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은 달라졌다. 대한민국 첫 대통령 관저 이름으로 재사용된 ‘경무대’는 독재정권과 부정부패의 이미지를 연상한다는 이유로 1960년 12월 30일부터 ‘청와대’로 불렸고, 현재까지 통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 청와대는 현대 도시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중요 보안 시설이기에 많은 규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주변 지역뿐 아니라 도심 지역 내 건물의 입면, 높이,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면서 서울 시민의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2022년 5월 10일 자로 정치적 기능을 상실한 청와대는 이제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보안과 규제의 빗장이 풀린 청와대를 역사적·건축학적으로 산책하기 위한 루트를 세 갈래로 구분해봤다.
루트 1: 디지털 자료로 보는 청와대 공간의 변천
대경성부대관에 표현된 경복궁 후원 영역(1935). 망국 이후 경복궁뿐 아니라 후원 영역의 전각도 매각·이건·훼철됐다. 경복궁 정문에는 조선총독부(1916. 6. 25.~1926. 10. 1.)가 건립됐고, 서측까지 전차가 개설돼 조선총독부 관저(1939. 7.)와 관사 단지가 개발됐다. 경무대 일대는 조선박람회(1929)를 거치며 대부분 철거됐다. 사진은 공원으로 남아 있던 자리에 총독 관저를 짓기 바로 전의 모습이다.
1945년 경무대 인근 사진.
루트 2: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신무문 안과 밖 넘나들기
1968년 경복궁 앞길. 광화문에서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백악에 이르는 산세지형 아래 도시 궁궐의 경관이 특정한 방식으로 발달된 데에 문화재 영역과 그 뒤에 입지한 청와대의 존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일대 복원 당시 고종 시대를 기준으로 뒀다. 1868년(고종 5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진 경복궁을 재건하고 신무문 밖 후원 지역을 정치적 공간으로 재조성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 관사 건물은 1993년 11월,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된다. 신무문 안 경복궁 영역은 당시 자리에 건물을 올리는 원형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대표 사례는 일제가 대한제국 병탄(倂呑) 25주년 기념 박람회장을 세우기 위해 철거한 건청궁을 복원한 것.
다만 후원 영역에 해당하는 청와대까지 원형 복원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청와대 영역에 세워진 고종 시기 건물 중 현재 방문 가능한 것은 후원의 정문이었던 신무문과 오운각, 침류각 정도다. 이들은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이건했기 때문에 당시 위치와 다른 곳에 있다.
루트 3: 전통과 현대 버무리기
1978년 영빈관 공사 현장. 1967년 신라호텔 영빈관이 매각되면서 정부 공식 행사 공간인 영빈관을 청와대 내 경농재 터에 짓는다. 18개의 돌기둥 중 앞의 기둥 4개는 전라북도 황등 마을에서 채취한 화강암을 이음새 없이 통으로 가공한 것이다.
1989년 청와대 춘추관 기공식(위). 1990년 청와대 춘추관 전경
앞으로가 중요하다
청와대 미남불에서 광화문 세종로 방향으로 내려다본 사진. 청와대 개방 이후 볼 수 있게 된 도심 속 궁궐 풍경. 경복궁은 낙산, 인왕산, 북악산, 남산 4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배산임수의 절묘한 위치다.
오랜 시간 닫혀 있던 청와대 공간도 경복궁의 후원 영역으로 전통에 대한 시대별 해석에 따라 그 영향을 받았다. ‘광화문에서 경복궁을 거쳐 백악, 보현봉과 함께 하늘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경관’을 구축하는 장기 복원 계획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 하나인 청와대를 모두의 기억에 남는 도시 문화자원으로 만들어 이를 완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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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국토정보플랫폼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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