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안나 카레니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1878년 내놓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 부분이다. 안나의 올케 돌리의 생각이다. 돌리는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느라 지쳐있었다. 혼자 안나를 찾아가는 길에 즐거운 아낙들을 보며 모두가 생의 기쁨을 즐기는데 자신만 삶에 찌들어있다고 후회했다. 15년간 자신의 결혼 생활은 임신, 고통스러운 육아와 아이의 죽음, 사고력의 둔화,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 추한 외모를 남겼다.
15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편은 흥청망청 놀러 다니며 사고를 치고, 살림을 하려니 늘 돈에 쪼들렸다. 고단한 삶은 의무들로 넘치고, 자신의 욕망을 돌볼 틈 같은 건 없었다. 모처럼 가정을 벗어난 돌리에게 안나는 달리 보였다. 안나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고 한 번뿐인 삶을 즐기고 있는 걸로 보였다. 19세기의 남성 작가는 여성이 처한 환경과 그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을 놀라운 솜씨로 잡아냈다.
19세기 여성의 삶
근대, 그러니까 20세기 이전 여성의 삶은 21세기 현대 여성의 삶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성이든 남성이든 삶은 시간에 구속된다. 시대에 속박된 삶을 살펴보는 유용한 방법은 소설을 읽고 현재와 비교해 보는 거다. 이 기획에서 19세기 근대 서구 사회를 살았던 여성의 삶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영국 작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는 19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인물이다.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대표적 여성으로 손꼽을 수 있는 소설 속 여성은 안나 카레니나일 거다.안나는 어떤 삶을 살아간 인물일까. 안나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은 카레닌과 브론스키였다. 안나는 20년 연상이면서 유능한 고위 관리인 카레닌의 아내였다. 아들 세료쟈와 함께 별 문제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안나의 오빠 스티바가 여자 문제로 부정을 저질러 문제가 생기자 안나는 올케를 달래기 위해 모스크바로 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눈 사람이 브론스키의 어머니였다. 안나는 어머니를 모시러 온 브론스키와 기차 객실에서 처음 만났다.
이 우연한 만남은 둘의 삶을 아주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다시 만난 곳은 무도회장. 톨스토이는 돌리의 여동생 키티의 눈으로 사랑에 빠져가는 안나와 브론스키를 그려낸다. 키티는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에 빠져가는 안나와 브론스키를 보고 말았다. 무도회가 진행될수록 키티는 절망에 빠졌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안한 사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안나는 처음엔 피하려고 했다. 일정을 앞당겨 남편과 아들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런데 안나가 탄 그 기차에 브론스키 역시 타고 있었다. 브론스키와는 기차에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지만 안나의 마음은 변화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가슴 속 환멸의 감정이 피어난다.
안나는 결국 카레닌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다. 카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 아내의 부정에 대처하는 여러 선택지를 생각했다. 결투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합법적 이혼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카레닌은 아내를 벌하기 위해 안나를 자신의 곁에 붙여 놓기로 결정을 내렸다.
카레닌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안나가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집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레닌은 안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브론스키를 마주치지 않도록 하고, 사교계와 하인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처신할 것을 못박았다. 지킬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안나의 쪽지를 받고 집으로 간 브론스키는 카레닌과 마주쳤다. 카레닌은 즉각 이혼을 결심했다.
안나와 키티
영화 ‘안나 카레니나’
안나는 브론스키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출산한 다음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남편의 용서도 안나와 브론스키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지 못했다. 브론스키는 집으로 돌아가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외국으로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안나는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사랑을 쫓아 살아가는 삶이 좋아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주어진 제도에서 벗어난 삶이 순탄할 리 없었다. 사교계는 안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륜의 상대자인 브론스키는 남자이기에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쫓겨나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겉으로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삶을 누렸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데는 장애물이 많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당시 러시아 교회법은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안나가 아들 세료쟈를 데려간다고 해도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양육할 수 없었다. 이혼은 브론스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혼을 거치지 않으면 안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법적으로 카레닌의 아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정이라는 제도적 보장을 받지 못한 안나의 사랑은 점점 비뚤어져 갔다. 온전한 가정을 포기한 안나에게 남은 건 사랑뿐이었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다른 관심을 갖지 않도록 집 안을 생기 있고 유쾌한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사교계를 대신할 사람들을 집안에 끌어들였고,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지 않을까 끝없이 불안해했다.
사랑이라는 마음의 규율과 결혼으로 만들어지는 가정의 규율이 빚어내는 혼란은 ‘안나 카레니나’의 주제 중 하나다.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과 가장 대조적인 커플은 키티와 레빈 커플이다.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렸으나 안나의 등장으로 절망에 빠졌다.
레빈은 키티에게 거절당하고 실망에 빠져 시골로 돌아왔다. 농사에 뛰어들어 직접 노동을 하며 건강한 기쁨을 찾아갔다. 건강한 노동과 농민들의 삶에 밀착한 레빈에게서 톨스토이의 모습이 보인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한 1873년 아내와 함께 사마라 지방에 가서 빈민구제사업을 펼쳤다. 톨스토이는 뛰어난 소설가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운동, 교육운동, 비폭력운동 등을 펼친 사상가였다.
키티는 다시 만난 레빈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키티는 요양 차 떠난 외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정신적인 삶에 눈뜨기 시작했다. 한편 돌리는 레빈에게 결혼을 앞둔 여자들이 처한 상황을 들려줬다. 남자들은 여자들 중 한 사람을 택해 그 집에 드나들며 관찰하고 청혼하지만, 여자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남자를 잘 알지도 못한 채 주어지는 청혼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 말이 레빈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레빈은 키티에게 다시 청혼했다.
키티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도 키티의 사랑을 믿지 못했던 레빈에게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훌륭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결혼 후 모스크바나 외국으로 가라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시골로 가겠다고 한 것은 키티의 선택이었다. 키티와 레빈은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시골에서의 건강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서로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됐다면, 키티와 레빈의 사랑은 서로 간의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열정과 이해의 차이는 컸다. 사랑이 안겨주는 고통으로 번민하던 안나는 결국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삶을 끝내고 만다. 여기까지가 내가 전달할 수 있는 19세기 여성인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과 삶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양 소설에서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혀 왔다. 2007년 노턴 출판사가 조사한 ‘영미권 작가 125명이 뽑은 최고의 문학’에서 1위를 차지했고, 2009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역대 세계 최고의 명저 100’의 하나로 선정됐다. 톨스토이는 그 누가 뭐라 해도 서양 근대의 최고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함께 톨스토이가 남긴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안나 카레니나’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작품이다. 소설을 읽는 까닭의 하나는 소설이 개인의 삶과 당대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낼 때 갖게 되는 재미에 있다. 또 소설이 형상화한 인물 또는 소설이 제기하는 인간 및 사회문제에 공감할 때 작품으로부터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얻게 된다. 문학이든 영화든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물과 사건들이 엮어내는 이야기의 힘이다. 삶과 닮아있는 이야기는 깨달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풍속과 사회,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소설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너무 강렬한 작품은 읽는 재미를 잃기 쉽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키티를 위시한 인물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내면을 풍부하고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번역본이 3권으로 이뤄진 긴 내용임에도 흥미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열정과 이해 사이에서
1908년 러시아 야스나야폴랴나에서 찍은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 사진.
이분법의 관점에서 보면 안나의 삶보다는 키티의 삶이 더 소망스럽다. 진정한 사랑에는 열정 못지않게 이해가 중요하다는 게 톨스토이의 암묵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열정이라는 감정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분별을 갖지 않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위험한 사랑이다. 위험한 사랑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난다. 제도적 구속이 강력했던 19세기에 위험한 사랑은 더욱 그러했고,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은 그 전형이었던 셈이다.
열정에 이해를 더한 사랑이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열정 없는 이해의 사랑은 어떨까. ‘열정 없는 이해의 사랑’이나 ‘이해 없는 열정의 사랑’ 모두 비극적인 건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누구나 열정 있는 이해의 사랑을 꿈꾸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사랑을 삶에서 꼭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 거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예정된 운명이라기보다 예정과 무관한 우연이 아닐까.
안나의 사랑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도덕 밖에서도 존재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선택할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나의 사랑처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관심을 받을 만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사랑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여성 안나를 지금 다시 만나는 이유다.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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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뉴시스
사진제공 민음사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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