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네티즌 사이에서 탤런트 임동진(63)의 별명은 ‘포스 임동진’이다.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고구려 장군 양만춘을 연기하며 온몸으로 강력한 ‘포스(force·힘)’를 내뿜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 아닌게 아니라 우렁찬 목소리로 군졸을 지휘하고,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힘을 과시하는 드라마 속 그를 보고 있으면 환갑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브라운관 밖에서도 임동진은 정력적으로 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지난 2003년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지난해 5월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준목이 됐다. 바쁜 연기활동 중에도 경기도 용인의 한 개척교회에서 목회를 맡고 있는데, 준목이 된 뒤 1년째인 올 5월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한다. 흰눈이 전국을 뒤덮은 지난 12월 중순, 바로 그 교회에서 임동진을 만났다.
올해는 67년 TBC 공채 8기로 데뷔한 그가 연기인생 40년을 맞는 해. 그 사이 숱한 동료 선후배들이 브라운관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주연배우로 극의 중심에 서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자 겸업 목사도 됐으니, 연기자로도 신앙인으로도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에 오늘 같은 순간이 올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2년 8월,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죽음의 문턱까지…
여러 고비를 넘기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임동진.
“그해 8월19일이었어요. 거실에서 드라마 대본을 읽는데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속에서 짜증이 일었죠. 대본을 탁 덮으며 일어서다가 갑자기 ‘헉’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짙은 회색 알루미늄 판처럼 변하더니 순식간에 쪼그라들더군요.”
숨이 막혀왔다. 심호흡을 해보려 애썼지만 답답한 심장은 움직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 주먹으로 가슴팍을 내려치면서 ‘아,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안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아내가 제 소리를 듣고 나왔어요. 저를 보니 이미 얼굴이 파랗게 질려 죽어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내가 119를 불러야겠다고 달려가는데 제가 ‘119 불러도 소용 없어. 그냥 나를 여기 눕히고 제발 내 옆에 있어줘’라고 했어요.”
이미 자신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응급조치를 받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죽기 전 아내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호흡곤란으로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순간, 그는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장기는 다 기증하고 남은 건 화장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집사람이 ‘싫어’ 하는 거예요. 정말 아기처럼 ‘싫어, 싫어’ 하면서 울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자기 가슴에 품고 살다가 뒤따라 올 거라고, 절대 혼자 못 보낸다고…. 신파 같지만, 아내가 그렇게 통곡하는 걸 보니 정말 이 사람이 그렇게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어떻게든 살아야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119를 불러달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급성 뇌경색이었다. 그와 함께 응급실로 달려간 가족들에게 의사는 “너무 늦었다. 장례를 준비하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동진은 실제로 나흘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때 그는 ‘임사(臨死)체험’을 했다고 한다. 임사체험이란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사람들이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상황을 겪는 것을 가리키는 말. 죽음의 위기를 극적으로 이겨낸 이들은 자신의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자신이 믿는 절대자의 존재를 만났다고 말하곤 한다. 당시 교회 장로였던 임동진은 그리스도의 뒷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찬란한 초록색으로 빛나는 넓은 들꽃 벌판에 서 있었어요. 저쪽 먼 곳에 아치로 된 문이 보였죠. 그리고 그 앞에 그림에서 흔히 보던 예수님의 뒷모습이 있었어요. 꿈속에서도 심장이 멎는 듯했죠. 숨을 죽인 채 ‘이제 돌아보시겠지. 지금일까? 지금일까?’ 하며 조마조마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어요. 그런데 절대 뒤로 돌지 않으시더군요. ‘한 번만 나를 보셨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귓가에서 ‘주소 말씀해보세요.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 순간, 다시 생의 영역으로 넘어온 거였다. 하지만 눈을 떴는데도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뇌를 다친 탓에 시력이 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마치 두꺼운 포장을 덮어놓은 것처럼 뿌연 형체로 보이고, 천장은 자신을 내리누를 듯 낮아졌다가 높아지기를 반복했다. 팔에는 링거병이 4개 달려 있었다고.
“몸의 감각이 무뎌진 대신, 정신은 극단적으로 예민해졌어요.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죠. 의식을 되찾은 뒤 일반 병실로 옮겨졌는데, 담당의사가 들어오더니 아내를 밖으로 불러내더군요. ‘틀림없이 나와 관련된 얘기를 하는 걸 거야’ 생각했죠. 밖에 나가 한참을 있던 아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왔어요.”
임동진은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예감이 스쳐갔다고 한다. 과장된 아내의 행동을 보며 ‘내게 뭘 감추려고 즐거운 척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선생님이 뭐라셔?’ 하고 물었더니 아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똑바로 얘기해. 내가 평생 연기만 한 사람인데 당신 연기하는 거 모르겠어. 뭐라 그러셨어?’ 하고 화를 냈죠. 그랬더니 갑자기 울더라고요. ‘당신, 생명은 구했는데, 이제 다시는 못 걷는대. 평생 휠체어 타고 다녀야 한대’ 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어요.”
임동진은 “아내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몸에 힘을 줘봤다고 한다. 목 위와 손을 제외하고는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담담한 척 ‘그래?’ 하고 말했지만, 속에서는 통곡이 솟아나고 있었다.
“저는 배우잖아요. 그런데 육신이 어긋났으니, 이제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래, 누군가 한 번쯤은 굳이 나를 위해 배역을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엔 어쩌지? 그 다음엔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1시간씩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했죠.”
임동진은 다른 사람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에 식구들을 다 병실 밖으로 내몰고 운동도 시작했다고 한다. 일어나 앉아보니 왼쪽으로 푹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려 해봤지만 또 왼쪽으로 푹 쓰러졌다. 뇌에서 신체의 균형을 잡는 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쓰러지면 또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났어요. 결국 3일 만에 침대 위에 앉는 데 성공했죠. 그 뒤에는 어깨로 바닥을 디디며 침대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걷는 연습을 시작하려고요. 아내가 ‘제발 곁에서 지켜보게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나 우스운 꼴 보고 싶어 그러느냐’고 심한 소리를 하며 병실 밖으로 내쫓았죠. 그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는 벽을 짚고 일어선 뒤 침대에서 출발해 두어 걸음을 걸어갔다가 맞은편 벽을 짚고 돌아오는 연습을 오전에 1천 보, 오후에 또 1천 보씩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몸이 자꾸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계속 하다보니 방법을 터득해 마침내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됐다고.
임동진은 ‘배우(俳優)’의 ‘배’자가 ‘사람 인(人)’자와 ‘아닐 비(非)’자의 결합으로 이뤄진 건, 배우는 사람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야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배우거든요. 저는 운동신경이 정말 없는 편인데도 승마를 하루 만에, 수상스키는 3시간 만에 배웠어요. 해야 하니까, 촬영에 들어가면 내 몸을 직접 움직여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걷기 연습을 할 때도 계속 속으로 되뇌었죠. ‘난 배우다. 그러니까 이걸 해야만 한다’고요.”
그는 병원생활 22일 만에 담당의사에게 퇴원 허락을 받았다. 의사는 “원래 이런 얘기 하는 걸 참 싫어하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정말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마침내 그가 두 발로 걸어 퇴원하던 날, 신경외과 병실의 거의 모든 환자들이 병실 문을 열고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에게 임동진은 ‘나도 언젠가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퇴원하고 7일 만에 SBS 드라마 ‘피아노’를 찍었죠. 쓰러지기 전부터 약속이 돼 있었거든요. 거기서 전 은퇴한 주먹 보스 역을 맡았는데, 첫 장면이 부산 영도다리 위를 달리는 거였어요. 제가 두 다리를 옮겨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아직 시력이 다 회복되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죠. 걷는 장면에서도 한껏 멋을 부렸고요. 그전에는 걷는다는 데 대한 자각조차 없었는데, 그때는 두 발을 디디며 걷는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거예요. 파도처럼도 걸어보고, 영국 신사처럼도 걸어보고…. 그래서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저를 보고 ‘임 선생님은 걷는 모습이 참 멋지다’고 해요(웃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아직 뇌경색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몸이 자꾸 왼쪽으로 치우쳐진다고. 균형을 잡으려면 늘 온몸에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더 힘든 것은 정신적인 후유증이다. 임동진은 “사실 병을 앓은 뒤 꽤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정신적 고통 묵묵히 지켜보며 돌봐준 아내 덕분에 회복
“머리를 다치는 건 그냥 병이 아닙니다. 뇌의 어느 부분이든 망가지면, 성격이 막 뒤범벅이 돼요. 예민하고 날카로워지고 이유 없이 포악을 떨고 싶어지기도 하고…. 정말 사람이 망가지는 거죠. 저는 일어나 걷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병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 무렵 저를 돌아보면 정상이 아니었어요. 주변 사람들, 특히 아내를 참 많이 힘들게 했죠.”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이 돌변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을, 심지어 아내조차도 의심하고 미워했다고.
“하루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데, 앞차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아내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어요. 그 순간 ‘아니 이 사람이 나를 다치게 하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그때는 그런 분노가 불합리한 것이라는 판단 자체를 할 수 없거든요. 그냥 화가 솟구치는 거예요. 그래서 ‘차 이쪽에 대. 나 내릴래’ 하고 말했어요. 아내는 달리는 도로에서 무작정 저를 내려줄 수 없으니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조금만 더 가자’고 했죠. 그 소리를 듣고 전 화가 더 나서 달리는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내리려 했어요.”
깜짝 놀란 아내가 차를 세우는 순간 그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인적 없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 동안, 아내는 차를 천천히 운전하며 뒤따라왔다고. 한동안 이런 일이 끝없이 반복됐다고 한다.
임동진의 아내 권미희씨(59)는 MBC 탤런트 4기 출신. 하지만 임동진과 결혼한 뒤 전업주부로 살았다. 임동진은 “우리 집사람은 내가 갑자기 화를 내면 자리를 피했다가, 화가 가라앉을 때쯤 나타나 혀를 내밀고 놀리듯 빙긋빙긋 웃는다. 그러고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조곤조곤 말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 아내 덕분에 임동진은 뇌경색 후유증을 가정불화 없이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죽음의 순간에서 삶을 생각한 것도, 그리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내 덕분이죠. 사실 아내는 그전에도 제가 불행한 어린 시절 때문에 괴로워할 때마다 저를 다독이고 평화롭게 만들어줬어요.”
임동진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한다. 이북 출신인 그의 부모는 45년, 한 살짜리 임동진을 등에 업고 월남해 인천에 정착했는데, 5년 뒤 6·25가 발발하면서 헤어졌다. 1·4 후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부산 피란길에 올랐지만, 그곳에서 혹독한 가난과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소년 가장’이 되어 네 명의 동생과 함께 살아야 했던 그에게 세상은 원망스럽고, 때로는 증오스럽기까지 한 대상일 뿐이었다고. 그런데 거친 방황 중에 만난 아내는 그의 아픔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감싸 안아줬다.
“아내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처음엔 장인 장모가 저와의 결혼을 많이 반대하셨죠. 하지만 결혼 뒤엔 ‘둘째 사위가 최고’라고 할 만큼 많이 아껴주셨어요. 부모님께 받지 못한 사랑과 정을 장인 장모께 받았다고 느낄 만큼요. 아내는 제 동생 네 명이 결혼할 때마다, 넉넉하지는 못할지라도 한 살림씩 꾸려 챙겨준 마음 따뜻한 사람입니다.”
임동진을 처음 교회로 이끈 것도 아내 권씨였다고 한다. 그는 “아내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아내는 저를 도와줬어요. 사실 저는 2000년 갑상선 종양으로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에 작은 혹이 있다는 거예요.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때라 그냥 지나치려 했죠. 그런데 아내가 당장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아보라며 성화를 부리는 겁니다. 한참을 미적대다 몇 달이 지나서야 검사를 받았죠. 그런데 그게 암이었어요. 그 몇 달 사이에 한쪽 갑상선을 제거해야 할 만큼 커져 있었죠. 의사가 ‘지금은 한 쪽에만 있는데, 다음에 위험해질 수 있으니 양쪽 갑상선을 다 제거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지금 갑상선이 없다고 한다. 갑상선은 호르몬을 분비해 우리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는 기관. 갑상선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면 피로가 회복되고 면역력도 높아진다. 그런데 임동진은 이제 아예 이 호르몬을 만들어낼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보통사람이 100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제게는 50밖에 없는 거죠. 꾸준히 갑상선호르몬제를 먹지만, 그것으로는 다 보충할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늘 피곤한 상태, 일종의 만성피로 같은 증상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또 한 번 뇌경색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힘겨운 어린 시절과 고된 투병생활, 그리고 이어진 긴 후유증. 행복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인생 곳곳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도 임동진은 자신의 인생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극한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과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를 가진 건 오래됐지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뇌경색을 이기고 퇴원한 다음부터예요. 그때 저는 중환자실에서 물조차 넘길 수 없어 거즈로 입술만 축이는 환자, 스스로 숨 쉬지 못해 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환자 등 갖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을 봤거든요. 제가 자유롭게 숨 쉬고, 물 마시고, 두 발로 걷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가슴 절절하게 깨달았죠.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그 순간 저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아요. 그런 소중한 경험을 목회를 통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죠.”
목사가 직업을 갖는 것을 허용하는 교단을 통해 그는 연기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가 될 수 있었다. “내 삶에서 종교와 연기는 똑같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허락되는 한,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그 두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임동진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문득 바라본 TV 브라운관에서 그는 ‘양만춘’이 되어 있었다. 균형도 잡기 힘든 몸으로 말을 타고, 끝없이 까부러지는 체력을 끌어올려 좌중을 호령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나를 향할 때마다, 이 순간 쓰러질지라도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힘겨운 삶을 꿋꿋이 이겨온 그가 연기자로도, 그리고 깊은 깨달음을 전하는 목회자로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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