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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에드워드 호퍼, 휩쓸리지 않는 주관으로 정점에 서다

오홍석 기자

2023. 05. 24

고독과 쓸쓸함으로 대표되는 미국 작가 에드워드 호퍼.그의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관람했다.

관람객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부인 조세핀이 등장하는 ‘햇빛 속의 여인’을 감상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부인 조세핀이 등장하는 ‘햇빛 속의 여인’을 감상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찹 수이’ ‘아침 태양’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이 열리고 있다. 호퍼 개인전이 국내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19년 데이비드 호크니 개인전을 열어 관객 37만 명을 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과거 전시를 봤을 때의 좋은 기억 그리고 오래 줄을 서야 했던 나쁜 기억을 되살려 얼리버드 티켓을 구매했다. 전시관에 호퍼 대표작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지만 그의 고유한 화풍이 자리 잡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전시가 그 아쉬움을 충분히 채워줬다.

‘푸른 저녁’의 실패가 남긴 것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다. 사실주의는 미화와 낭만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술 사조답게 때론 불편하고 어두운 면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호퍼는 1920년대 자본과 기술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도시의 고독과 외로움, 상실감을 표현한 화가다. 그는 어떻게 그런 고유의 화풍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까. 전시 초반 등장하는 ‘자화상’ 이후, 이어지는 파리 체류 기간 동안의 작품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삽화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호퍼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 그는 1906년과 1910년 사이 프랑스 파리에 3차례 체류했는데, 당시 미술계는 파격적인 색을 선보이는 ‘야수파’와 다양한 시각을 한 폭에 담아내는 ‘입체주의’가 트렌드를 주도했다. 하지만 호퍼는 빛의 채도와 굴곡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피사체 모습에 집중하는 ‘인상주의’에 더욱 끌렸다. 그는 화가로 이름을 알린 뒤 인상주의 작가 알프레드 시슬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호퍼는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빠르게 변모하는 뉴욕과 달리 옛 정취를 고이 간직한 파리의 매력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파리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센강과 강변-건물-하늘’ ‘루브르와 선착장’ 등 수평적인, 사진 같은 구도 안에 빛과 그림자가 대비되는 자신만의 파리를 화폭에 담았다.



호퍼는 창의적인 패션을 꽃피우던 파리지앵에게도 빠져들어 캐리커처도 즐겨 그렸다. 그가 파리에서 연마한 스타일이 한데 모인 작품이 전시 중반부에 등장하는 ‘푸른 저녁’(1914)이다. 하지만 ‘푸른 저녁’은 공개 당시 혹평을 받았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고된 하루를 마무리한 듯 지친 표정으로 담배를 문 광대가 그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등장인물은 7명인데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호퍼 특유의 고독과 소외감이 잘 묻어나지만, 대중이 느끼는 파리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푸른 저녁’의 실패는 호퍼가 작품 속 배경을 뉴욕으로 옮기게 된 계기가 됐다.

생계 위해 그린 삽화로 명성 얻어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자화상’.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자화상’.

지금에야 호퍼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지만 처음부터 명망 있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40대에 접어들어 작가로 인정받기 전 그는 지난한 무명 시절을 보냈고 주로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전시는 1906년부터 1925년까지 호퍼가 그린 삽화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호퍼는 당시 발행 부수가 많은 각종 잡지의 표지화를 비롯해 포스터, 엽서에 삽화를 그렸다.

작품을 감상하며 들었던 생각은, 호퍼가 느꼈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었다. 파리까지 가서 야심 차게 그린 작품이 혹평받고, 다시금 돈을 벌기 위해 펜을 잡았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호퍼는 25년을 삽화가로 살았는데도 당시를 회고하는 어떠한 기록물 하나 남기지 않았다. 1956년 호퍼가 명망 있는 예술가로 거듭난 뒤 그를 인터뷰한 미술 평론가는 “호퍼는 남들이 그려달라는 그림을 그리기보단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고 말했으며, 호퍼가 삽화를 그리던 시절을 “사막에 갇힌 시절로 묘사했다”고 쓴 기사만이 전해질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호퍼는 삽화 작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호퍼는 판화를 통해 빛과 그림자가 대비되는, 특유의 긴장감이 뿜어져 나오는 화풍을 갈고닦았으며, 뉴욕의 장면을 판화로 묘사한 이 독특한 작업물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서스펜스 넘치는 영상으로 이름이 높은 알프레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같은 거장들도 호퍼의 판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정도였다. 호퍼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에칭(판화를 복사하는 작업)을 시작한 뒤부터 내 그림은 구체화되어가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긴 무명작가 시절 에드워드 호퍼가 생계를 위해 그린 삽화들.

긴 무명작가 시절 에드워드 호퍼가 생계를 위해 그린 삽화들.

호퍼의 스타일은 회화 작품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는 캔버스에 특별한 순간보다는 일상을 더 많이 담았다. 도시 속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과 건물 사이, 창문 반대편에 보이는 사람을 피사체로 선택했고 자주 거닐던 공원의 쓸쓸한 풍경을 그렸다.

이후 전시는 호퍼의 아내 조세핀을 조명하며 마무리된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미국 곳곳을 여행했고 호퍼는 도시와 전원을 오가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조세핀은 여행에 동행하며 호퍼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고 내성적인 호퍼를 대신해 작품을 홍보하기도 했다. 호퍼의 커리어는 조세핀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세핀 역시 화가였으나 남편을 지원하느라 꿈을 접었다고 한다. 결혼 생활 내내 작성한 조세핀의 일기에는 호퍼에게 폭행당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데도 조세핀은 호퍼를 떠나지 않았다.

호퍼의 작품들은 고독과 소외감이 극대화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영국의 신문 ‘가디언’은 2020년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의 예술가인가?”라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고독이 가득한 호퍼의 작품 이면, 그의 삶에 더 큰 울림을 느꼈다. 트렌드를 좆기보다 쏟아지는 혹평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던 호퍼. 묵묵히 생업을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연마해 결국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굳건함. 그의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에드워드호퍼 #서울시립미술관 #길위에서 #여성동아

사진 오홍석 기자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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