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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조금씩, 나의 작사 일지

프로 직장인 다이어리

문혜민 작사가

입력 2022.12.17 10:00:01

“그런 사람들 있잖아. 나도 그중 하난가 봐. 왜, 하겠다는 의지만 갖고 이룰 수 없는 헛꿈만 꾸는.” 영화 ‘라라랜드’에서의 엠마 스톤 대사다. 2016년 겨울, 영화관에서 이걸 듣는 순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작사가가 되고 싶었던 나 역시도 어쩌면 재능은 없는데 열정만 가득한 사람 중 하나인 건 아닐까 겁이 났다. 
I will be okay
I will find the way
더 이상 추락 따윈 나에겐 의미 없어
- 태연 ‘Find Me’ 중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본업이고 작사는 부업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시작은 작사가 먼저였다. 대학에 다니던 2014년, 국문학이라는 전공을 살릴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좋아하는 노래와 내 전공을 결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작사가 되는 법’ ‘작사 학원’ 등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다. 하나에 꽂히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포털 사이트 제일 상단에 나왔던 작사 학원에 상담 문의를 했고, 수강 신청을 했다.

작사를 배우는 과정은 대입 논술을 배우는 과정과 비슷했다. 틀은 정해져 있지만, 가사의 내용을 꾸려가는 건 내 몫이다. 이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100개가 넘는 가사를 썼고, 마침내 태연 1집의 ‘날개 (Feel So Fine)’라는 노래가 나왔다. 작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그려만 왔던 지금 내 모습
아직 난 믿기지 않아
쏟아지는 햇살 스치는 바람
Just realize I feel so fine
- 태연 ‘날개 (Feel So Fine)’ 중


그랬다. 작사가를 꿈꾸던 나의 비전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그것도 제출하는 시안이 계속 채택되지 않아 재능을 의심하던 시점에. 더군다나 내가 고민했던 꿈과 자아에 대한 성찰이 주된 내용이라 더 뿌듯한 감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가사가 너무 좋다”는 반응을 보며 감동하고 댓글을 남겨준 분들께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데뷔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데뷔만 하면 손쉽게 작사가의 세계로 진입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작사를 배우는 과정이 논술을 배우는 과정과 비슷했다면, 가사를 써서 제출하는 과정은 자기소개서를 쓰는 과정과 같았다. 하나하나의 시안은 각기 다른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처럼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이전의 합격 여부는 심사 기준이 아니다.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하면 회계사가 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변호사가 돼 미래를 보장받는데 작사가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 발매된 가사가 있다고 해도 매번 새롭게 평가받아야 했다. 이 사실이 나를 너무 지치게 했고, ‘날개’ 이후에 또 100곡 정도의 가사를 쓰다가 다시 슬럼프를 겪게 됐다.

그리고 첫 취업을 했다. 작사 경험을 살려 한 엔터테인먼트사 인사팀으로 입사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작사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뗐다. 잘된 일이라 생각했지만, 가슴 한편에 미련이 남았다.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작사 학원으로 돌아갔지만 몇 달 다니지 않고 나왔다. 이젠 정말 작사를 그만두어야겠다 싶은 시점이었다. 그러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태연을 담당하시는 분이 ‘날개’의 이력을 보고 연락해왔다. 열심히 썼다. 나에겐 태연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아티스트니까. 아니, 사실 모두가 욕심내는 아티스트니까.

‘Find Me’의 데모 버전을 받았을 때 자아와 관련된 가사로 써도 되나 고민했다. 이전 내가 썼던 ‘날개’ 역시 스스로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셉트를 달리했다. ‘날개’를 쓸 때는 막 날아오르기 시작한 여린 나비를 연상했다면, ‘Find Me’는 하늘 높이 힘껏 비상하는 파랑새를 떠올리게 그려냈다.

I don’t care 닿을 수 없대도
이 바람결에 날 맡기며
자유로운 새들처럼
저 쏟아진 빛을 향해 내디뎌
- 태연 ‘Find Me’ 중


당시 재취업 준비를 하고 있던 나의 비장한 마음을 반영하기도 했다. 서류 탈락, 인적성 시험 탈락, 면접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괜찮다고, “더 이상 추락(탈락) 따윈 나에겐 의미 없어”라는 메시지로 나의 감정을 승화했다(태연 역시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고 말한 영상을 봤다). 자전적 가사만 쓰는 작사가로 이미지가 굳어질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반응은 좋았다. 자연스레 ‘날개’가 떠올랐다는 평도 많았다. 내 걱정은 괜한 우려였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곡을 쓸 기회는 없었다. 작사 학원에 다니지 않는 이상 곡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은 없었기 때문이다.

재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며 오픽(OPIc) 학원을 다니던 때였다. 한 퍼블리싱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계약되어 있는 곳이 없다면 계약하자는 연락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계약했고, 이달의 소녀의 ‘숨바꼭질 (Hide & Seek)’이라는 가사를 썼다. 될 리가 없다며 기대하지 않았던 가사였는데 발매가 돼 신기했다. 작사가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다. 신경 쓰고 공들여서 쓰면 채택이 안 되고, ‘이게 된다고?’ 싶은 것들이 될 때가 있다고. ‘숨바꼭질’은 나에게 후자의 케이스다. 그렇다고 ‘숨바꼭질’이 맘에 안 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발매되면 어떻게 썼든 간에 다 ‘소중한 내 새끼’가 된다.

작사가는 고상한 직업이 아니다

문혜민 작사가가 일하는 모습.

문혜민 작사가가 일하는 모습.

회사에 근무하면서 작사를 겸하는 것. 낮에 일하고 밤에 글을 쓰는 ‘주경야서’의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시안이 몰릴 때는 주말도 없다. 많은 사람이 작사가에 대한 환상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작사가란 고상하게 글을 쓴 다음 작곡가에게 가사를 넘기는 직업이 아니다. 주어진 데모에, 주어진 데드라인을 맞추며 노랫말을 쓰는 직업이다. 사실 작곡가나 가수는 만나지도 못한다. 심지어 엔터테인먼트의 A&R(Artist & Repertoire·음반 기획 부서) 관계자와도 메일을 통해 가사나 요청 사항을 주고받는다. 회사 일을 마치고 컴퓨터 앞에 다시 앉으면, 작사를 그만둬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막상 곡이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쓴다. 연이은 탈락으로 이젠 진짜 포기할까 싶던 차에 소녀시대 7집 두 곡의 채택 소식이 날아들었다.

분명히 말했었지
더 멋진 나 되는 그날 갚아주겠다고
지금인 걸 I’m ready
날 Killing me killing me한 시간 돌려줄게
- 소녀시대 ‘You Better Run’ 중


소녀시대의 2010년 발매곡 ‘Run Devil Run’에서 영감을 얻어 쓴 ‘You Better Run’의 일부다. 고등학생 때 열심히 들었던 노래의 화자를 부활시켜 내 가사로 데리고 온 건 큰 도전이었다. 그 도전과 아이디어를 좋게 봐주셨는지 시안이 채택되었다. 그 외에 한 곡에 가사 시안을 여러 개 제출한 ‘Closer’ 가사도 채택됐다. 한 앨범에 2개의 가사가 실리는 것, 너무나도 큰 영광이다. 그것도 소녀시대의 노래라니. 하지만 늘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작사 학원비로 쓴 돈을 계산해본 적이 있다. 거의 중고차 1대를 뽑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 “너무 가성비가 떨어지는 직업 아니야?”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 때문에 작사를 시작하겠다는 지인들에겐 발도 들이지 말라며, 도시락 싸서 말리겠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에게 과거로 돌아가서 “작사할래, 말래?” 묻는다면 주저 없이 나는 “Yes!”라고 답할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노랫말을 만들어 낼 때의 희열, 발매되었을 때의 보람이 크니까. 남들보다 느리지만 천천히,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더 이상 추락 따윈 나에게 의미 없으니까.

#문혜민 #작사가 #직장인칼럼 #여성동아


필자 소개
밤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IT 회사를 다니는 6년 차 작사가. 태연 ‘날개 (Feel So Fine)’ ‘Find Me’, 소녀시대 ‘Closer’ ‘You Better Run’ 등을 썼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문혜민



여성동아 2022년 12월 7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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