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악역인데 왠지 모르게 정이 간다.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인 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나쁜 일은 도맡아 하고 있는 한 실장. 악한 눈빛이 섬뜩하다가도 사랑하는 여자와 자식 앞에서는 얼굴 가득 애잔함이 묻어 나온다. 탤런트 정성모(55)는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 실장으로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구름 낀 하늘 아래 습한 공기가 불쾌지수를 높이던 7월 중순, 충북 청주 촬영장에서 그를 만났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분장을 마치고 나오는 그를 알아보고 너나없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참 동안 사인 공세에 시달려야했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높아진 인기를 실감하느냐고 묻자 그는 “늘 있었던 일 아닌가요?”라며 웃었다.
“농담이고, 요즘 관심이 부쩍 늘어난 걸 느껴요. 예전에는 ‘어, 드라마 나오는 사람이다!’라면서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딸 같은 아이들까지 ‘한 실장 아저씨다!’라며 반갑게 뛰어와요. 악역이지만 한편으로 연민이 느껴져서 그런지 많은 분이 친근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한 실장 덕분에 사인 공세 시달려요”
지난해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서현공으로 출연했던 그는 그때보다 지금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한 해를 꼬박 지방 촬영장에서 보내 얼마간 휴식기를 가질 법도 한데 그는 KBS 아침드라마 ‘다 줄거야’를 끝내고 곧장 ‘제빵왕 김탁구’에 합류했다. 그만큼 이번 역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실은 아침드라마 끝내고 쉬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 시놉시스를 받아 그냥 슬쩍 보니 너무나 악한 인물인 거예요.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더니 제작진이 한 번만 더 읽어보라며 설득하더라고요.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니 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고, 내면에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어 표현하기 어려운 역할이라 도전하고픈 욕심이 생겼죠.”
한 실장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그는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라며 오랜 만에 연기하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주요 등장 인물인 전광렬·전인화·윤시윤 등과 긴장감 속에서 각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부분이 희열을 준다고. 전인화와의 진한 키스 장면도 화제가 됐는데 이 또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오랜 시간 연기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면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요. 전인화씨와는 평소에는 장난도 치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지만 슛 사인만 들어오면 그런 건 다 잊고 연기에만 몰입하죠.”
겉으로 보기에 정성모와 한 실장은 싱크로율 100%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고 한다. 평소에는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여린 면이 많다고.
“올림픽에서 마라톤의 마지막 주자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며 눈물 흘린 적도 있어요(웃음). 악역을 주로 맡다보니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여린 편이에요. 극에서 한 실장이 딱 한 번 인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초반부 미순이 낳은 아이(탁구)를 빼앗으러 갔다가 불쌍해서 그냥 보내주는 장면이죠. 전 오히려 그쪽에 가까워요.”
실제 그는 한없이 선량한 서현공과 한 실장 중 어떤 역할에 더 매력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는 “특별히 더 끌리는 건 없다”고 답했다.
“선한 역, 악한 역을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그보다는 맡은 역할이 극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욱 매력적으로 표현될까 고민하는 편이죠. 악역은 악역이 주는 맛이 있어요. 대사가 강렬하기 때문에 또박또박 씹어서 말해야 하죠. 그럴 때면 강렬한 감정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걸 느끼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데뷔 후 매년 한 작품씩, 그렇게 지나온 28년
정성모는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82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했다. 올해로 28년째,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았다.
“아직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시기는 아닌 것 같아요. 젊은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예순 살부터 제대로 연기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 한 계단씩 오르다보면 느즈막에 농익은 연기를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때문에 항상 목표는 ‘오래가는 배우’였죠. 멋지고 좋은 역할만 맡으면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건 생각지 않고 달려왔어요. 지금도 젊으니까 앞으로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그가 배우를 꿈꾼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시골에 살던 유년 시절, 정월대보름이면 마을에 지신밟기 행사가 열렸고 그때 그의 아버지는 기수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목에다 태운 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어린 정성모는 그럴 때면 흥에 겨워 한껏 재롱을 피우곤 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를 다니러 서울에 온 그는 더욱 확고히 배우라는 꿈을 가슴에 품게 됐다.
“그때 뮤지컬 영화가 유행 했어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데 온 몸에 전율이 감돌더라고요.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일언지하에 안된다고 하셨어요. 당시에는 배우 일 자체를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졌던 아들이었기에 다른 일을 하길 바라셨죠. 아버지 반대 때문에 하마터면 대학을 못 갈 뻔 했어요(웃음).”
의지가 강했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대학생활이 즐거웠다. 학업에 매진하는 것은 물론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모여 직접 작품을 선정, 방학 내내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올렸다. 졸업 후 그는 정식으로 데뷔를 하기 위해 각 방송사 공채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4전5기 끝에 82년 합격했어요. 그때는 공채탤런트 시험이 유일한 등용문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절실했죠. 떨어질 때마다 ‘이 것 아니면 안된다’며 마음을 다잡고 계속 문을 두드렸어요. 조형기·맹상훈·이영범씨가 동기인데 한 4,5년 전까지는 자주 모였어요. 지금은 서로 바빠져서 가끔 연락만하며 지내죠.”
데뷔 후 그는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연기를 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출연한 드라마는 30편, 영화는 8편에 이른다. 이중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 ‘모래시계’는 정성모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극중 최민수를 악랄하게 괴롭히는 조직폭력배 종두로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 인생을 ‘모래시계’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말해야할 정도로 중요한 작품이죠. 그 전까지는 운동권 학생, 기자 등 정의롭고 부드러운 역할을 주로 했는데 ‘모래시계’의 악역 종두를 연기하면서 ‘내게 이런 부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걸 깨달았거든요. 그런데 종두가 워낙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 탓에 그 이미지를 벗겨내느라 힘들었어요.”
‘모래시계’를 끝내고 드라마 두 편을 찍은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보며 종두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모래시계’를 찍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고. 배우 인생에 있어 전환점을 마련해준 역할이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족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그 과제를 해결하는 중이라고 한다.
집에서는 자상한 아빠, 촬영장에서는 마음씨 좋은 배우
드라마 촬영이 지방 곳곳에서 진행되는 탓에 정성모는 5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밤이면 제작진이 잡아준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나와 촬영을 시작하는 강행군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 실장 역할이 여러 인물과 엮여 있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촬영 스케줄이 빠듯해서 가족 얼굴 본지 꽤 된 것 같아요. 어제는 밤 열두시 넘어 아들한테 전화가 왔어요. 잘 지내냐며 안부를 묻는데 가슴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데 기말고사 끝나고 온 가족이 여행을 가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정말 미안하죠.”
그를 보고 있자니 극중 아들 마준에 대한 뜨거운 부성애가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가족에 대해 묻자 “사생활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겠다”며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아들에 대해서만은 웃음을 띠며 말문을 열었다.
“집에서는 관대하면서도 때로는 엄한 편이에요. 일반적인 가정의 아버지 모습과 같을 거예요. 아들이 무덤덤한 편이라 제가 일하는 데에 대해서도 별 말을 하지 않는데 요즘에는 한 마디씩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네 아빠 진짜 무서운 분이야?’라고 물었다는데 아들이 ‘연기일 뿐이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매력적인 일’이라며 설명을 해줬다고 해요. 뿌듯했죠.”
정성모는 아무리 가족이 애틋해도 연기하는 이들에겐 현장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장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동료 배우·스태프와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정성모는 동료에게 먼저 다가가는 쪽이다.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그를 기다리던 중 한 스태프가 “출연 배우 중 성모 형이 제일 성격이 좋다”며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보면 현장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제가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할지 알게 되죠. 특히 젊은 배우들은 선배들에게 먼저 다가오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먼저 말도 걸고 농담도 하곤 해요. 때로는 조언을 구하러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이렇게 하면 어떠니’라며 가르쳐 주기도 하죠.”
평생 연기 외길을 걸어온 그는 쉴 때면 주로 인사동을 찾는다. 오랜 시간 취미로 미술을 감상한 덕분에 화가 친구도 여럿 사귀었다고 한다. 그는 “직접 그릴 실력은 되지 않지만 지인들의 전시회를 찾아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성모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후회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묻자 천생 배우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를 잃었을 때’ 후회스럽죠. 연기를 하다보면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헛갈릴 때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전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설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연출자의 의도와 내가 고민하고 연습한 것이 맞아 떨어질 때면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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