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동아 로고

LifeStyle interview

미국 메릴랜드주 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 딸 셋 둔 싱글맘에서 아메리칸드림 이루기까지

글 정혜연 기자

입력 2021.11.05 10:30:01

전남 나주 양계장 집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대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박유미. 미국으로 건너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끝에 결국 화가의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한국인 최초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유미 호건은 이제 고통 받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하는 삶을 꿈꾼다.
2014년 11월 4일, 미국 동부 메릴랜드 주지사에 래리 호건이 당선되면서 한인 이민 역사 1백12년 만에 최초의 한인 퍼스트레이디가 탄생했다. 수백 명의 유권자 앞에 감사 인사를 전하는 주지사 옆에는 아내 유미 호건(62)이 있었다.

당선 직후부터 유미 호건은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래리 호건 주지사 취임 1백 일 만에 볼티모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년이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구금됐다가 목숨을 잃자 폭동이 일었다. 약탈과 방화로 피해를 입은 가게가 2백여 곳이 넘었고, 절반 이상이 한인 가게였다. 당시 유미 호건 여사는 설명회를 열고 구제 방안을 논의하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5년 5월, 주지사의 아시아 첫 해외 순방 때는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해 메릴랜드와 협력 관계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또한 메릴랜드주 소수계 이민자들의 어려움을 낮은 곳에서부터 살피며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애써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유미 호건 여사는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가졌지만 강한 마음을 지녀 2015년 6월 남편에게 닥친 큰 위기도 기적적으로 이겨냈다. 래리 호건 주지사는 당선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혈액암 3기 판정을 받았고, 메릴랜드 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유미 호건 여사는 주지사의 연설을 대신하는 등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병상을 한결같이 지키며 간호한 끝에 반년 만에 완치 판정을 이끌어냈다. 메릴랜드 주민들은 4년 뒤 열린 주지사 선거에서 병마를 딛고 일어선 래리 호건에게 표를 던졌고, 그는 재선에 성공했다.

유미 호건 여사가 미국 내에서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코로나19 팬데믹 직후였다. 2020년 3월 메릴랜드주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뒤 사흘 만에 확진자 수가 급속히 늘자 진단 키트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그녀는 한국의 진단 키트를 살펴봤다. 유미 호건 여사는 메릴랜드주 코로나19 대응팀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시에 한국 정부 핵심 인사와의 연락을 타진했고, 3월 말 전세기를 띄워 50만 회 검사 분량의 한국산 진단 키트를 공수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미국에서 한인 퍼스트레이디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유미 호건 여사는 지난 9월 30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 에세이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면’(봄이아트북스)을 한국에서 출간했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험난한 청년기를 보내고 퍼스트레이디로서 살아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예순둘 평생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 있다. 유미 호건 여사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지난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나주 토박이 박유미, 아메리칸드림 안고 미국으로

2016년 암 완치 판정을 받고 기자 회견을 연 래리 호건 주지사. 왼쪽에 첫째 딸 킴 가족, 오른쪽에 둘째 딸 제이미 가족과 유미 호건 여사가 함께 했다.

2016년 암 완치 판정을 받고 기자 회견을 연 래리 호건 주지사. 왼쪽에 첫째 딸 킴 가족, 오른쪽에 둘째 딸 제이미 가족과 유미 호건 여사가 함께 했다.

유미 호건 여사는 전남 나주 공산면에서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영산강이 가로지르는 나주평야에 터를 잡고 있어 몸만 부지런하면 배곯을 일이 없던 마을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자식 교육에 엄격하고 부지런해 큰 부자는 아니어도 마을에서 꽤 규모 있는 살림살이를 꾸리던 분들이었다. 마을에 양계업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그녀의 집안도 양계장을 시작했고, 그녀는 전보다 더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할머니부터 스무 살 안팎으로 나이 차가 나는 오빠들까지, 대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은 유미 호건 여사는 덕분에 구김살 없이 자랐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름답고, 포근하고, 재미있는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가족들이 매끼 함께 모여 식사하고, 잠도 같이 자며 서로의 온기로 따뜻한 밤을 보냈어요. 형제자매는 물론 친구들과 시골의 자연 속에서 맘껏 뛰놀며 자랐습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큰오빠와 큰올케 언니, 다른 언니들이 부모님처럼 절 돌봐줬죠. 특히 어머니가 베틀로 색색의 명주실을 짜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 모든 유년의 추억들이 제 예술 세계의 원천이 되었죠. 제가 받은 사랑이 저를 긍정적이고, 남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서도 미술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자신의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친구들의 그림을 도와주곤 했다고. 그럴 때면 친구들은 “화가가 그린 그림 같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그녀에게 “미술 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계속 그리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 말은 유미 호건 여사의 마음에 씨앗으로 깊이 뿌리내려 훗날 미국에서 미대에 진학해 화가로 자리 잡는 데 한몫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 강북구 수유리로 전학한 유미 호건 여사는 부모 지인의 집에서 하숙하며 가족처럼 지냈다. 어느 날 수유리 어머니 생신을 맞아 친구들이 집에 들러 “미국에서 온 누구의 아들이 스물네 살인데 색시를 찾는다”는 얘기를 전했고, 수유리 어머니는 그녀에게 “시집가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는 건 어떠냐”고 의견을 물었다. 미국행 제안에 솔깃한 유미 호건 여사는 그 남자에게 네 살 난 딸이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않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무 살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민 가방 3개를 들고 도착한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은 나주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다행히 시댁 식구가 마을에서 여러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힘들었죠. 한국의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울기도 많이 울고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왔지만 ‘이게 정말 현실인가’ 하고 되물을 정도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책임을 다하며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그 당시는 힘들었지만 어려운 순간을 잘 견뎠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이겠죠.”

피가 섞이지 않은 첫째 딸 킴과는 시간이 갈수록 친딸 이상으로 깊은 정이 들었다. 해가 바뀌고 둘째 제이미를 낳은 유미 호건 여사는 술과 도박에 빠져 부양 의지를 잃은 남편을 이끌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LA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고 어렵사리 이혼을 결정했다. 서류상 이혼했지만 최소한 재결합 시도를 해야겠다 싶어 노력하던 중 셋째 줄리가 생겼고, 자녀가 늘었음에도 변하지 않는 남편과는 완전히 헤어졌다.

유미 호건 여사는 만삭의 몸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20대 시절을 묵묵히 버텼다. 30대 초반, 그녀는 지인의 추천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기에 좋다는 동부 메릴랜드 하워드 카운티로 대륙을 가로질러 이사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과 희생에 부응하듯 세 딸은 훌륭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늘 엄마 편이던 든든한 맏딸 킴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지원해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군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 일찌감치 가정을 꾸렸고, 제대 후 로펌에 취직해 오피스 매니저로 일하며 워킹맘으로 지내고 있다. 둘째 제이미는 활발하고 씩씩한 성격으로 고등학교 학생회장에 선출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공부도 잘해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했다고.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한 제이미는 현재 주 검사로 근무하며 가정을 꾸렸다. 막내 줄리 역시 언니 뒤를 이어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과 결혼해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제가 힘들게 지내며 고생한 걸 알기 때문에 저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학사 학위를 받았을 땐 세 딸 모두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해줬어요. 뒤돌아보면 엄마로서 항상 부족했고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한데 아이들이 잘 자라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하죠. 물론 모든 모녀간이 그렇듯 저희도 가끔은 의견 충돌이 있어요. 특히 저는 이민 1세대, 아이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2세대이니 문화와 세대 차이도 느끼고 투닥거리기도 하죠. 하지만 성년이 되어서는 저를 참 잘 이해해줘요.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온 동지 같은 느낌도 있고…. 모녀간 재미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여느 어머니, 딸들과 다름없답니다.”

화가의 꿈 이루고, 운명같이 새 가정도 꾸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위치한 주지사 관저 내 역대 퍼스트 레이디 초상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유미 호건 여사.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위치한 주지사 관저 내 역대 퍼스트 레이디 초상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유미 호건 여사.

미국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화가가 되겠다는 20대 시절의 꿈은 한동안 그녀에게 사치였다.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행을 선택했지만 바라고 원하던 장밋빛 인생이란 없었다. 그러나 싱글맘으로 세 딸을 잘 키우는 것에 모든 걸 쏟아붓는 중에도 유미 호건 여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LA 이주 후 아이들의 큰아버지가 다시 텍사스로 불러 가게 운영을 부탁했고, 그 와중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유미 호건 여사는 1990년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메릴랜드로 이주한 후에는 메릴랜드 예술디자인대학에 편입해 2년간 미술을 공부하고 1995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워싱턴 D.C.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유미 호건 여사는 조교로 일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모교인 메릴랜드 예술디자인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정확하게 내가 언제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을지, 아티스트로 데뷔할 수 있을지 그런 걸 구체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불확실한 나날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 마음속 깊은 곳엔 항상 꿈이 자리 잡고 있었고, 먼 훗날 꿈을 이룰 것이라는 데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잘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꿈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요.”

2000년 하워드 카운티의 한 갤러리 그룹전에 미국 작가들과 참여했을 당시 그녀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녀에게 명함을 건넨 미국인 훈남의 이름은 래리 호건. 일하느라 혼기를 놓친 평범한 부동산 사업가였다. 유미 호건 여사는 만날수록 진중한 면모를 보이며 자상하게 자신의 세 딸을 대하는 그에게 믿음이 갔다고. 2004년 5월, 두 사람은 양가 가족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 만난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요. 부동산 사업가라고 명함을 주고 갔었는데, 그 사람과 이렇게 20년 세월을 함께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죠.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제 삶은 아이들이 최우선이었거든요. 교제를 망설였는데 만나보니 저를 잘 이해해주고, 무엇보다 제 딸들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끌렸어요. 남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옆에서 의지가 되고자 했던 날들, 딸들에게 허락받는 과정 등을 거치면서 내가 남은 인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요.”

그때까지 유미 호건 여사는 자신이 정치인의 아내가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2010년 새해가 되자 남편은 “주지사 선거에 나가보고 싶다”며 그녀에게 의사를 물었다. 아일랜드계 이민 노동자 출신인 시아버지 로렌스 호건이 연방 하원 의원으로 일하던 당시 남편이 아버지를 곁에서 도왔는데, 그 역시 정치에 뜻을 품고 있었던 것. 래리 호건 주지사가 메릴랜드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 그때부터 유미 호건 여사는 팔을 걷어붙이고 남편의 선거 캠페인을 도왔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정치인의 아내로 사는 일이 힘들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힘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남편이 마음을 정한 이후로는 묵묵히 무조건 도왔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제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 뒷바라지에 대해 일일이 나열하자면 몇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아요. 그저 제가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함께했습니다.”

2014년 당선 후 정치인으로 포문을 열었던 래리 호건 주지사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2015년 혈액암 3기 판정을 받았을 때 유미 호건 여사의 충격은 누구보다 컸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크나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잃을까 겁나고, 슬퍼하시는 시아버님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어요. 무엇보다 큰 비전을 갖고 이제 막 주지사 임기를 시작한 남편이 흔들릴까 걱정했고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견딜 수 있는 시련을 주셔서 저와 남편 그리고 우리 가족이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고, 오늘날까지 오게 된 거라 생각해요. 남편의 완치를 위해 함께 노력해준 병원 의료진, 메릴랜드 주민들, 기도해주신 분들께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해요.”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퍼스트레이디

지난 3월 미국 엘리콧 시티에서 일어난 반아시아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유미 호건 여사 모습.

지난 3월 미국 엘리콧 시티에서 일어난 반아시아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유미 호건 여사 모습.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신을 지키며 신앙의 힘으로 자녀 셋을 홀로 멋지게 키워낸 어머니이자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라는 직업을 성취한 여성, 그리고 뜻하지 않았지만 미국 51개 주 가운데 동부의 역사 깊은 메릴랜드주 퍼스트레이디가 된 유미 호건 여사는 2015년 5월, 남편을 따라 떠난 아시아 첫 순방길에서 한국 땅을 밟던 때를 잊지 못한다.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나의 소중한 뿌리’라는 생각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어요. 때문에 한국 순방길에 오르면서 내가 과연 고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어깨가 무거웠어요. 도착한 순간 환영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힘과 용기를 더 얻었고, 다행히 트레이드 미션(무역 사절단)을 잘 마치고 좋은 성과를 갖고 돌아올 수 있었고요. 그리고 이어서 2017년 한국 방문 때는 저 혼자 트레이드 미션을 이끌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한국 방문 때마다 항상 뿌듯했습니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 지내며 자신의 이름을 딴 비영리 봉사활동 단체 ‘유미케어스(Yumi C.A.R.E.S.(You and me Children’s Artwork for Recovery, Empowerment and Strength)’를 설립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1927년에 설립된 ‘장애인을 위한 연맹’에서 미술 수업을 진행하고, 아나폴리스의 ‘웰니스 하우스’를 방문해 암 환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과 아이들이 머무는 쉼터 ‘새라 하우스’에 선물을 보내고, 노숙하는 참전 용사들의 쉼터인 ‘사우스 볼티모어 스테이션’에 직접 불고기샌드위치를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 전역에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녀는 CNN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를 보내 혐오 반대 운동의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편이 주지사 활동으로 바쁠 때, 저는 ‘메릴랜드의 어머니’로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밉니다. 암 환자들, 가정 폭력의 희생자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퇴역 군인들, 집이 없는 사람들 등을 찾죠. 남편이 암 투병할 때 만났던 다른 환자들에게 미술 치료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유미케어스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현재는 메릴랜드 소아 병원에서 운영하는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미처 다 살피지 못하는 부분을 아티스트, 선생님, 엄마, 할머니로서 채워주고자 노력해요.”

메릴랜드주 퍼스트레이디로 지내온 시간도 벌써 7년. 그녀는 남편의 퇴임을 1년여 남기고 관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메릴랜드 주지사 관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데이비드슨빌이라는 동네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유미 호건 여사는 자신이 산증인이 돼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퇴임 이후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아티스트, 미술 선생님으로 돌아가 본분을 다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지난 7년 넘게 손주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으니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함께하고 할머니로서 돌봐주며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고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제대로 안부 인사를 나누지 못한 제 주변의 모든 고마운 분들과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도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속적으로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특히 유미케어스를 통해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차세대를 응원하며 도와주는 일 등을 겸손한 자세로 계속하고 싶습니다.”

2004년 5월 결혼식을 올린 래리 호건 주지사와 유미 호건 여사.

2004년 5월 결혼식을 올린 래리 호건 주지사와 유미 호건 여사.

사진제공 유미 호건



여성동아 2021년 11월 695호
좋아요

Print Edition

How to be a woman

생각하는 여자가 읽는 매거진!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번호목차이번 호 구입하기

독자알림

더보기

Follow up on SNS

여성동아 에디터가 핫뉴스, 최신 트렌드와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전해 드립니다.

  • 여성동아 페이스북
  • 여성동아 인스타그램
  • 여성동아 유튜브
  • 여성동아 네이버포스트
  • 여성동아 네이버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