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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일 팔라지오 ‘우리가 춤을 출 때’ 2019,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다면

이찬주 무용평론가

2025. 03. 13

무심코 바라본 와인 라벨 속 춤. 전 세계 와인과 그에 얽힌 춤 이야기를 연재한다.

발레 ‘사타넬라(왼쪽). 일 팔라지오  ‘우리가 춤을 출 때’ 2019.

발레 ‘사타넬라(왼쪽). 일 팔라지오 ‘우리가 춤을 출 때’ 2019.

‘우리가 춤을 출 때(When We Dance)’는 팝 스타 ‘스팅’이 자신의 대표곡 제목에서 딴 이름이라고 한다. 스팅의 일 팔리지오 와이너리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키안티 마을 해발 330m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양조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6개월간 숙성하고 병입 후 3개월간 추가 숙성해 출시한 와인이 ‘우리가 춤을 출 때’ 2019다. 검붉은 빛깔의 모렐로 체리, 바삭한 자두, 말린 허브 향이 특징으로 산미가 강한 편이다. 품종은 콜로리노 델 발다르노, 산지오베제, 카나이올로의 키안티 블렌딩이다.

라벨을 살펴보면 가면을 쓴 고양이가 양팔을 위로 높이 든 채 토슈즈를 신고 와인병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가면은 춤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당장 ‘가면무도회’가 떠오를 것이다. 매년 2월 하순에 열리는 ‘베네치아 사육제’ 기간에는 거리마다 화려한 의상에 가면을 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사람들은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얼굴만 가렸을 뿐인데 평소 할 수 없던 행동을 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다.

가면은 여러 예술 작품에서 다양한 장치로 활용됐다. 베네치아 사육제를 배경으로 한 발레 ‘사타넬라(Satanella)’에도 가면이 등장한다. 국내에서는 ‘베니스(베네치아의 영어식 표현) 카니발’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의 손길을 거쳤으나 아쉽게도 그의 안무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그중 ‘파드되(pas de deux·2인무)’가 발레 팬들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준다. 발레리나는 발레리노에게 의지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며 공중에서 브리제(bris´e·앞발을 뒷발과 마주치는 동작)를 연속하여 선보인다. 음악이 느려지고 발레리노가 발레리나의 얼굴을 가린 검은 가면을 벗겨내고 인사를 청한다. 이어 시작되는 두 사람의 춤에는 남녀 간 밀당이 보인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지지만 밝고 경쾌한 동작이 이어진다. 음악이 절정에 이르면 발레리노는 사랑하는 연인을 놓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발레리나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끝을 맺는다.

가면은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외면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장치다. 발레리노가 발레리나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은 서로의 진심을 마주 보자는 것이며, 가면을 벗은 채 춤을 추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18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화가 주세페 데 고비스가 그린 ‘수녀원의 응접실’.

18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화가 주세페 데 고비스가 그린 ‘수녀원의 응접실’.

미술 작품 속 가면 하면 미국 샌디에이고 미술관에서 본 주세페 데 고비스의 그림들이 기억난다. 베네치아 출신 풍속화가인 고비스가 1760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녀원의 응접실’은 흥미로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중앙에 가면을 쓴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다.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에 서서 가면을 벗은 채 이들을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지만 가면을 벗은 남자를 곁눈질하는 여자다. 이제 천천히 방 안을 돌아보면 모든 이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무심한 듯 두 남녀를 훔쳐보고 있다. 그러다 맨 왼쪽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시선이 부딪힌다. ‘당신도 훔쳐보고 있나’라는 눈빛에 슬그머니 무안해진다.

본래의 나를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자신을 초월한 누군가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가면의 본질이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기 위해 쓰는 가면, 이러한 가면을 쓴 인격체를 우리는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른다. 가면은 때로는 얼굴을 가려 나를 감추는 비겁한 도구가, 때로는 그 뒤에 감춰진 진실을 찾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필요하다면 쓰고, 필요치 않을 때는 드러내며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무도회는 끝나고 우리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와인과춤 #와인라벨 #여성동아

사진제공 이찬주 
‌사진출처 유니버셜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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