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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에미상 휩쓴 ‘성난 사람들’의 두 남자

김윤정 프리랜서 기자

2024. 01. 24

1970년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는 초기작을 통해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삶을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심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반세기 후,
드디어 한국계 이민자의 차례다. 

이성진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븐 연 등 한국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상인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지난 1월 7일 열린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TV 미니시리즈 부문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3관왕 소식에 이은 쾌거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 한인의 삶

‘성난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고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는 화장실 배관부터 전기까지 집 안 곳곳을 수리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도급업자다. 열심히는 사는데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부모님은 미국에서 운영하던 모텔이 망해 한국으로 돌아갔고, 일감이 줄어 살기도 빡빡한데 집 안에서 게임만 하는 동생 폴(영 마지노)까지 건사해야 한다.

중국계 이민자 2세인 에이미(앨리 웡)는 성공한 사업가지만 일터에서는 백인 재력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는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가 쌓여 있다. 늘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모태 금수저 남편 조지(죠셉 리)는 에이미의 고민과 상처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대니와 에이미 두 사람은 우연히 접촉 사고로 만나 서로의 발작 버튼을 누르고 만다.

“난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문제는 나인 것 같아.”



사소한 운전 시비에서 시작된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는 지난해 4월 공개된 직후 글로벌 이용자들의 누적 시청 시간으로 순위를 매기는 넷플릭스 톱10에 5주 연속 이름을 올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이들의 내면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평가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이민자의 정체성이다. 주인공 대니는 부모님에게 집도 사드리고 동생도 챙기고 싶은 ‘K-장남’으로서 책임감을 잃지 않고 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 커뮤니티 “교회에서 좋은 한국 여자 만나 결혼하라”고 잔소리하는 부모님, 가전제품 브랜드를 보면서 “한국 기업 도와줘야지”라고 뜬금없이 내뱉는 애국심 가득한 발언 등.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이 감독은 직접 쓴 각본에 자연스럽게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의 모습을 녹여냈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에서 이 감독은 “제가 작가로 데뷔했을 때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걱정했지만, 2020년대에 들어서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큰 변화가 일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경험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또 알고 싶어 한다”면서 “한국인인 우리가 우리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그룹 BTS, 영화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을 거치며 무르익은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창작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은행 잔고 마이너스 63센트 ‘소니’가 ‘이성진’으로

이 감독은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 크리틱스초이스, 골든글로브 시상식 모두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에미상에서는 감독상과 작가상까지 총 3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감독은 에미상 무대 위에서 “LA에 처음 왔을 때 은행 잔고가 마이너스 63센트였다”며 “그때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트로피를 손에 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9개월 때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펜실베니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습작 기간을 거쳐 2008년, 시트콤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각본가로 데뷔했다. 이 감독은 2019년 ‘투카 앤 버티’ 개봉 전까지 미국 이름인 ‘소니 리’를 사용했다. 하지만 영화 ‘기생충’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봉준호 감독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부르기 편한 영어 이름 ‘소니’ 대신 ‘이성진’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게 됐다. 좋은 작품을 만들면 어떤 이름이든 제대로 기억하고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고. 이제 미국인들이 ‘이성진’이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할 차례다.

할리우드 대표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은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 골든글로브, 크리틱스초이스 남우주연상까지 휩쓸면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 배우로 우뚝 섰다. 에미상 트로피를 손에 쥔 스티븐 연은 “편견과 수치심은 외로운 것이지만, 연민과 은혜는 우리를 하나로 모이게 만든다”며 “이것을 가르쳐준 대니(극 중 배역)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스티븐 연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5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배우의 꿈을 키우던 그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건 2010년 AMC ‘워킹 데드’ 글렌 리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할리우드에는 ‘동양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작품은 주류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팽배해 있었고, 아시안 배우가 참여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배역도 매우 한정적이었다. ‘워킹 데드’에 처음 등장했을 때, 트위터로 인종 차별적인 욕설이 담긴 멘션을 잔뜩 받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앳된 얼굴의 피자 배달부 글렌이 영리하고 이타적인 모습으로 극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듯, 스티븐 연도 ‘빅뱅 이론’ ‘특수범죄 전담반’ 등 인기 TV 시리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옥자’,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 등에 출연하면서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하나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1)다. 1980년대 미국 한인 이민 1세대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로 스티븐 연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계로는 물론 동아시아계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스티븐 연이 최초였다. 스티븐 연은 ‘미나리’ 시나리오를 읽은 후 “이민 1세대인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자, 미국 대중 미디어에 남기는 한국계 이민자의 기록인 셈이다.

한편 ‘성난 사람들’ 후속편 제작도 긍정적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 감독은 지난해 11월 넷플릭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의 차기작 역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는 의미다. 그는 에미상 수상 후 인터뷰에서 “‘성난 사람들’은 분명 닫힌 결말을 가졌기 때문에 (시리즈물 제작이) 제한적이겠지만,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며 “이건 넷플릭스의 결정에 달렸다”고 말했다. ‘성난 사람들’이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휩쓸면서 프리퀄이나 시퀄 등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물 제작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스티븐 연은 관련 질문을 받고 “모든 것은 이 감독에게 달려 있고, 이 감독 의견에 따를 것”이라고 답했다.

‘성난 사람들’에는 스티븐 연 외에도 대니의 동생 폴로 출연한 영 마지노, 여주인공 에이미의 남편이자 일본계 남성 역할을 맡은 죠셉 리, 대니의 사촌 아이작을 연기한 데이비드 최, 동양계 여성 나오미를 연기한 애슐리 박, 한인교회 교인으로 출연한 저스틴 민, 앤디 주, 앨리사 김 등 한국계 미국인 배우가 다수 등장한다. 후속 편이 제작되고 스토리가 신선하게 더해진다면 한국계 배우들의 새로운 등장이나 활약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성진 #스티븐연 #성난사람들 #여성동아

사진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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