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 9단은 여자바둑계의 신화적인 존재다. 2013년 12월 국내 여자바둑 랭킹 1위에 오른 뒤 3월 기준 100개월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바둑 종목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오랜 기간 정상을 유지한 건 전례 없는 일이다. 세계무대로 범위를 넓혀도 그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3월 기준 세계 여자바둑 랭킹 1위가 바로 최정이다. 우리나라 남자바둑의 대표선수가 세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이라면, 여자 분야에서는 단연 최정을 꼽을 만하다.
1996년 10월 태어난 최정은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했다. 만 14세에 입단해 채 2년도 되기 전인 2012년 1월,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8년에는 여자기사 가운데 최연소로 ‘입신’(入神·9단의 별칭) 반열에 올랐다.
최정은 반상의 남녀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도 앞장섰다. 바둑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 기사 실력이 여성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최정은 그 통념을 깼다. 중국 구쯔하오 9단·스웨 9단 등 세계대회 우승 경험이 있는 남자바둑 강자를 잇달아 꺾었다. 비공식 인터넷 대국에서 중국 커제 9단을 상대로 승리한 일도 있다. 3월 초 열린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서는 한국 랭킹 2위, 세계 랭킹 3위 박정환 9단을 이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현재 최정은 바둑 통계 사이트 ‘고레이팅(Go Ratings)’ 집계 ‘세계 바둑 랭킹’ 100위 안에 들어 있는 유일한 여성이다.
잘 웃고, 농구와 족구를 즐기며, 스트레스 받을 때는 노래방에 가서 방탄소년단(BTS) 노래를 수십 곡씩 부른다는 발랄한 20대. 색다른 매력의 바둑 천재와 마주 앉아 ‘세계 1등 바둑기사로 살아가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박정환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한 지 열흘 째 되는 날이라 그 질문부터 시작했다.
얼마 전 바둑대회에서 박정환 9단을 이기신 걸 봤어요. 박 9단은 2010년 아시안게임 바둑 금메달리스트이고, 지난해 11월 국제 대회인 삼성화재배에서 신진서 9단을 꺾고 우승하기도 했죠. 그를 상대로 승리한 기분이 어땠나요.
그동안 박정환 사범님을 만나면 결과가 늘 좋지 않았어요. 지기만 한 게 아니라 내용도 나빴죠. 박 사범님이 워낙 잘 두시기도 하지만, 제가 제 바둑을 하지 못한 면도 있어서…. 계속 밀리니 자신감이 떨어져 이번에도 긴장을 많이 했어요.
선배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할지 망설이며 조심스레 단어를 고르던 최정이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활짝 웃더니 꺼낸 말이 이렇다.
“사실 좋긴 진짜 좋았어요.”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제가 박 사범님을 이긴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또 지금까지 제가 이긴 상대 가운데 박 사범님 랭킹이 가장 높아요. 그래서 굉장히 큰 자신감이 생겼어요. 대국 끝나고는 너무 지쳐서 100% 실감하지 못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쁨이 커지는 것 같아요. ‘아, 이제 진짜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부터 “남녀가 함께 겨루는 통합기전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포부를 여러 번 밝혔죠.
네. 제가 바둑 공부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루이나이웨이 9단에 대해 알게 됐거든요. 2000년 국수전에서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 우승하신 분이에요. 국수전이 당시엔 바둑 분야 최고 대회 중 하나였어요. 루이나이웨이 9단 상대는 이창호 9단, 조훈현 9단 등이었고요. 어려운 승부를 차례차례 이겨내고 마침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우승까지 차지한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몰라요. ‘나도 나중에 꼭 저런 바둑기사가 돼야 겠다’ 생각했어요. 지금도 제 롤 모델은 루이나이웨이 9단이에요.
최정은 2014년 9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세계여자바둑대회 결승에서 바로 그 루이나이웨이 9단을 꺾고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최정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승리였다. 그 대국을 떠올리며 최정은 “바둑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지금도 당시 상황이 기억나세요.
경기 초반엔 좀 엎치락뒤치락했어요. 저와 루이 사범님 둘 다 전투형이거든요. 열심히 싸워서 보는 분들이 재미있으셨을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승부 추가 조금씩 제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어요. 그때부터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죠. 속으로 제 허벅지를 수만 번쯤 꼬집었을 거예요. ‘끝까지 침착해야 해’ 하면서요.
그는 “바둑을 시작하면서부터 존경해온 기사님과 마주앉아 바둑을 뒀는데, 심지어 내가 이긴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활짝 웃었다. 박정환 9단과의 승부를 얘기할 때도, 루이나이웨이 9단과의 대국을 회상할 때도 최정은 매번 자신과 상대한 기사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현했다. 동시에 승리의 기쁨 또한 숨기지 않았다. 가로 42cm, 세로 45cm 크기 나무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짜릿한 승부의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갓 열일곱 살이 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0개월째 국내 여자바둑 랭킹 1위를 유지하고 계시잖아요. 이렇게 압도적으로 잘 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많이 이기는 편이다 보니 바둑을 쉽게 둘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절대 아니에요. 프로 기사들은 다 ‘한 칼’이 있거든요. 누구나 언제든 이길 수 있고, 저 또한 언제 누구한테든 질 수 있어요. 그래서 매순간이 어려워요.
지금도 꾸준히 바둑 공부를 하시고요.
그럼요.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냥 매일 바둑이랑 같이 살아요(웃음). 요새는 인공지능(AI)으로 공부를 많이 해요. AI를 활용해 초반 포석 연구를 하고, 제가 뒀던 바둑을 복기하거나 사활을 풀기도 하죠. 인터넷으로 국내외 기사들과 연습 대국도 두고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포석 연구’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시간표가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계획을 정해놓고 해보려 한 적도 있는데 잘 안 지켜지더라고요.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해요. 틈틈이 운동하고, 밥 먹고, 친구도 만나니까 바둑에 집중하는 시간은 하루에 7~8시간 정도 될 거 같아요.
주말에는 쉬시고요.
주말에도 바둑을 손에서 놓는 날은 거의 없어요. 시합 때가 아니면 주말이나 주중 스케줄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발레 하는 분들 사이에는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코치가 알고, 사흘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둑도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종목인가요.
몸으로 하는 발레만큼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바둑도 공부를 하루 건너 뛰면 본인이 알아요. 자신감이 떨어지고요. 사실 제가 가장 실력이 성장한다고 느낄 때는 시합에 참가할 때예요. 공식 대국에서 상대 기사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 온몸에 날이 선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때 한 단계 올라서는 거죠.
최정은 지난해 국내 프로바둑기사 가운데 가장 많은 101판의 대국을 치러 남녀통합 다승 2위를 기록했다. 많이 싸웠고, 많이 이겼다. 지난해 최정이 받은 상금은 2억 4000만원으로 남녀통합 5위다.
사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빠 말씀으로는 아니었대요. 한 달쯤 배우고는 “재미없다”고 했다더군요. 아빠가 “6개월은 해보자”며 달래셨고, 그 사이에 재미가 붙은 것 같아요. 또래 중에 좀 잘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때 저희 식구가 광주에 살았는데, 제가 열 살이 될 무렵 아빠가 “서울 가서 바둑 공부를 제대로 해 볼래” 하셨어요. 그 질문에 “좋다”고 한 건 분명히 기억나요.
그럼 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둑 기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거군요.
그런 셈이죠. 아빠가 회사를 다니셨는데, 사회 생활이 힘든 부분이 많잖아요. 자식만큼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고 싶으셨다고 해요. 그게 저한테는 바둑이었던 거죠. 사실 어릴 때 이거저거 많이 배웠어요. 피아노도 치고, 미술학원도 다니고, 스피드 스케이팅도 해봤는데 제가 잘 한 게 바둑 하나예요(웃음).
이른 나이에 삶의 방향이 정해진 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보통 아이들처럼 학교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바둑 공부하는 친구들과 낮에는 사활 풀고 밤에는 축구하며 지내는 것도 좋았어요(최정은 프로기사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바둑도장에는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데 제가 활동적인 성격이라 농구, 축구, 족구 빠지지 않고 다 같이 했어요.
알고 보니 최정은 요즘도 며칠씩 이어지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현지에서 남자 기사들과 어울려 족구를 즐긴다고 한다. “웬만한 공은 다 받아낸다”며 웃는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하기 전에는 여자 농구 동호회에 가입해 주 1회씩 코트에서 구슬땀을 흘리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공 갖고 하는 건 다 좋아해요. 또 바둑이 체력이 굉장히 중요한 종목이거든요. 국제대회는 대부분 장고(長考) 대국이에요. 1인당 제한시간이 2시간 이상이죠. 각자 제한시간만 다 써도 4시간인데 거기에 초읽기까지 더하면 5~6시간씩 승부를 겨루는 거예요. 그걸 버티고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체력이 필수죠.
평소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코로나19 이후 농구를 못 하게 돼 한동안 힘들었어요. 농구가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참 도움이 됐거든요. 요즘은 주 2회 PT를 하고, 틈날 때마다 걷거나 뛰죠.
운동 말고 취미가 또 있나요.
노래요. 제가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해요. 거의 세 달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노래방에 간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요즘엔 그것도 못 하게 됐죠.
그러고 보니 최정은 2017년 2월 케이블채널 tvN의 예능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 BTS의 ‘불타오르네’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선보인 적이 있다. 만약 바둑 애호가인데 아직 그 프로그램을 보지 못했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라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세계를 호령하는 바둑 천재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최정은 빨간색 치마를 입었다. 개성 강한 청년 기사다운 패션 센스다.
최정은 당시 방송 얘기를 꺼내자 “아, 저 그때 춤추는 게 너무 ‘낙지’ 같았죠” 하며 “저는 제가 그보다는 훨씬 잘 추는 줄 알았어요. 주위에 말리는 사람도 없어서 그만”이라며 ‘하하’ 웃었다. 2016년 발표곡 ‘불타오르네’ 시절부터 BTS를 좋아한 ‘찐팬’이라는 최정은 “한때는 내가 바둑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둬서 유명해지면 언젠가 BTS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꼭 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웃음)? 이게 제 모습이에요. 바둑을 할 때는 복잡한 문제에 집중해 제 힘으로 풀어나가는 게 좋지만 그 안에만 갇혀 있지는 않아요. 바둑을 두지 않을 때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모험하는 걸 좋아해요.
기풍도 전투적이라는 평을 듣죠.
특히 어릴 때는 제가 불리한 데서도 좀 싸우려 하는 경향이 있었죠. 이제는 안 그래요. 형세판단을 해봐서 ‘지켜도 이긴다’는 확신이 들면 지키는 바둑을 두기도 하고요.
승부욕 강하고 이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바둑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세돌 9단은 바둑계 은퇴 이유로 ‘인공지능의 탄생’을 꼽았더군요.
현재 시점에서 인간 기사는 바둑 인공지능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그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언젠가 인류가 뇌의 잠재력을 100%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이 상태가 유지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바둑이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동차가 개발됐어도 우리는 여전히 100m 달리기를 하잖아요. 이제는 어딘가에 더 빨리 도착하려고 뛰는 게 아니라, 달리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요. 바둑도 그렇다고 봐요. 사람의 세계에서 우리가 바둑으로 승부를 겨루는 건 여전히 가치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이에요.
알파고와 이세돌 9단 사이 대국이 벌어진 2016년 이후 바둑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긴 했죠.
그렇죠. 바둑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무엇보다 ‘쎈 사람’ 프리미엄이 사라졌어요. 예전엔 당대 1인자가 어떤 수를 두고 “여기서는 이렇게 두는 게 맞지” 하면 다들 속으로는 ‘다른 게 더 좋을 거 같은데’ 해도 말을 못했거든요. 이제는 바둑 문외한조차 ‘정답’을 알아요. 인공지능이 정확히 알려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바둑을 두다 보니 프로 기사는 공부할 양이 더 많아졌어요.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웃음).
이미 참 많은 것을 이뤘는데, 앞으로 더 해내고 싶은 게 있나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올라가고 싶어요.
남녀 통합 기전 우승이요?
그걸 할 수 있다면 좋겠고 못해도 할 수 없죠. 일단 최선을 다해볼 겁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올가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이 1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부활했더군요. 바둑을 잘 모르는 분들도 이 경기 결과만큼은 관심 있게 지켜볼 텐데, 목표가 있으세요.
그 사이에도 국제대회가 많아서 딱 아시안게임 성적을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아요. 차근차근 실력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점이 왔다. 기자는 슬쩍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곽윤기 선수가 메달 획득 후 BTS 춤동작을 선보이는 세리머니를 하던데 보셨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보니 BTS 멤버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곽윤기 선수에게 축하 인사도 건네더라고요.
“아, 맞아요. 아시안게임에서 제가 금메달을 따면, 저도 시상대 세리머니를 할 수 있겠군요. 그럼 꼭 BTS 춤을 출래요. 그때는 좀 더 연습해서 방송에서보다 더 잘해볼게요.”
최정은 새로운 목표가 생긴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이제 올 가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둑 승부사, ‘찐 바둑천재’이자 ‘찐 아미’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BTS 춤을 선보이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최정9단 #항저우아시안게임 #BTS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1996년 10월 태어난 최정은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했다. 만 14세에 입단해 채 2년도 되기 전인 2012년 1월,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8년에는 여자기사 가운데 최연소로 ‘입신’(入神·9단의 별칭) 반열에 올랐다.
최정은 반상의 남녀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도 앞장섰다. 바둑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 기사 실력이 여성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최정은 그 통념을 깼다. 중국 구쯔하오 9단·스웨 9단 등 세계대회 우승 경험이 있는 남자바둑 강자를 잇달아 꺾었다. 비공식 인터넷 대국에서 중국 커제 9단을 상대로 승리한 일도 있다. 3월 초 열린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서는 한국 랭킹 2위, 세계 랭킹 3위 박정환 9단을 이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현재 최정은 바둑 통계 사이트 ‘고레이팅(Go Ratings)’ 집계 ‘세계 바둑 랭킹’ 100위 안에 들어 있는 유일한 여성이다.
세계 1등 천재 바둑기사의 삶
이 정도 경력을 갖춘 기사라면 ‘돌부처’처럼 진중하고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최정은 그런 고정관념도 깨는 존재다. 기자와 인터뷰하기로 한 날, 그는 개나리색과 라벤더색이 교차하는 화사한 베스트를 입었다. 마스크를 내리자 얼굴 가득 드러나는 미소도 딱 그 또래 청년답게 싱그러웠다.잘 웃고, 농구와 족구를 즐기며, 스트레스 받을 때는 노래방에 가서 방탄소년단(BTS) 노래를 수십 곡씩 부른다는 발랄한 20대. 색다른 매력의 바둑 천재와 마주 앉아 ‘세계 1등 바둑기사로 살아가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박정환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한 지 열흘 째 되는 날이라 그 질문부터 시작했다.
얼마 전 바둑대회에서 박정환 9단을 이기신 걸 봤어요. 박 9단은 2010년 아시안게임 바둑 금메달리스트이고, 지난해 11월 국제 대회인 삼성화재배에서 신진서 9단을 꺾고 우승하기도 했죠. 그를 상대로 승리한 기분이 어땠나요.
그동안 박정환 사범님을 만나면 결과가 늘 좋지 않았어요. 지기만 한 게 아니라 내용도 나빴죠. 박 사범님이 워낙 잘 두시기도 하지만, 제가 제 바둑을 하지 못한 면도 있어서…. 계속 밀리니 자신감이 떨어져 이번에도 긴장을 많이 했어요.
선배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할지 망설이며 조심스레 단어를 고르던 최정이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활짝 웃더니 꺼낸 말이 이렇다.
“사실 좋긴 진짜 좋았어요.”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제가 박 사범님을 이긴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또 지금까지 제가 이긴 상대 가운데 박 사범님 랭킹이 가장 높아요. 그래서 굉장히 큰 자신감이 생겼어요. 대국 끝나고는 너무 지쳐서 100% 실감하지 못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쁨이 커지는 것 같아요. ‘아, 이제 진짜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부터 “남녀가 함께 겨루는 통합기전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포부를 여러 번 밝혔죠.
네. 제가 바둑 공부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루이나이웨이 9단에 대해 알게 됐거든요. 2000년 국수전에서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 우승하신 분이에요. 국수전이 당시엔 바둑 분야 최고 대회 중 하나였어요. 루이나이웨이 9단 상대는 이창호 9단, 조훈현 9단 등이었고요. 어려운 승부를 차례차례 이겨내고 마침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우승까지 차지한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몰라요. ‘나도 나중에 꼭 저런 바둑기사가 돼야 겠다’ 생각했어요. 지금도 제 롤 모델은 루이나이웨이 9단이에요.
최정은 2014년 9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세계여자바둑대회 결승에서 바로 그 루이나이웨이 9단을 꺾고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최정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승리였다. 그 대국을 떠올리며 최정은 “바둑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지금도 당시 상황이 기억나세요.
경기 초반엔 좀 엎치락뒤치락했어요. 저와 루이 사범님 둘 다 전투형이거든요. 열심히 싸워서 보는 분들이 재미있으셨을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승부 추가 조금씩 제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어요. 그때부터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죠. 속으로 제 허벅지를 수만 번쯤 꼬집었을 거예요. ‘끝까지 침착해야 해’ 하면서요.
그는 “바둑을 시작하면서부터 존경해온 기사님과 마주앉아 바둑을 뒀는데, 심지어 내가 이긴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활짝 웃었다. 박정환 9단과의 승부를 얘기할 때도, 루이나이웨이 9단과의 대국을 회상할 때도 최정은 매번 자신과 상대한 기사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현했다. 동시에 승리의 기쁨 또한 숨기지 않았다. 가로 42cm, 세로 45cm 크기 나무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짜릿한 승부의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갓 열일곱 살이 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0개월째 국내 여자바둑 랭킹 1위를 유지하고 계시잖아요. 이렇게 압도적으로 잘 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많이 이기는 편이다 보니 바둑을 쉽게 둘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절대 아니에요. 프로 기사들은 다 ‘한 칼’이 있거든요. 누구나 언제든 이길 수 있고, 저 또한 언제 누구한테든 질 수 있어요. 그래서 매순간이 어려워요.
지금도 꾸준히 바둑 공부를 하시고요.
그럼요.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냥 매일 바둑이랑 같이 살아요(웃음). 요새는 인공지능(AI)으로 공부를 많이 해요. AI를 활용해 초반 포석 연구를 하고, 제가 뒀던 바둑을 복기하거나 사활을 풀기도 하죠. 인터넷으로 국내외 기사들과 연습 대국도 두고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포석 연구’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시간표가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계획을 정해놓고 해보려 한 적도 있는데 잘 안 지켜지더라고요.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해요. 틈틈이 운동하고, 밥 먹고, 친구도 만나니까 바둑에 집중하는 시간은 하루에 7~8시간 정도 될 거 같아요.
주말에는 쉬시고요.
주말에도 바둑을 손에서 놓는 날은 거의 없어요. 시합 때가 아니면 주말이나 주중 스케줄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발레 하는 분들 사이에는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코치가 알고, 사흘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둑도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종목인가요.
몸으로 하는 발레만큼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바둑도 공부를 하루 건너 뛰면 본인이 알아요. 자신감이 떨어지고요. 사실 제가 가장 실력이 성장한다고 느낄 때는 시합에 참가할 때예요. 공식 대국에서 상대 기사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 온몸에 날이 선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때 한 단계 올라서는 거죠.
최정은 지난해 국내 프로바둑기사 가운데 가장 많은 101판의 대국을 치러 남녀통합 다승 2위를 기록했다. 많이 싸웠고, 많이 이겼다. 지난해 최정이 받은 상금은 2억 4000만원으로 남녀통합 5위다.
취미는 농구, 족구, 노래방 가기
일곱 살 때 처음 바둑을 배우셨다고 들었어요. 그때부터 바둑의 재미를 느끼셨어요.사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빠 말씀으로는 아니었대요. 한 달쯤 배우고는 “재미없다”고 했다더군요. 아빠가 “6개월은 해보자”며 달래셨고, 그 사이에 재미가 붙은 것 같아요. 또래 중에 좀 잘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때 저희 식구가 광주에 살았는데, 제가 열 살이 될 무렵 아빠가 “서울 가서 바둑 공부를 제대로 해 볼래” 하셨어요. 그 질문에 “좋다”고 한 건 분명히 기억나요.
그럼 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둑 기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거군요.
그런 셈이죠. 아빠가 회사를 다니셨는데, 사회 생활이 힘든 부분이 많잖아요. 자식만큼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고 싶으셨다고 해요. 그게 저한테는 바둑이었던 거죠. 사실 어릴 때 이거저거 많이 배웠어요. 피아노도 치고, 미술학원도 다니고, 스피드 스케이팅도 해봤는데 제가 잘 한 게 바둑 하나예요(웃음).
이른 나이에 삶의 방향이 정해진 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보통 아이들처럼 학교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바둑 공부하는 친구들과 낮에는 사활 풀고 밤에는 축구하며 지내는 것도 좋았어요(최정은 프로기사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바둑도장에는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데 제가 활동적인 성격이라 농구, 축구, 족구 빠지지 않고 다 같이 했어요.
알고 보니 최정은 요즘도 며칠씩 이어지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현지에서 남자 기사들과 어울려 족구를 즐긴다고 한다. “웬만한 공은 다 받아낸다”며 웃는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하기 전에는 여자 농구 동호회에 가입해 주 1회씩 코트에서 구슬땀을 흘리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공 갖고 하는 건 다 좋아해요. 또 바둑이 체력이 굉장히 중요한 종목이거든요. 국제대회는 대부분 장고(長考) 대국이에요. 1인당 제한시간이 2시간 이상이죠. 각자 제한시간만 다 써도 4시간인데 거기에 초읽기까지 더하면 5~6시간씩 승부를 겨루는 거예요. 그걸 버티고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체력이 필수죠.
평소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코로나19 이후 농구를 못 하게 돼 한동안 힘들었어요. 농구가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참 도움이 됐거든요. 요즘은 주 2회 PT를 하고, 틈날 때마다 걷거나 뛰죠.
운동 말고 취미가 또 있나요.
노래요. 제가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해요. 거의 세 달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노래방에 간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요즘엔 그것도 못 하게 됐죠.
그러고 보니 최정은 2017년 2월 케이블채널 tvN의 예능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 BTS의 ‘불타오르네’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선보인 적이 있다. 만약 바둑 애호가인데 아직 그 프로그램을 보지 못했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라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세계를 호령하는 바둑 천재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최정은 빨간색 치마를 입었다. 개성 강한 청년 기사다운 패션 센스다.
최정은 당시 방송 얘기를 꺼내자 “아, 저 그때 춤추는 게 너무 ‘낙지’ 같았죠” 하며 “저는 제가 그보다는 훨씬 잘 추는 줄 알았어요. 주위에 말리는 사람도 없어서 그만”이라며 ‘하하’ 웃었다. 2016년 발표곡 ‘불타오르네’ 시절부터 BTS를 좋아한 ‘찐팬’이라는 최정은 “한때는 내가 바둑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둬서 유명해지면 언젠가 BTS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꼭 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목표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메달 세리머니
사람들과 몸을 부딪혀가며 농구를 하고, BTS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바둑 기사라니. 일반적으로 ‘바둑 기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많이 달라요.그런가요(웃음)? 이게 제 모습이에요. 바둑을 할 때는 복잡한 문제에 집중해 제 힘으로 풀어나가는 게 좋지만 그 안에만 갇혀 있지는 않아요. 바둑을 두지 않을 때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모험하는 걸 좋아해요.
기풍도 전투적이라는 평을 듣죠.
특히 어릴 때는 제가 불리한 데서도 좀 싸우려 하는 경향이 있었죠. 이제는 안 그래요. 형세판단을 해봐서 ‘지켜도 이긴다’는 확신이 들면 지키는 바둑을 두기도 하고요.
승부욕 강하고 이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바둑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세돌 9단은 바둑계 은퇴 이유로 ‘인공지능의 탄생’을 꼽았더군요.
현재 시점에서 인간 기사는 바둑 인공지능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그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언젠가 인류가 뇌의 잠재력을 100%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이 상태가 유지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바둑이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동차가 개발됐어도 우리는 여전히 100m 달리기를 하잖아요. 이제는 어딘가에 더 빨리 도착하려고 뛰는 게 아니라, 달리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요. 바둑도 그렇다고 봐요. 사람의 세계에서 우리가 바둑으로 승부를 겨루는 건 여전히 가치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이에요.
알파고와 이세돌 9단 사이 대국이 벌어진 2016년 이후 바둑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긴 했죠.
그렇죠. 바둑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무엇보다 ‘쎈 사람’ 프리미엄이 사라졌어요. 예전엔 당대 1인자가 어떤 수를 두고 “여기서는 이렇게 두는 게 맞지” 하면 다들 속으로는 ‘다른 게 더 좋을 거 같은데’ 해도 말을 못했거든요. 이제는 바둑 문외한조차 ‘정답’을 알아요. 인공지능이 정확히 알려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바둑을 두다 보니 프로 기사는 공부할 양이 더 많아졌어요.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웃음).
이미 참 많은 것을 이뤘는데, 앞으로 더 해내고 싶은 게 있나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올라가고 싶어요.
남녀 통합 기전 우승이요?
그걸 할 수 있다면 좋겠고 못해도 할 수 없죠. 일단 최선을 다해볼 겁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올가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이 1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부활했더군요. 바둑을 잘 모르는 분들도 이 경기 결과만큼은 관심 있게 지켜볼 텐데, 목표가 있으세요.
그 사이에도 국제대회가 많아서 딱 아시안게임 성적을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아요. 차근차근 실력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점이 왔다. 기자는 슬쩍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곽윤기 선수가 메달 획득 후 BTS 춤동작을 선보이는 세리머니를 하던데 보셨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보니 BTS 멤버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곽윤기 선수에게 축하 인사도 건네더라고요.
“아, 맞아요. 아시안게임에서 제가 금메달을 따면, 저도 시상대 세리머니를 할 수 있겠군요. 그럼 꼭 BTS 춤을 출래요. 그때는 좀 더 연습해서 방송에서보다 더 잘해볼게요.”
최정은 새로운 목표가 생긴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이제 올 가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둑 승부사, ‘찐 바둑천재’이자 ‘찐 아미’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BTS 춤을 선보이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최정9단 #항저우아시안게임 #BTS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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