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여성이 기업을 운영하기란 쉽지 않죠. 여성기업이 윈윈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입니다.”
이정한(61)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의 말이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이하 협회)는 1999년 제정된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여성기업지원법)’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법정 여성 경제 단체. 동법의 여성기업은 여성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회사를 뜻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여성기업은 약 277만 곳. 협회는 이들의 경쟁력 강화 및 여성 창업 활성화 지원 업무를 담당한다.
이정한 협회장은 2022년 1월 1일 3년 임기의 협회장이 됐다. 금속 자재 가공·유통 기업 ㈜비와이인더스트리 대표인 그는 1988년 작은 철재상으로 시작한 사업을 30여 년 만에 매출 100억원대 중소기업으로 키웠다. 여성을 보기 힘든 해당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그가 협회장이 된 뒤 처음 한 일은 두 달에 걸쳐 울산·광주·제주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13곳의 여성기업을 방문한 것. 현장의 애로 사항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3월 7일 대선을 이틀 앞두고 이 협회장을 만나 현장에서 얻은 여성기업 발전 방안에 대해 물었다.
현장에 생동감이 있어야 그 기업이 살아요. 대부분의 여성기업은 규모가 작아 혁신에 어려움을 겪어요. 회사를 다녀보면 이 현장에는 없고 저 현장에는 있는 게 있죠. 그런 기업들을 서로 매칭해주면 시너지 효과가 크더라고요.
최근 다닌 현장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으셨나요.
경영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이 많아요.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 주52시간근무제 도입 등의 영향이죠. 중소기업은 고정된 물량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오더가 떨어지면 두세 달간 특근이나 야근을 해서 기한을 맞추는 구조입니다. 지금은 주52시간근무제에 묶여 이게 안 되죠. 도리 없이 대체인력을 동원하는데, 외부 용역은 업무 숙련도가 떨어져 제품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워요.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이런 중소기업의 현실을 몰랐던 거죠. 현장에서는 근로자와 경영진이 협의해 바람직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인터뷰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여성기업정책실 신설’을 포함한 여성기업정책 정책제안집을 만들어 전달한 것으로 압니다.
현재 여성기업이 277만 곳에 달해요. 수는 많지만 규모나 매출 면에서는 절대 다수가 ‘소기업’에 해당합니다. 기술 수준이 낮은 곳이 많고요. 여성기업을 위한 정책이 별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홍보 문제도 있어요. 과거 여성기업을 위한 R&D(연구개발) 예산이 별도로 존재한 때도 있는데, 참여 부족으로 지금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성기업을 위한 ‘수의계약 한도 현실화’도 요구하고 계시죠.
현행 법률에 따르면 공공기관 및 지방공기업은 여성기업의 용역·물품에 대해 최대 1억원까지 수의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어요. 물품 구매 담당 부서에서 “좋은 물건”이라며 수의계약을 하려 해도 감사실 등이 나서 막기 일쑤죠. 아예 수의계약을 안 해주려 하거나 한도를 낮춰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남성이 대표로 있는 기업들은 왜 여성기업에만 특혜를 주느냐고 반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남성이 기득권으로 살아온 현실은 부정할 수 없어요. 똑같이 영업에 나서도 여자 대표는 만남의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요. 남자끼리는 술 한잔하고 형 동생하면서 속을 털어놓기도 쉽잖아요. 그 과정에서 계약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여성기업은 아무래도 불리한 점이 있죠.
이 협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건 생계를 직접 꾸려야 했기 때문. 그는 당시 서울 문래동에 있는 철재상들이 큰돈을 버는 걸 보고 작게나마 철재상을 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철재상 운영을 시작하면서 엄마이기를 포기했죠.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인데, 아침에 불을 때놓고 나와도 일을 마무리하고 들어갈 때면 이미 열기가 다 사그라진 뒤였어요. 차디찬 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보기 일쑤였죠. 아들이 학교에서 전화를 해도 항상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고 했고요. 아들이 아파서 수술을 받을 때도 제가 병원에 못 갔어요. 항상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죠.”
어떻게 버티셨나요.
사업에 친정 식구들 돈이 들어가 있었어요. 망하면 나 혼자가 아니라 집안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니 그만둘 수 없었죠. 밤낮 할 거 없이 트럭을 몰고 다니며 일을 했어요.
젊은 여성을 보기 드문 분야에서 일하셨으니, 그로 인해 느낀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어요. 누구든 나이를 물어보면 50대라고 했고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그런 거죠. 그때 봤던 거래처 이사님들이 이제는 70~80대예요. 그분들을 만나면 30년 전에도 50대라더니 아직도 50대냐고들 하시죠. 당시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와서 50대라고 하는 게 너무 웃겼다고 하시고요. 이제는 어디를 가나 제가 나이 든 축에 속해요. 아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도 하고요. 엄마처럼 시원한 차도 갖다 주고 하면서 막 앉아 개기는 거죠(웃음).
여성이 드문 업계에서 30년간 고군분투해 사업을 일군 그의 말투는 시원시원했다.
“이것만큼은 남자보다 잘한다” 자신하는 게 있나요.
우리는 거짓말 안 해요(웃음). 시쳇말로 “부항기가 없다”고 해요. 철재상을 하다 IMF 외환위기가 지나고 업종을 금속 임가공으로 바꿨을 때였어요. 협력 업체에서 재료가 되는 금속판을 100장 정도 받아왔어요. 딴 데서는 제품을 만들 때 100장이 필요하다고 했대요. 그런데 우리 직원들이 일을 해보니까 10장이 남는 거예요. ‘부항기 있는’ 남자 사장들은 그렇게 남은 걸 자기네들이 팔았나 봐요(웃음). 나는 안 그랬죠. 직원들한테 돌려주라고 했어요. 그렇게 신뢰가 쌓이기 시작한 거죠. 전국에 금속 임가공을 하는 여자는 나 하나일 때 얘깁니다.
요즘에는 젊은 여성 창업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지난해 협회에서 창업 경진 대회를 열었는데 1300명이 왔더라고요. 요새 젊은 여성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아요. 기술력도 뛰어나고 틈새시장도 노릴 줄 알죠.
창업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당당해라. 그리고 멋지게 밀고 나가라.”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철재상을 창업하기 전 ‘이정한’은 어땠을까. 그는 하루에 버스가 세 번 다니는 충남 아산시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학창 시절 꿈은 노벨문학상을 탄 뒤 현충사 길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그는 무협지를 출간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중국 무협지가 크게 유행했는데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자연스럽게 고치는 일을 했다. 직접 무협지를 쓰기도 했다. 1988년 철재상 운영을 시작한 뒤에도 글은 놓지 못했다. 1990년 제8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산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꿈은 아직 유효한가요.
이제는 기업인으로서, 특히 여성 기업인으로서 겪었던 일에 대한 대하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협회장으로서의 목표는 뭔가요.
깔깔 웃음소리가 새어나가는 협회를 만들고 싶어요. 여성기업 대표들이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별로 없거든요. 여성기업인 상당수는 엄마이면서 동시에 기업 경영자예요. 가슴앓이할 일이 많죠. 협회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 위로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돌아보면 한때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일이 적잖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죽고 살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죠. 우리 협회엔 저처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가 많으니까 지금 힘겨운 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어요.
인터뷰를 지켜보던 협회 직원은 “협회장님이 평소에도 카운슬러 역할을 도맡아 하신다”며 “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이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기업인들이 신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일한 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어야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간담회에 간 적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도 우리 기업이 당신들이 위장 취업했던 19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줄 알더라고요. 전혀 아니에요. 지금은 근로자 모시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요. 대표가 어떤 일을 하자고 제안해도 직원들이 “못 한다”고 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중소기업인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보시나요.
그때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기업 대표들은 정치인들에게 “잘한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화딱지’ 났죠. 아무래도 매출 100억원 이상 규모인 기업은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기 어려워요. 매출이 30억원에서 100억원 사이인, 그러니까 진짜 힘든 기업들 목소리를 들어야죠.
이 협회장은 마지막으로 “중소기업 직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다니는 직원들은 회사에서 저리로 주택자금을 빌릴 수 있잖아요. 이런저런 혜택이 많죠. 중소기업 직원들은 그런 데서 소외돼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중소기업에 10년 이상 근무했으면 국가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됐겠어요. 이런 분들한테 국가에서 보상을 해줘야 해요. 중소기업에서 일한 햇수를 바탕으로 공무원 선발 때 가점을 주는 방안도 생각해봤어요. 요즘 시험 준비하는 학생이 좀 많나요. 중소기업 처지에서는 인력을 확보하고 젊은이들은 돈 벌면서 공부도 하는 거죠.”
#여성기업 #여성창업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사진제공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이정한(61)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의 말이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이하 협회)는 1999년 제정된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여성기업지원법)’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법정 여성 경제 단체. 동법의 여성기업은 여성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회사를 뜻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여성기업은 약 277만 곳. 협회는 이들의 경쟁력 강화 및 여성 창업 활성화 지원 업무를 담당한다.
이정한 협회장은 2022년 1월 1일 3년 임기의 협회장이 됐다. 금속 자재 가공·유통 기업 ㈜비와이인더스트리 대표인 그는 1988년 작은 철재상으로 시작한 사업을 30여 년 만에 매출 100억원대 중소기업으로 키웠다. 여성을 보기 힘든 해당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그가 협회장이 된 뒤 처음 한 일은 두 달에 걸쳐 울산·광주·제주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13곳의 여성기업을 방문한 것. 현장의 애로 사항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3월 7일 대선을 이틀 앞두고 이 협회장을 만나 현장에서 얻은 여성기업 발전 방안에 대해 물었다.
“정책입안자가 현실을 몰라”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현장에 생동감이 있어야 그 기업이 살아요. 대부분의 여성기업은 규모가 작아 혁신에 어려움을 겪어요. 회사를 다녀보면 이 현장에는 없고 저 현장에는 있는 게 있죠. 그런 기업들을 서로 매칭해주면 시너지 효과가 크더라고요.
최근 다닌 현장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으셨나요.
경영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이 많아요.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 주52시간근무제 도입 등의 영향이죠. 중소기업은 고정된 물량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오더가 떨어지면 두세 달간 특근이나 야근을 해서 기한을 맞추는 구조입니다. 지금은 주52시간근무제에 묶여 이게 안 되죠. 도리 없이 대체인력을 동원하는데, 외부 용역은 업무 숙련도가 떨어져 제품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워요.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이런 중소기업의 현실을 몰랐던 거죠. 현장에서는 근로자와 경영진이 협의해 바람직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인터뷰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여성기업정책실 신설’을 포함한 여성기업정책 정책제안집을 만들어 전달한 것으로 압니다.
현재 여성기업이 277만 곳에 달해요. 수는 많지만 규모나 매출 면에서는 절대 다수가 ‘소기업’에 해당합니다. 기술 수준이 낮은 곳이 많고요. 여성기업을 위한 정책이 별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홍보 문제도 있어요. 과거 여성기업을 위한 R&D(연구개발) 예산이 별도로 존재한 때도 있는데, 참여 부족으로 지금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성기업을 위한 ‘수의계약 한도 현실화’도 요구하고 계시죠.
현행 법률에 따르면 공공기관 및 지방공기업은 여성기업의 용역·물품에 대해 최대 1억원까지 수의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어요. 물품 구매 담당 부서에서 “좋은 물건”이라며 수의계약을 하려 해도 감사실 등이 나서 막기 일쑤죠. 아예 수의계약을 안 해주려 하거나 한도를 낮춰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남성이 대표로 있는 기업들은 왜 여성기업에만 특혜를 주느냐고 반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남성이 기득권으로 살아온 현실은 부정할 수 없어요. 똑같이 영업에 나서도 여자 대표는 만남의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요. 남자끼리는 술 한잔하고 형 동생하면서 속을 털어놓기도 쉽잖아요. 그 과정에서 계약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여성기업은 아무래도 불리한 점이 있죠.
“당당해라, 그리고 멋지게 밀고 나가라”
그의 설명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3월 14일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1 여성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영상 어려움을 느끼는 분야 1위가 ‘판매선 확보 등 마케팅 관리’(48.6%)였다. 남성 기업인에 비해 여성 기업인이 불리하다고 느끼는 점에 대한 질문에는 ‘일과 가정 양립 부담’(26.3%)이라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1988년 경기도 안산시의 약 17㎡(약 5평)짜리 공간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 협회장도 이 부분에서 아들에게 미안한 점이 많다고 했다.이 협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건 생계를 직접 꾸려야 했기 때문. 그는 당시 서울 문래동에 있는 철재상들이 큰돈을 버는 걸 보고 작게나마 철재상을 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철재상 운영을 시작하면서 엄마이기를 포기했죠.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인데, 아침에 불을 때놓고 나와도 일을 마무리하고 들어갈 때면 이미 열기가 다 사그라진 뒤였어요. 차디찬 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보기 일쑤였죠. 아들이 학교에서 전화를 해도 항상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고 했고요. 아들이 아파서 수술을 받을 때도 제가 병원에 못 갔어요. 항상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죠.”
어떻게 버티셨나요.
사업에 친정 식구들 돈이 들어가 있었어요. 망하면 나 혼자가 아니라 집안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니 그만둘 수 없었죠. 밤낮 할 거 없이 트럭을 몰고 다니며 일을 했어요.
젊은 여성을 보기 드문 분야에서 일하셨으니, 그로 인해 느낀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어요. 누구든 나이를 물어보면 50대라고 했고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그런 거죠. 그때 봤던 거래처 이사님들이 이제는 70~80대예요. 그분들을 만나면 30년 전에도 50대라더니 아직도 50대냐고들 하시죠. 당시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와서 50대라고 하는 게 너무 웃겼다고 하시고요. 이제는 어디를 가나 제가 나이 든 축에 속해요. 아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도 하고요. 엄마처럼 시원한 차도 갖다 주고 하면서 막 앉아 개기는 거죠(웃음).
여성이 드문 업계에서 30년간 고군분투해 사업을 일군 그의 말투는 시원시원했다.
“이것만큼은 남자보다 잘한다” 자신하는 게 있나요.
우리는 거짓말 안 해요(웃음). 시쳇말로 “부항기가 없다”고 해요. 철재상을 하다 IMF 외환위기가 지나고 업종을 금속 임가공으로 바꿨을 때였어요. 협력 업체에서 재료가 되는 금속판을 100장 정도 받아왔어요. 딴 데서는 제품을 만들 때 100장이 필요하다고 했대요. 그런데 우리 직원들이 일을 해보니까 10장이 남는 거예요. ‘부항기 있는’ 남자 사장들은 그렇게 남은 걸 자기네들이 팔았나 봐요(웃음). 나는 안 그랬죠. 직원들한테 돌려주라고 했어요. 그렇게 신뢰가 쌓이기 시작한 거죠. 전국에 금속 임가공을 하는 여자는 나 하나일 때 얘깁니다.
요즘에는 젊은 여성 창업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지난해 협회에서 창업 경진 대회를 열었는데 1300명이 왔더라고요. 요새 젊은 여성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아요. 기술력도 뛰어나고 틈새시장도 노릴 줄 알죠.
창업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당당해라. 그리고 멋지게 밀고 나가라.”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철재상을 창업하기 전 ‘이정한’은 어땠을까. 그는 하루에 버스가 세 번 다니는 충남 아산시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학창 시절 꿈은 노벨문학상을 탄 뒤 현충사 길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그는 무협지를 출간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중국 무협지가 크게 유행했는데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자연스럽게 고치는 일을 했다. 직접 무협지를 쓰기도 했다. 1988년 철재상 운영을 시작한 뒤에도 글은 놓지 못했다. 1990년 제8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산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꿈은 아직 유효한가요.
이제는 기업인으로서, 특히 여성 기업인으로서 겪었던 일에 대한 대하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협회장으로서의 목표는 뭔가요.
깔깔 웃음소리가 새어나가는 협회를 만들고 싶어요. 여성기업 대표들이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별로 없거든요. 여성기업인 상당수는 엄마이면서 동시에 기업 경영자예요. 가슴앓이할 일이 많죠. 협회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 위로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돌아보면 한때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일이 적잖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죽고 살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죠. 우리 협회엔 저처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가 많으니까 지금 힘겨운 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어요.
인터뷰를 지켜보던 협회 직원은 “협회장님이 평소에도 카운슬러 역할을 도맡아 하신다”며 “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이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중소기업 재직자, 공무원시험 가점 주자”
5월 출범하는 새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기업인들이 신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일한 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어야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간담회에 간 적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도 우리 기업이 당신들이 위장 취업했던 19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줄 알더라고요. 전혀 아니에요. 지금은 근로자 모시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요. 대표가 어떤 일을 하자고 제안해도 직원들이 “못 한다”고 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중소기업인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보시나요.
그때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기업 대표들은 정치인들에게 “잘한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화딱지’ 났죠. 아무래도 매출 100억원 이상 규모인 기업은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기 어려워요. 매출이 30억원에서 100억원 사이인, 그러니까 진짜 힘든 기업들 목소리를 들어야죠.
이 협회장은 마지막으로 “중소기업 직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다니는 직원들은 회사에서 저리로 주택자금을 빌릴 수 있잖아요. 이런저런 혜택이 많죠. 중소기업 직원들은 그런 데서 소외돼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중소기업에 10년 이상 근무했으면 국가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됐겠어요. 이런 분들한테 국가에서 보상을 해줘야 해요. 중소기업에서 일한 햇수를 바탕으로 공무원 선발 때 가점을 주는 방안도 생각해봤어요. 요즘 시험 준비하는 학생이 좀 많나요. 중소기업 처지에서는 인력을 확보하고 젊은이들은 돈 벌면서 공부도 하는 거죠.”
#여성기업 #여성창업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사진제공 한국여성경제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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