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Letter from Beijing | 한석준의 유학 에세이

‘만만디’ 중국 은행의 비밀

글&사진·한석준 사진제공·연합뉴스

2011. 06. 10

‘만만디’ 중국 은행의 비밀


베이징에 와서 처음 중국 은행을 찾았을 때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손님들은 대기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또한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다. 대기 번호는 73번. 업무를 보는 손님의 번호는 62번이고 직원이 3명이니까 대략 10~15분이 걸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려 울화가 터졌다. 알고 보니 은행도 손님도 서로를 믿지 못해 무언가를 확인하느라 터무니없는 시간을 소모한 것이다. 은행은 손님의 신분이 진짜인지 철저히 확인하고, 신분증 복사는 물론 서류에 일일이 서명을 했다. 심지어 손바닥 만한 영수증 복사본에도 서명을 하니 한 사람당 걸리는 시간이 최소한 10분이다. 손님들도 모두 창구에 앉아서 은행 약관을 꼼꼼히 읽어보고 의심이 가면 직원에게 일일이 물으며 확인하기 때문에 시간이 곱으로 걸릴 수밖에 없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간신히 입출금에 필요한 계좌와 체크카드를 만들고 나니 다시 이곳에 오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또다시 은행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중국의 독특한 체크카드 시스템을 몰라서였다. 한국에선 신용카드처럼 한번 스윽 긁기만 하면 결제가 되는데 중국에선 체크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상점 단말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던 것. 그런 절차를 알 턱이 없는 데다 한동안 현금만 써서 체크카드의 비밀번호조차 외우지 못한 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음식점에서 계산을 하려고 하자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찍으라는 것이었다. 당황하던 차에 뒷손님의 빨리 하라는 시선이 느껴지자 ‘그냥 좀 믿어주면 안되나?’ 하는 짜증이 밀려왔다. 사진이 떡하니 박힌 신분증도 가지고 있고, 카드에 똑같은 이름이 찍혀 있는데 내 카드가 아닐 리 없잖은가!
이곳에선 사회 전반적으로 ‘처음 보는 당신을 무슨 근거로 믿겠어?’라는 의식이 깔려 있음을 자주 느끼는데 은행 체크카드 시스템에서 또 한 번 느끼게 됐다.
카드 비밀번호를 새로 만들기 위해 다시 은행을 찾았다. 한국에선 얼굴이 조금 알려진 덕분에 신분 확인을 철저히 당하지 않는다. 하긴 이 얼굴로 나쁜 짓을 할 수도 없으니 웬만해선 한석준이란 사람을 믿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중국에선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 은행에 가기 전 여권·증명사진·학생증·통장 개설 때 작성한 서류 등 꼼꼼히 챙겼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려니 화장실을 갈 수도 없었다. 그사이 내 번호를 불렀다가 없으면 다시 뽑아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겨우 내 차례가 왔고 또 10여 분이 걸렸다. 한국이라면 기계에 비밀번호만 다시 입력하면 됐을 텐데 통장을 만들 때와 똑같이 처음부터 다시 서류 확인을 한 뒤 비밀번호를 재설정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서로 믿지 않는다’와 ‘너를 믿는다’의 차이

‘만만디’ 중국 은행의 비밀

중국 은행에서 계좌와 체크카드를 만든 뒤 받은 영수증과 카드. 통장은 따로 없고 체크카드가 통장 역할을 한다.



베이징에서 석 달가량 지내며 느낀 중국의 신용 관념은 기본적으로 ‘서로 믿지 않는다’이다. 반면 우리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나를 믿어라’ 또는 ‘너를 믿는다’이다. 그래서 믿었던 이에게 배신이라도 당하면 당황하고 크게 화를 낸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남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배신당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신용사회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겐 이런 모습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믿지 않아서 속 끓일 일도 없다는 면에선 장점이다. 우린 지인으로부터 누군가를 소개받으면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일단 믿는다. 그러다 보면 ‘믿음이 깨지지 않을까? 배신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진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사람과의 관계 맺는 일에 신중하기 때문에 처음 믿기가 힘들 뿐 친분이 두터워져 신뢰의 단계에 접어들면 가족 이상의 관계가 된다.
한국 문화 속에서만 지냈던 나는 서로 신뢰하지 않는 이 사회의 풍토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한국 문화의 기준에서 중국 문화를 평가하는 것일 뿐, 어쩌면 이 사회는 신뢰가 쉽게 형성되지 않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 다를 뿐인데 신뢰와 신용이 없는 중국의 관습이 더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틀린 얘기일 것이다.
하여튼 중국에서 은행 업무는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니 은행 일을 보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단단히 각오하고 가야 한다. 꼭 기억하시길.



‘만만디’ 중국 은행의 비밀


한석준 아나운서는… 2003년 KBS에 입사해 ‘우리말 겨루기’‘연예가중계’‘생생 정보통’등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진행, 2007년에는 연예대상 MC부문 남자신인상을 받았다.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현지 경기 중계를 하며 중국에 관심을 가진 후 기회를 엿보다 올 2월 중국 칭화대로 연수를 떠났다. 직장인에서 학생으로 돌아간 그는 중국에서의 유학생활 중 느낀 점을 매달 소개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