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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젠지’가 ‘남자 팬티’ 쿨하게 입는 법

안미은 프리랜서 기자

2023. 09. 18

남성용 속옷이 일상복이 될 수 있을까. 켄달 제너, 벨라 하디드 등 트렁크 팬티를 리얼웨이에서도 멋스럽게 소화하는 잇 걸들! 찬반양론이 팽팽한 속옷의 패션화이지만 이들을 참고하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흰 티에 데님 팬츠는 스타일링의 기본이자 ‘국룰’ 아니던가. 온갖 패션 실험이 난무하던 Y2K 때에도 손바닥만 한 톱과 팬츠로 허리와 치골 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낼지언정 하의는 꼬박 챙겨 입어왔다. 하지만 최근 난도 최상 레벨의 기상천외한 패션 트렌드가 찾아왔다. 일명 노 보텀 룩(no bottom look). 하의를 입지 않고 속옷을 그대로 노출하는 팬츠리스 패션이 할리우드 잇 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냥 속옷이 아니다. 남성 속옷을 차용한 트렁크 스타일의 팬츠가 리얼웨이를 경악, 아니 장악하고 있다.

노 보텀 룩이 처음 목격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먼저 1990년과 2000년대 초반 남성 트렁크의 편안함을 예찬하는 여자들의 고백이 있었다. 통기성 좋고, 편안한 트렁크가 왜 여성용은 없는가에 대한 볼멘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집 안에서 속옷 대신 아빠나 남동생의 트렁크를 입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게 외출복으로 이어지는 패션 트렌드로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속옷 해방운동의 대안으로 트렁크가 제시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저 파자마의 변주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젠더 구분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서 여성복이 남성의 속옷으로까지 손을 뻗치게 됐다. 시작은 알렉산더왕이었다. 2017 S/S 컬렉션에서 남성 트렁크를 연상시키는 쇼츠를 처음 선보이며 관중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패션이란 본래 정반합의 원리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알렉산더왕을 시작으로 루이비통, 마가렛호웰 등 많은 브랜드에서 트렁크 패션에 동참하며 남성용 트렁크를 복서의 트렁크에 가깝게 발전시킨 지금의 복서 팬츠를 탄생시켰다. 잠깐 설명을 덧붙이자면, 복서 팬츠는 면 소재 팬티인 트렁크보다 실키하고 여유 있는 핏의 쇼츠로 니트 톱이나 카디건과 매치하는 등 여성 컬렉션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말 그대로 ‘하의 실종’이 포텐을 터트린 이번 F/W 시즌에는 더욱 많은 패션 하우스가 노 보텀 트렌드에 열을 올렸다. 톰포드와 더블렛은 로고 프린트 밴딩이 돋보이는 극사실주의적인 남성 브리프 스타일 팬티로 트렌드의 선봉에 섰다. 베이식한 톱이나 아우터와 매치해 적나라하기보단 되레 쿨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특징. 전 시즌 복서 쇼츠를 쏟아내다시피 하며 트렌드를 예고한 바 있는 미우미우는 터틀넥 스웨터, 카디건 등 상의와 같은 니트 소재와 색상의 브리프를 한 벌로 연출해 노출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

끌로에는 브리프 셋업에 가죽 소재의 바이커 재킷과 빅 백, 스니커즈 같은 아이템을 매치해 스포티한 무드를 연출했다. 가장 다양한 변형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건 돌체앤가바나다. 번쩍이는 실크 소재의 복서 팬츠부터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섬세한 레이스와 스모킹 장식의 브리프까지, 팬티의 품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그 외에 루도빅드생세르넹, 디스퀘어드2 등도 다양한 브리프 스타일로 노 보텀 트렌드를 뒤따랐다.

런웨이에 이어 리얼웨이에서도 노 보텀 패션이 인기를 얻고 있다. 젠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패션 아이콘들이 거리에서 노 보텀 룩을 시도하며 본격 트렌드 전파에 나선 것. 2023 S/S 로에베 쇼장에서 포착된 모델 카일리 제너는 화이트 톱과 브리프에 맥시 코트를 걸쳐 시크함이 가미된 언더웨어 룩을 완성했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리암 플라타우도 면 소재 복서 팬츠로 편안한 홈웨어를 연출했다. 니트 톱과 브리프에 스타킹과 하이힐로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 패션 인플루언서 카미에 샤리유의 스타일도 눈여겨보길. 그런가하면 패션계의 이단아 줄리아 폭스는 실제 판매되는 디젤의 남성용 브리프를 입고 나타나는 쇼킹함으로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화이트 톱과 재킷, 퍼 소재의 슈즈와 백으로 포인트를 주고 선글라스로 마무리한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스타일은 SNS에서 크게 화제가 되며 노 보텀 룩 부흥에 앞장섰다. 반면 벨라 하디드는 캐주얼한 복서 팬츠 스타일로 리얼웨이에서의 해답을 제시했다. 로고 티셔츠나 스웨트 셔츠에 복서 팬츠를 쇼츠처럼 입고 후드 집업, 가죽점퍼 등을 스포티하게 매치하는 식. 이때 복서 팬츠는 헐렁한 핏으로 여유 있게 연출하는 게 스타일링 팁이다.

노 보텀 트렌드에 편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여느 트렌드와 마찬가지로 반짝하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이며 패션의 규칙에 반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렁크 형태의 쇼츠 유행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경기 불황이 지속될수록 스커트 길이가 짧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장기화된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 발 우크라이나 전쟁, 환경오염 문제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한 경제 상황 속에서 노 보텀 패션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답답한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는 탈출구가 되고 있다. 누가 알까, 트렁크의 매력에 푹 빠져 남성용 속옷 가게를 드나들게 될지. 그저 열린 마음으로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게 현시대의 덕목일 테다.



#노보텀룩 #사각팬티패션 #여성동아

기획 최은초롱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미우미우 톰포드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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