가 재해석한다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어찌 보면 SM이 ‘그때 그 시절’ 느낌을 잘 살리는 건 당연하다. 1995년 설립된 SM은 한국 아이돌 시스템의 인큐베이터이자 K-팝 역사 그 자체다. SM은 1996년 선보인 H.O.T.와 1997년 데뷔한 S.E.S. 때부터 유독 세기말의 미래지향적이고 네오한 감성에 집중했다. 이 계보는 ‘Electric Shock’를 안긴 f(x)와 태양계 외행성인 ‘EXOPLANET’에서 모티프를 얻은 엑소를 지나 ‘New Culture Technology’의 약자인 NCT,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세계관의 에스파로 이어진다. 더불어 SM의 숱한 히트곡을 만들어온 유영진이 2023년까지 이사 겸 대표 프로듀서로 일하며 헤리티지를 다져왔다. 덕분에 시대를 앞섰던 SM표 Y2K 감성은 메타버스 시대에 도달해 비로소 완성된 느낌이다.
이 같은 주특기를 바탕으로 SM은 유튜브와 함께 2021년부터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를 진행 해오고 있다. K-팝의 역사를 조명하고 음악 업계 성장에 기여하기 위한 기획으로, 레전드 아티스트들의 다양한 뮤직비디오와 음원을 디지털 플랫폼에 적합한 상태로 업스케일링 및 리마스터링해 ‘SM 스테이션’을 통해 선보인다. 1세대인 H.O.T.와 S.E.S.부터 2세대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에 이어 지난해 데뷔한 5세대 라이즈까지 다양한 IP를 보유한 SM으로서는 리메이크 작업을 통해 기존 IP 수명까지 늘릴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다.
콘셉트 자체가 메타버스인 에스파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의 단골손님이다. 이번 ‘시대유감’ 이전에도 선배 그룹 S.E.S.의 ‘Dreams Come True’를 2021년에 선보인 바 있다. ‘Dreams Come True’는 1998년 발매한 S.E.S. 2집 타이틀곡으로, 당시에도 신비로운 요정들의 몽환적인 비주얼과 낯선 인트로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를 SM의 또 다른 요정들이 비슷한 듯 다른 맛으로 요리했다. 이 외에도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에스파는 데뷔 4개월 차 신인일 때, 2000년 발매된 유영진의 ‘Forever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아빠들에게)’를 리메이크해 두 번째 싱글곡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아우인 라이즈가 샘플링 곡을 들고 나온 이유는 형님들과는 조금 다르다. NCT드림의 ‘캔디’처럼 겨울 시즌을 노린 이벤트성이라기보단 익숙한 곡으로 대중성을 키우려는 필승 전략에 더 가깝다. 코어 팬들이 주도하는 아이돌 산업은 점점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고 있다. 하물며 신인의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이 그룹의 경우 걸 그룹보다 음원 성적이 약한 편인데, 라이즈의 ‘Love 119’은 다르다. ‘Love 119’은 음원 공개 1주 차에 22위로 멜론 주간 차트에 처음 오른 이후 10위, 7위, 6위, 4위로 매주 순위를 높여가며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줬다. 이러한 장기간 차트인은 팬들의 ‘스밍’ 외에도 듣는 이가 많다는 의미다.
특히 전 국민 노래방 애창곡 ‘응급실’을 택한 점이 탁월했다. SM이 지난해 9월 원곡자 측에 샘플링 허락을 구하러 연락을 취했을 때 이지의 보컬 오진성조차도 ‘SM이 왜 이 노래를 샘플링하지?’ 생각했을 만큼 라이즈와 ‘응급실’은 생소한 조합이다. SM 관계자는 “작곡진이 최초 데모부터 ‘응급실’을 샘플링한 것으로, 곡 작업 단계에서부터 한국에서 오래 사랑받고 있는 노래를 활용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오래’다. ‘응급실’은 발표된 이래 노래방 인기 차트에서 누적 1위를 차지한 곡이다. 저작권(작곡·작사·편곡자의 권리)과 저작인접권(제작자와 실연자의 권리)을 합하면 100억 원이 넘는다.
이 같은 ‘응급실’의 인지도에 라이즈가 추구하는 ‘이모셔널 팝’이 더해져 전혀 다른 ‘응급실’ 2024년 버전이 탄생했다. 이모셔널 팝은 멤버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에 초점을 둔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끝내자고 말을 해버린 거야”라고 익숙한 ‘응급실’ 한 소절이 나온 후 바로 “1 2 Let’s go”라며 라이즈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풍성한 사운드와 “이건 Emergency 1-1-9” 같은 발랄한 가사, 청량한 보이스 등 언뜻 들으면 완전히 다른 노래다. 오진성 역시 “원곡 속 내 목소리가 이별에 아파하고 애절한 느낌이라면 라이즈는 쿨하고 담담하다”며 “사실 ‘응급실’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다. 하지만 이 부분이 들어갔다면 그저 리메이크 버전에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곡으로 음원까지 잡은 라이즈는 1월 24일 ‘Love 119’ 일본어 버전 음원과 내용이 추가된 뮤직비디오를 발표하고 일본 공략에 나섰다. 아직 일본에서 정식 데뷔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샘플링으로 앰뷸런스급 고속 날개를 단 라이즈에게 남은 숙제는 라이즈만의 성장 서사를 좀 더 ‘많이’ 담은 ‘미니앨범’이다.
윤혜진은
아이돌 조상 H.O.T.부터 블락비, 에이티즈까지 청양고추 매운맛에 중독된 K-팝 소나무다. 문화교양종합지와 패션 엔터테인먼트 매거진 기자를 거치며 덕업일치를 이루고, 지금은 아이와 뮤직비디오 같이 보는 엄마로 레벨업했다.
#라이즈 #응급실 #Love119 #sm #여성동아
사진 제공 SM엔터테인먼트, 유튜브 뮤직비디오 캡처
그런데 JYP나 하이브, YG 등 대형 기획사 중에서 최근 유독 SM 소속 가수들의 리메이크 및 샘플링 행보가 두드러진다. 올 1월 5일 라이즈가 발표한 싱글곡 ‘Love 119(러브 원원나인)’은 밴드 이지(izi)가 지난 2005년 KBS 드라마 ‘쾌걸춘향’ OST로 발표한 ‘응급실’을 샘플링한 곡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첫사랑의 두근거림과 아픔을 응급 상황에 빗댄 노래다. 뮤직비디오에는 CD플레이어와 줄 이어폰 등 추억 속 소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홍보 프로모션 역시 뮤직비디오 속 미래에서 온 문자메시지와 연결해 과거로 돌아갔다. 별도로 마련된 ‘Mail Box’ 페이지에 접속하면 뮤직비디오 주인공처럼 멤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 큰 호응을 얻었다.
라이즈의 신곡 공개 열흘 후 에스파는 ‘시대유감(時代遺憾) (2024 aespa Remake Ver.)’을 깜짝 공개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발표한 ‘시대유감’은 사전심의제 철폐의 계기가 된 곡이다. 원곡이 획일화된 시대의 답답한 틀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담았다면 에스파는 개성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청춘의 모습을 세련되게 녹였다. SM 관계자는 “‘시대유감’은 음악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관통하여 젊은 세대의 심경을 반영하는 메시지가 담긴 상징적인 곡이다. 그런 곡을 4세대 대표 아이돌로 꼽히는 에스파가 재해석한다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리메이크 통해 보유 중인 기존 IP의 수명 연장
과거 H.O.T.와 S.E.S. 팬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곡 뮤직비디오를 오마주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살린 NCT드림의 ‘캔디
이 같은 주특기를 바탕으로 SM은 유튜브와 함께 2021년부터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를 진행 해오고 있다. K-팝의 역사를 조명하고 음악 업계 성장에 기여하기 위한 기획으로, 레전드 아티스트들의 다양한 뮤직비디오와 음원을 디지털 플랫폼에 적합한 상태로 업스케일링 및 리마스터링해 ‘SM 스테이션’을 통해 선보인다. 1세대인 H.O.T.와 S.E.S.부터 2세대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에 이어 지난해 데뷔한 5세대 라이즈까지 다양한 IP를 보유한 SM으로서는 리메이크 작업을 통해 기존 IP 수명까지 늘릴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다.
콘셉트 자체가 메타버스인 에스파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의 단골손님이다. 이번 ‘시대유감’ 이전에도 선배 그룹 S.E.S.의 ‘Dreams Come True’를 2021년에 선보인 바 있다. ‘Dreams Come True’는 1998년 발매한 S.E.S. 2집 타이틀곡으로, 당시에도 신비로운 요정들의 몽환적인 비주얼과 낯선 인트로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를 SM의 또 다른 요정들이 비슷한 듯 다른 맛으로 요리했다. 이 외에도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에스파는 데뷔 4개월 차 신인일 때, 2000년 발매된 유영진의 ‘Forever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아빠들에게)’를 리메이크해 두 번째 싱글곡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2000년대생 라이즈와 2000년대 곡 ‘응급실’이 만난 이유
에스파의 ‘Dreams Come True’.
특히 전 국민 노래방 애창곡 ‘응급실’을 택한 점이 탁월했다. SM이 지난해 9월 원곡자 측에 샘플링 허락을 구하러 연락을 취했을 때 이지의 보컬 오진성조차도 ‘SM이 왜 이 노래를 샘플링하지?’ 생각했을 만큼 라이즈와 ‘응급실’은 생소한 조합이다. SM 관계자는 “작곡진이 최초 데모부터 ‘응급실’을 샘플링한 것으로, 곡 작업 단계에서부터 한국에서 오래 사랑받고 있는 노래를 활용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오래’다. ‘응급실’은 발표된 이래 노래방 인기 차트에서 누적 1위를 차지한 곡이다. 저작권(작곡·작사·편곡자의 권리)과 저작인접권(제작자와 실연자의 권리)을 합하면 100억 원이 넘는다.
이 같은 ‘응급실’의 인지도에 라이즈가 추구하는 ‘이모셔널 팝’이 더해져 전혀 다른 ‘응급실’ 2024년 버전이 탄생했다. 이모셔널 팝은 멤버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에 초점을 둔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끝내자고 말을 해버린 거야”라고 익숙한 ‘응급실’ 한 소절이 나온 후 바로 “1 2 Let’s go”라며 라이즈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풍성한 사운드와 “이건 Emergency 1-1-9” 같은 발랄한 가사, 청량한 보이스 등 언뜻 들으면 완전히 다른 노래다. 오진성 역시 “원곡 속 내 목소리가 이별에 아파하고 애절한 느낌이라면 라이즈는 쿨하고 담담하다”며 “사실 ‘응급실’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다. 하지만 이 부분이 들어갔다면 그저 리메이크 버전에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곡으로 음원까지 잡은 라이즈는 1월 24일 ‘Love 119’ 일본어 버전 음원과 내용이 추가된 뮤직비디오를 발표하고 일본 공략에 나섰다. 아직 일본에서 정식 데뷔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샘플링으로 앰뷸런스급 고속 날개를 단 라이즈에게 남은 숙제는 라이즈만의 성장 서사를 좀 더 ‘많이’ 담은 ‘미니앨범’이다.
윤혜진은
아이돌 조상 H.O.T.부터 블락비, 에이티즈까지 청양고추 매운맛에 중독된 K-팝 소나무다. 문화교양종합지와 패션 엔터테인먼트 매거진 기자를 거치며 덕업일치를 이루고, 지금은 아이와 뮤직비디오 같이 보는 엄마로 레벨업했다.
#라이즈 #응급실 #Love119 #sm #여성동아
사진 제공 SM엔터테인먼트, 유튜브 뮤직비디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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