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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신가정’의 마지막을 함께한 한국 서양미술의 거장 이쾌대

안현배 예술사학자

2023. 06. 01

1933년 ‘신가정’으로 창간한 ‘여성동아’는 올해 90주년을 맞았다. 창간호부터 1981년 3월까지 표지를 장식했던 수많은 그림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작가의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강렬한 표현으로 유명한 이쾌대. 그가 ‘여성동아’의 전신인 ‘신가정’의 표지 그림을 그릴 당시엔 신진 작가였다. 파란만장한 작가 이쾌대의 삶은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다.

한국 서양미술의 거장, 이쾌대.

한국 서양미술의 거장, 이쾌대.

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일제는 동아일보 및 자매 출판물에 대한 발행 중단 조치를 내렸다. 1933년 1월 창간한 ‘신가정’은 1936년 9월호로 끝을 맞는다. 그 표지화를 장식한 사람이 이쾌대다. 고집스럽게 당대 한국 화가들의 새롭고 신선한 화풍을 표지에 담던 ‘신가정’은 기사 역시 충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사회문제는 물론이고 해외 동향을 전하는 기사를 싣고, 대담을 통해 시대상과 사회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기록했다. 해학적으로 세태를 다루는 만평과 독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한 ‘신가정’은 현재 잡지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대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신가정’의 마지막 표지화를 장식한 이쾌대를 탐구해본다.

좌우 갈등 속 사라질 뻔한 이름, 이쾌대

‘군상-4’(1948).

‘군상-4’(1948).

역사적 비극의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던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일찍 결혼한 아내 유갑봉과 함께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서양화 세계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가 그린 초기 인물화는 단아하고 소박했다. 서양화보다 동양화 분위기를 풍긴 이 시기 그림들은 대부분 아내 유갑봉이 모델이었다.

그는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한 ‘운명’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입선했다. 1941년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중섭, 김학준,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 신미술가협회’를 만들었다. 서양화와 한국화 그 사이에서 답을 찾아내려는 고민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다. 한국 전통 복식을 하고 있는 인상적인 표정의 화가가 서양의 팔레트를 들고 있다. 한국화 붓을 들고 꼿꼿하게 서 있는 자태는 일제강점기 지식인과 예술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45년 광복 직후 민족 예술을 만들어보겠다는 그의 목표는 첨예한 정치 대립 속에 그 색이 바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그는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 머물렀다가 북한군을 위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후 연합군에 붙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포로 교환 때 월북을 선택해 오랜 기간 우리의 예술사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으레 많은 예술가가 그랬듯 이쾌대는 월북 이후 북한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고 밀려났으며,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고문을 당했고, 그의 이름은 금기시됐다.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에서 그의 작품뿐 아니라 ‘이쾌대’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신가정’ 표지화 속 표현주의

‘신가정’ 1936년 9월호.

‘신가정’ 1936년 9월호.

그가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근현대 예술가의 재발견 과정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군상’ 시리즈를 비롯해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작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는 1965년 북한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그 후 15년 이상이 지나서야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성으로 주목받았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쾌대 특별전을 열면서 제목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라 붙였다.

다시 1930년대로 돌아가 보자. 1936년 9월호 표지 그림의 모델은 이쾌대의 아내인 유갑봉 여사였으리라 추측한다. 언뜻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은 인물을 왼쪽 아래서 본 각도와 색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당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을 유럽 화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유롭고 정제되지 않은, 그래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그의 붓 터치에서 동시대 독일에서 활동한 표현주의 작가의 느낌을 찾을 수 있다. 활동 초기엔 화풍이라고 할 것도 없이 한국화의 한 장르처럼 잔잔하게 묘사되던 이쾌대 그림 속 인물들은 점차 존재감을 가지고 개성을 드러내게 된다.

왼쪽부터 ‘무희의 휴식’(1937), ‘운명’(1938), ‘카드놀이하려는 부부’(1930년대). 이쾌대는 1930년대 자신의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여인상을 즐겨 그렸다.

왼쪽부터 ‘무희의 휴식’(1937), ‘운명’(1938), ‘카드놀이하려는 부부’(1930년대). 이쾌대는 1930년대 자신의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여인상을 즐겨 그렸다.

일제강점기 한국 화가들은 스스로 많은 예술운동과 흐름을 경험하고 소화해내야 했다. 이쾌대는 표현주의 계통의 흔적을 보이다 이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계열의 그림을 선보였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풍은 강렬한 붓 터치와 과감한 색을 사용해 정돈되고 정제된 안정감보다는 힘과 개성에 매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쾌대가 그린 ‘신가정’ 9월호 속 여성은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그림처럼 자유롭고 생동감 있게 표현됐다.

20세기 초 등장한 독일의 표현주의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화권에서 등장한 화풍이다. 자신의 내면이 가진 상처와 감정들을 드러내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쾌대는 이 여인과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 역시 일제강점기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삶을 알기에 여성의 모습을 마냥 밝지 않게 그린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한국 여성들의 대표적인 얼굴을 그리고자 한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이쾌대 #여성동아90주년 #표지화 #신가정 #여성동아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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