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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귀공자’ 김선호의 진심 “연기 생각하느라, 힘들 겨를도 없었다”

문영훈 기자

2023. 06. 21

스크린 속 김선호가 분한 ‘귀공자’는 귀한 집 아들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변칙시킨다.콜라를 마시며 빙긋 웃는 표정으로 마르코를 쫓는 그는 ‘맑은 눈의 광인’ 그 자체다.

명품 슈트를 입고 입꼬리가 2시와 10시를 향하도록 빙긋 웃는 그가 나를 쫓아온다. 추적의 이유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6월 21일 개봉한 영화 ‘귀공자’의 줄거리를 과감히 요약하면 이렇다. ‘신세계’ ‘마녀’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의 신작이다. 자질구레한 서사는 과감히 빼버리고 추격과 액션만 옹골차게 남겼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블랙 유머는 덤이다.

불법 경기장 복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르코(강태주)는 귀공자로부터 쫓기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위해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배경을 옮기니 마르코를 추격하는 이들은 한 이사(김강우)와 윤주(고아라) 등으로 늘어난다.

연신 질주하는 이 영화에서 관객의 시선은 단연 배우 김선호(37)에게 향한다. 2009년 연극 ‘뉴 보잉보잉’으로 데뷔한 15년 차 배우지만 영화 출연은 ‘귀공자’가 처음이다. 그는 시사회 당시 “영화를 처음 봤는데, 부족한 연기를 보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 말했지만 김선호는 타이틀롤답게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박 감독에 따르면 “깔끔한 미친놈”이다. 6월 1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도 그는 옅은 긴장이 느껴졌다. 다만 영화에서처럼 깔끔한 슈트에 빙긋 웃는 미소를 장착하고 있었다.

왜 귀공자는 마르코를 쫓나

‘귀공자’ 포스터.

‘귀공자’ 포스터.

그간 영화 출연 제의는 없었나요.

사실 많지는 않았어요(웃음). 막 데뷔했을 때 오디션을 봤지만 영화 제작이 취소됐어요. 두어 번 들어온 제안은 드라마 촬영과 겹쳐서 포기해야 했고요.

박훈정 감독이 먼저 제안했다고요.

우선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저는 ‘신세계’ ‘마녀’를 너무 재밌게 봤고 감독님 팬이기도 해서 바로 만나겠다고 했죠. 굉장히 위트 있고 멋있는 분이었어요(웃음). 영화와 캐릭터에 대해 오랜 시간 설명해주셨는데, 첫 만남에 바로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드렸고 뒤에 대본을 받았습니다.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마르코를 쫓는 킬러인데 그동안 봐왔던 킬러와 다르게 위트가 있고, 영화 ‘007’ 시리즈의 특수 요원 같은 면모도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전형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지금까지 저는 주로 TV를 통해 얼굴을 알렸는데, 누아르 영화에서 갑자기 킬러를 맡으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위트가 있고 조금 특이한 캐릭터라면 관객이 설득당하는 데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영화에 귀공자 개인에 대한 서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캐릭터를 직조했나요.

대본을 받고 처음 든 의문이 ‘왜 귀공자는 마르코를 쫓을까’였어요. 영화를 본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귀공자가 원하는 걸 얻는 더 쉬운 길이 있을 것 같잖아요. 그 질문부터 시작해 귀공자의 전사에 대해 감독님께 물어봤죠. 감독님은 레퍼런스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주인공 알렉스를 언급했어요.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나쁜 건지 모르고 순수하게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그런 캐릭터를 구축해나가자”고 하셨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가 웃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해요.

촬영 과정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했다고요.

네, 맞아요. 촬영 초반에 감독님께서 지금까지 찍은 게 생각했던 것과 방향성이 조금 다르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조금 더 해봐” 하시더라고요. 대본에 없는 말이라도 상황에 맞는 것이 있으면 우선 다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OK도 잘 안 하셨어요(웃음). 뭔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죠. 저도 익숙해지니까 계속 뭘 준비하게 되더라고요. “(준비한 거) 다 했습니다” 말하고 촬영을 끝낸 적도 있고요.

카 체이싱, 총격 신, 파쿠르를 연상시키는 도보 추격까지 다양한 액션이 영화의 포인트입니다.

감독님이 두 번째 미팅 때 실제 총과 같은 무게가 나가는 가짜 총을 주셨어요. 손에 익게 하려고 계속 그걸 만졌어요. 액션 팀과 합을 맞추는 작업도 길었어요. 감독님은 리얼한 액션을 좋아하셔서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맞춘 합에서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죠. 액션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서 영화를 위해 따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박훈정 감독의 차기작 ‘폭군’에도 출연합니다.

배우를 하면서 지금처럼 다음에도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 되길 바라요. 그래서인지 차기작 출연을 제안해주셔서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제 분량은 촬영을 마쳤는데, 두 번째 작품이다 보니 서로 맞출 필요 없이 소통이 잘됐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소통에 시간이 필요했나요.

감독님과 커뮤니케이션을 맞춰가는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연출자와 배우는 서로 사는 인생이 달라서 같은 색을 보고도 누군가는 초록색이라고, 누군가는 푸른색이라고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죠. 감독님은 과묵한 편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아니야, 됐어”라고 말하세요. 배우 입장에서는 그게 속상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함께 밥도 자주 먹고 산책도 다니며 대화를 많이 해서 이제는 자연스러워졌죠.

1980: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뽑힌 강태주 배우는 어땠나요.

귀공자는 마르코를 일방적으로 쫓잖아요. 제게 대사를 하는 장면도 많지 않고요. 그런데도 태주의 눈빛과 오라가 기억에 남아요. 영어를 너무 잘해서 당연히 외국에서 살다 온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다재다능한 친구였고, 몸부터 연기까지 다 준비가 돼 있어서 제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태주가 달리는 장면이 많았는데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대단하죠.

김강우 배우가 시사회 때 아버지처럼 배우들을 챙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시사회 무대에서 그렇게 긴장할 줄 몰랐어요. 시사회 때 선배님이 챙겨주신 것처럼 현장에서도 그랬어요. 제주도에서 함께 촬영하면서 다른 배우가 등장하는 신을 많이 구경했어요. 특히 들판에 강우 선배가 등장하는 신은 모두가 지켜보며 감탄했죠. 선배가 나온 장면을 함께 돌려보기도 했고요. 촬영하기 전에 몰입을 위해 “잠깐만요” 하고 잠시 시간을 두고 들어가는데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해야지’ 생각했습니다(웃음).

“부족한 연기로 작품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고민”

김선호와 함께 ‘귀공자’에 출연한 강태주, 고아라, 김강우(왼쪽부터).

김선호와 함께 ‘귀공자’에 출연한 강태주, 고아라, 김강우(왼쪽부터).

‘귀공자’ 촬영 당시 제목은 ‘슬픈 열대’였다. 귀공자에게 쫓기는 마르코가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의 혼혈)라는 점을 부각한 제목이다. 2021년 10월 ‘슬픈 열대’의 크랭크업을 앞두고 김선호의 사생활 논란이 터졌다. 당시 박 감독과 장경익 스튜디오앤뉴 대표는 김선호를 찾았다.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요.

“할 수 있겠냐, 함께 하고 싶냐”를 먼저 물어보셨어요. 사실 저는 영화 촬영이 미뤄져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더 이상 누를 끼치기 싫었죠. 죄송한 마음이 컸고, 할 수 있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로서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는 건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래서 매 순간을 집중해야 했기에 촬영 때 심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대중의 시선이 두렵기도 한가요.

그게 무섭다면 못 했겠죠. 다만 배우로서 제 연기 때문에 작품에 누를 끼칠까 그게 우려돼요. 단점을 말해주시면 제 기준과 가치관에서 판단해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고민이 들 때면 3~4시간 걸어요.

생각이 많을 때 산책을 하나 보네요.

산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남산 코스를 많이 추천하시던데, 저는 오르막길보다는 평지가 좋아요. 도심을 걷는 게 더 좋기도 하고요. 지금 여기(서울 북촌) 근처도 꽤 걸었어요. 걷는 거 좋아한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자꾸 산에 가자고 하셔서 곤혹스럽습니다(웃음).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누아르를 해봤으니까 다시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끼리 형, 동생 하며 지내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캐릭터가 강한 걸 해봤으니 연기가 조금 늘었으려나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때의 김선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궁금해요.

연극무대에서 오래 활약한 김선호는 2017년 드라마 ‘김과장’으로 연기 폭을 넓혔다. 드라마 ‘스타트업’(2020)에서 한지평 역을, ‘갯마을 차차차’(2021)에서 ‘홍 반장’ 홍두식 역을 맡아 한국갤럽 ‘2021년 올해를 빛낸 탤런트’ 조사에서 1위에 올랐다. 김선호는 “‘귀공자’ 촬영차 태국에 갔을 때 공항에서 직원분이 ‘홍 반장’이라고 불러서 너무 신기했다”며 ‘갯마을 차차차’나 ‘스타트업’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벽을 느낄 때 연극을 찾는다”

영화와 드라마 현장은 어떻게 다른가요.

영화 현장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는 크게 다르다고 느끼진 못했어요. 제 연기를 큰 스크린으로 본다는 차이는 있지만 뭐가 좋다 안 좋다 판단은 어려워요. 다만 영화 현장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보통 한 신을 하루에 찍잖아요. 드라마는 빨리 촬영해야 하고요. 신을 고민하고 표현하는 데 배우에게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드라마, 영화 촬영을 하면서도 계속 연극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연기하다 보면 가끔 벽을 느껴요. 그럴 때 배우로서 속상해요. 인물 분석을 하면서 제가 갖고 있는 경험 같은 걸 계속 꺼내 쓴다고 생각하거든요. 드라마는 그 과정이 빨라요. 대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와 있는 경우는 드물고, 중간 이후부터는 시간 싸움이거든요. 그럼 그 선택의 과정이 점점 빨라져요. 연극을 하면 오랜 기간 한 대본으로 가잖아요. 그 과정에서 동료들에게도 많이 배우고 저 스스로도 속에 뭔가 쌓이는 느낌이에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대사를 말하지만 매번 느낌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가끔 좋은 연기가 나오거든요. 그 희열도 있고 배우, 스태프와 함께 오랜 시간을 연습하는 게 힐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연극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는 건가요. 1년에 한 번씩은 꼭 하려고 해요. 스케줄이 도저히 안 되지 않는 이상 계속할 생각입니다.

‘귀공자’ 연기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어떤 대단한 포부와 욕심은 없어요. 연기를 잘한다는 평은 기대하지도 않고요(웃음). ‘김선호가 영화도 할 수 있구나, 저런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도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생각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죠.

#김선호 #귀공자 #박훈정 #여성동아

사진제공 스튜디오앤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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