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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삼풍 붕괴 사고 생존자 '산만언니'가 전하는 참사 이후 우리가 할 일

이경은 기자

2022. 11. 28

10월 29일 밤 10시 15분, 18㎡ 남짓한 공간에서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핼러윈을 즐기러 서울 이태원을 찾은 평범한 사람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생존자 이선민 씨에게 트라우마 극복법을 들었다.

산만언니 이선민 씨.

산만언니 이선민 씨.

핼러윈 축제가 한창이던 10월 29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골목길서 “사람이 쏟아진다”는 112 신고가 빗발쳤다. 결국 오후 10시 15분경 354명의 사상자를 낸 이태원 압사 사고가 발생했고 18.24m²(약 5.5평) 공간에서 158명(11월 16일 기준)이 목숨을 잃었다. ‘군중 압착’으로 인한 압사였다.

이태원 참사의 상처는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 사회 전반에 트라우마가 자리한 지금,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 ‘산만언니’ 이선민(46) 씨를 만났다. 산만언니는 이 씨가 지난해 출간한 책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의 필명이다. 이 씨는 자신처럼 이번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위해 도움의 목소리를 내고자 인터뷰에 응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난해 책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낸 후 현재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첫 번째 책에는 제 경험담을 기록했고, 이번에는 국내외 다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해요. 그러던 중 또 하나의 참사가 발생했죠.

이번 참사 직후 SNS에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공지를 올리셨는데요.

언론이 저를 필요로 할 땐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우선 이번 참사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이따금씩 부캐 산만언니와 본캐 이선민이 부딪히는데, 생각해보니 참사가 있을 때 ‘희생자’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제가 유일하더라고요.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힘들지만 제가 활동을 지속하는 이유예요.

이태원 참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떠셨어요.

참사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보고 ‘이게 무슨 일이지?’ 했죠. 모두가 그렇겠지만, 정말 황당했어요. 경제 규모나 사회적 시스템으로 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한편 두렵기도 했어요. 자칫 여론이 당론 등의 세력이 되면, 참사는 뒤로 가려져 처벌과 진상 조사가 어려워질까 봐서요. 또 사고와 관련해 의문이 많이 들었어요.



참사 생존자, 또 다른 참사를 접하다

어떤 의문점인가요.

그동안 군중이 밀집한 이벤트가 많았잖아요. ‘2002년 월드컵’이나 ‘촛불시위’ 등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번 사고는 현장에 구급차가 못 들어갈 정도로 중심 도로가 통제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사고 예방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사고 이후 군중이 밀집한 모습만 봐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이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서울 지하철 9호선을 자주 타는데, 대합실로 내려가는 경사와 깊이가 상당해요. 참사 다음 날 봤더니 아무도 계단 손잡이를 잡지 않더라고요. 위에서 한 명만 쓰러져도 줄줄이 넘어지는 상황이거든요. 일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은 저만 느끼는 게 아닐 거예요. 참사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분명 트라우마가 남아요.

그날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 이태원에 갔으나 사고 상황을 몰랐던 사람, 별생각 없이 그곳에 들렀던 사람 모두 ‘생존자’가 됐다. 삶과 죽음 사이 경계의 모호함을 경험한 이들은 일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도 제게 삼풍백화점에 왜 갔냐 묻지 않았어요”

이선민 씨는 사회 시스템 신뢰 회복을 위해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발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선민 씨는 사회 시스템 신뢰 회복을 위해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발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핼러윈을 즐기려고 이태원을 찾은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가기도 했어요.

사고가 일어난 공간에 있었다는 게 죄는 아니에요. 저 역시 아무도 ‘삼풍백화점에 왜 갔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그곳에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혹은 죽기 위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2년여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렸으니,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러 간 거죠.

참사 현장에서 무력했던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죄책감을 느끼는 건 이해가 되지만 그걸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해요. 물론 주변의 비난이 두려워 가족이나 친구에게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쉽게 털어놓기는 어렵겠죠. 저도 스무 살에 사고를 겪고 가까스로 구조돼 병원에서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데도,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상황 파악을 못 한 거죠. 무서울 땐 이성적인 사고가 안 되거든요. 과도하게 자책하지 않았으면 해요.

친구와 함께 있다가 혼자 돌아온 경우도 있어요. 생존자는 유가족의 원망과 본인의 죄책감을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조금 더 슬픈 사람을 위로해주는 것도 또 하나의 애도라고 생각해요. 친구를 잃은 본인도 슬프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의 슬픔이 더 클 거잖아요. 사망한 친구의 가족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이미 죄책감에 갇혔다면 무엇을 해볼 수 있나요.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원래 삶의 루틴으로 돌아가야 해요. 학생은 학교로, 직장인은 직장으로요. 또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이나 심리상담도 추천해요. 누구든 붙잡고 여러 번 얘기하면 그 일이 문득 객관적으로 보이게 돼요. 저는 그걸 ‘CCTV 뷰’라고 불러요. 날 대상화하고 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거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나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면 이런 부분에 대한 가이드를 해주세요. 자신과 잘 맞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세요.

정부는 보건복지부 산하 이태원 사고 통합심리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부상자, 가족, 목격자, 일반 국민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국가트라우마센터(02-2204-1435),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 거주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를 통해 신청 가능하다. 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10월 30일 성명을 통해 심리적 트라우마 발생 예방을 위해 “현장 영상이나 뉴스를 과도하게 반복해서 보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전문가들은 참사 관련 뉴스를 자제하라고 하지만 관심을 놓으면 상황이 잊힐까, 억지로 보는 사람도 많다고 해요.

불가의 가르침 중에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있어요.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죠. 나를 학대하면서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어요. 저도 용기를 내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어요. 지금은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를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을 때 하셔야 해요.

이태원 참사 이후 SNS에는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에서 타인을 미는 사람이 줄었다는 경험담이 이어졌다. 각종 방송과 동영상 플랫폼에서도 ‘군중 밀집 시 대처 요령’을 담은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참사 현장에 있었든 없었든 사회 구성원 전반이 느끼는 경각심이 커진 것이다. 이 씨는 트라우마 해소의 핵심은 정부 시스템에 대한 신뢰 회복에 있다고 말한다.

참사 주요 피해자층인 2030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이 일상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지만 당연한 수순이죠. 참사를 겪고 사회에 트라우마가 남았으니까요. 이런 트라우마가 해소되려면 우선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회복돼야 해요. 지금은 정부가 구축한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느낌이 드니까 두려운 거예요. ‘다시 사고가 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국가가 ‘정상적인 시스템’으로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가 다시 생기면 차차 나아지겠죠.

‘정상적인 시스템’은 무엇인가요.

참사 후 진상 조사,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발표요. 정부가 시스템의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은 뒤 국민을 설득해야죠. 개별 상담이나 치료는 빙산의 일각이에요.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만 응급 처치해놓는 수준이죠. 거기에 그칠 게 아니라 내상을 찾아 고쳐야 해요. 그것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이선민 씨는 끝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어요.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뉴스를 보다 마주한 삼풍백화점 참사 책임자들이 호송되는 모습입니다. 회장, 사장, 공무원 할 것 없이 푸른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여 연행되고 있었죠. 당시엔 그걸 보고 화가 났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제 치료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비롯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 한 그들이 재판장에 서는 걸 봤기에 저는 지금껏 살 수 있었어요. 이번 참사도 정확한 진상 조사와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해요.”

#이태원참사 #산만언니 #사회적트라우마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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