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0일, 90년대 말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4번 타자’ 이호성(41)이 한강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일가족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공개 수배된 지 5시간 만이었다. 그에게 죽임을 당한 김모씨(45)와 세 딸의 주검이 같은 날 오후 전남 화순에서 발견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호성 네 모녀 살해사건은 무성한 뒷얘기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은 지난 3월3일. 서울 마포경찰서에 마포구 창전동 한 아파트에 사는 김씨가 세 딸과 함께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되면서부터다. 김씨의 오빠가 동생이 2월26일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운영하던 식당에도 출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경찰에 신고한 것. 실종된 김씨가 이호성과 재혼설이 나돌 만큼 절친한 사이였음을 확인한 경찰은 그가 실종사건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이호성을 찾는 데 수사력을 모았다.
김씨는 지난해 7월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스무 살, 열아홉 살, 열세 살 된 세 딸을 키우며 살아온 여인. 1년 여 전부터 이호성과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자택을 판 뒤 마포구 창전동 한 아파트에 전셋집을 얻었는데, 이때 이호성은 김씨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며 부부로 소개했다고 한다. 김씨의 딸들 역시 주변 친구들에게 이호성을 “엄마와 재혼할 아저씨”라고 소개하곤 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호성과 김씨 모녀의 행적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씨는 지난 2월18일 0시 자신의 식당에서 퇴근한 후, 같은 날 오후 자신의 둘째·셋째 딸과 함께 실종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창전동 김씨의 자택 아파트 CCTV에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여행가방 3개를 끌고 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찰이 주목했던 이호성과의 연관성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김씨의 은행계좌를 압수수색해 사망 며칠 전 1억7천만원이 인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사업 실패 후 사기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이호성을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해 3월10일 공개수배령을 내렸다. 바로 이날 이호성과 네 모녀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호성은 김씨가 실종된 지난 2월18일 김씨의 자택에서 김씨와 딸들을 살해한 뒤 사체를 CCTV에 등장하는 여행가방에 나눠 담고 전남 화순으로 옮겨가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3월 10일 오후 이호성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안치된 서울 순천향병원에 마포경찰서 관계자들이 들어오고 있다.(좌) 경찰이 김씨 모녀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이호성을 수배하고 공개 수사에 들어간 날 이호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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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실패 후 빚에 쪼들리다 돈 노리고 범행
김씨와 세 딸의 시신이 발견된 전남 화순군 공동묘지 내 구덩이. 시신은 비닐에 싸여 큰 가방에 담긴 채 1.5m 정도 깊이의 구덩이에 묻혀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호성이 김씨 일가족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이유는 돈 때문. 경찰은 김씨의 통장에서 빠져나간 1억7천만원의 흐름을 추적한 결과, 김씨가 이 돈을 전액 현금으로 인출해 이호성에게 빌려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 돈을 2월20일까지 전세계약 잔금으로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이호성에게 수차례 “빌린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고, 빚을 갚을 능력이 없던 이호성은 이 때문에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경찰의 수사 발표에 따르면 이호성은 2월18일 오후 먼저 김씨와 둘째·셋째 딸을 질식시켜 살해했다. 시신발굴 결과 김씨와 두 딸은 실내복 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돼 집안에서 편안하게 있다 한꺼번에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호성은 서울 도심에서 친구를 만나고 있던 큰딸에게 김씨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유인한 뒤 승용차 안에서 둔기로 머리를 때려 살해했다.
이후 이호성은 사체를 비닐로 포장해 너비 120cm 크기의 가방에 나눠 담은 뒤 김씨 소유의 승용차를 몰고 선친의 묘소가 있는 전남 화순군으로 향했다. 날이 밝은 뒤 인부를 구한 이호성은 아버지 묘 근처에 가로 120cm, 세로 2m, 깊이 150cm 크기로 사체가 든 가방의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덩이를 파고, 인부들을 돌려보낸 뒤 직접 가방을 묻었다.
이 구덩이가 있는 곳은 길과 산자락 사이로, 길보다 지대가 낮아 산에서 흘러내린 황토가 자연스럽게 모인 뒤 빗물에 다져지게 돼 있다. 이호성은 이곳에 사체를 매장한 뒤 주변 황토와 돌을 섞어 50cm 두께로 덮고 근처 낙엽을 긁어 모아 눈에 띄지 않도록 위장했다. 경찰은 “구덩이를 판 인부가 지점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었을 장소”라고 말했다.
이틀에 걸쳐 살인과 암매장까지 끝마친 이호성은 2월20일 오후 8시께 김씨의 집을 다시 찾아 범행 차량을 주차시킨 뒤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실종 당시 정황과 주변인 수사, 김씨와 큰딸의 휴대전화 위치 추적에 나선 경찰에 의해 범행 20일 만에 공개 수배되면서 한강 투신 자살로 끔찍한 살인극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호성은 지난해 이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김씨 외에 또 다른 여인과 내연관계를 유지했다. 김씨에게 빼앗은 1억7천만원 가운데 4천만원은 그 여인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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