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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나 쉐겔 교수 “우크라이나 전쟁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

글 이지은 프리랜서 기자

입력 2022.03.23 10:30:01

국내 언론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는 말이 나온다.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 얘기다. 한국에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자 숨 돌릴 틈 없이 지내는 그가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꼭 이길 것이지만, 그 후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파괴하고 있다.”
노란색과 하늘색 천을 손수 덧대 만든 우크라이나 국기를 가슴 한쪽에 단 채 올레나 쉐겔 한국외국어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가 말했다. 결연하지만 먹먹한 목소리다. 그는 22년 전 한국에 왔다.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동양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서다. 2006년 한·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을 비롯해 수차례 정부 간 회담을 통역한 그는 2월 24일(현지 시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가장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시위를 매주 진행하고, 3월 7일 국내 종교계와 시민 단체가 힘을 합쳐 만든 ‘우크라이나 전쟁난민 긴급구호연대’(구호연대) 민간대사를 맡았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를 돕고자 어떤 활동이든 마다하지 않는 쉐겔 교수를 3월 16일 만났다.

“부모님, 평생 일군 삶의 터전 잃어”

국내에서 반러시아, 반전 관련 여러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늘 말하는데 ‘주도’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한국어가 능통하니 언어로 우크라이나인을 대표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기 위한 시위는 매주 진행 중이다. 규탄 시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우크라이나를 도울 다른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구호연대 활동도 그중 하나인가.

그렇다. 종교 단체, 시민 단체 등 여러 모임이 전쟁 난민 구호를 위한 연대체를 결성해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남북평화재단·한국YMCA·한국정교회 등 10여 단체가 뜻을 모았다. 구호연대는 우크라이나 상황을 전하는 미디어팀 활동도 한다. 우크라이나의 젊은 학생들이 직접 촬영한 현지 영상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각 단체 유튜브 채널을 통해 내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을 알려서 우크라이나를 향한 마음이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현재 우크라이나 상황은 어떤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약 3주가 흘렀다. 러시아군은 수도 키이우로 계속해 진격 중이고, 우크라이나는 저항하고 있다. 예상보다 사태가 장기화해 우려스럽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지만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전쟁에서 이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지 걱정이다. 언론에도 보도된 것처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 등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크겠다.

부모님과 여동생, 어린 조카는 폴란드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전쟁 지역에서 벗어난 점은 다행이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있는 어린 조카가 폭탄·방공호 같은 단어를 안다. 부모님은 평생 동안 일군 삶의 터전을 잃었다. 내 가족이 전쟁 난민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부모님은 나이가 많아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 폴란드나 몰도바 등 이웃 나라들의 도움이 고맙지만 그것에 의지해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앞으로 가족들이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될지 가늠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시민도 많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 남동부 멜리토폴 지역에 있는 지인과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 수만 명의 민간인이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남부 미콜라이우주에 있는 외삼촌 역시 3일째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곧 연락이 오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를 상대로 ‘인도주의 통로 마련 협상’을 계속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황이다.

일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쟁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유튜브 방송이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뉴스를 끄면 보이지 않는 소식일 뿐이지만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24시간 계속되는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뉴스 보도만으론 이런 상황을 여실히 전하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유튜브가 이 점을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려스럽다.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가짜 뉴스가 특히 그렇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왜곡돼 전달되고 있다. 전쟁 지역에 접근하기 쉽지 않아 사실 확인이 힘들어 더 그런 듯하다.


쉐겔 교수는 “러시아발(發) 가짜 뉴스도 많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 도구로 인터넷 공간이나 러시아 국영방송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나치’로 비유하는 러시아 방송이 많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한 왜곡 보도도 멈추지 않는다. 국영방송만 접하는 러시아 사람들은 그 소식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쌓여 이 전쟁이 발생했다고 본다.”

“소련 벗어난 후 민주주의 투쟁 시작돼”

이번 전쟁의 원인을 무엇이라 보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시도한 것을 전쟁 이유로 들고 있지만 그건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정체성 싸움의 영향으로 보는 게 맞다. 러시아는 독재주의 역사를 지닌 반면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치하에서 벗어난 뒤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온전한 자유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200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러시아에 대항해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오랫동안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그 흔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 스스로 소련식 독재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민주주의적 인식을 갖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2004년 부정선거 규탄을 위해 일어났던 ‘오렌지 혁명’, 2013년 친러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탄핵을 위해 국민들이 뭉쳤던 ‘유로마이단 혁명’은 그 깨달음이 폭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피를 흘려서라도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웠다.

우크라이나 내부적으로 돌아봐야 할 문제가 있다면.

우크라이나는 아직 시민사회가 다 형성된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시민사회의 힘을 간과해온 점이 그 어느 때보다 뼈아프다. 우리 스스로 깨닫고 반성하며 더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속적 관심으로 우크라이나에 희망 주길”

이번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군사적 대응이 없는 건 아쉽지만 대러 제재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금보다는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동원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을 당시 국제사회가 보인 싸늘한 반응을 아직 잊지 못한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부서지고 불탄 우크라이나 풍경. 이번 전쟁 이후 곳곳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부서지고 불탄 우크라이나 풍경. 이번 전쟁 이후 곳곳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쉐겔 교수가 떠올린 건 2014년 2월의 일이다. 한 무장 세력이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자치공화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크림반도의 분리독립을 요구했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이 ‘크림반도 민병대’라고 주장했지만 추후 러시아군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의회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개입을 승인하고 푸틴 대통령은 병력을 보내 우크라이나군의 백기 투항을 받는다. 이후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의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이 모든 과정이 20일 만에 이뤄졌다. 러시아가 스스로 군사 개입의 명분을 쌓고 병력을 보낸 이 사건은 이번 침공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쉐겔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당시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국제적 차원의 대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2014년 당시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대해 지금 수준의 경제 제재를 가했다면 이번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국제사회의 미적지근한 대응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한층 대담해질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한국이 러시아에 대한 독자적 제재에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제 정세 속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한국 상황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한국이 국제적 차원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긴 시간 동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어 감사하다.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은 분명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내 인터뷰 기사 가운데 내가 한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처럼 표현된 부분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행여나 호의로 보내주는 마음들이 다칠까 우려돼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전쟁을 시작한 건 러시아다. 종전을 위한 열쇠 역시 러시아가 쥐고 있다. 누군가 푸틴 대통령에 대해 물으면 나는 “푸틴은 더 이상 이성이 없는 곳에서 이성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푸틴이 미쳤다는 말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푸틴의 목표가 비이성적이라는 의미다.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한 나라를 초토화시키는 전쟁이 이성적 판단의 결과일 리 없다. 지금 상황을 보면 러시아의 공격은 우크라이나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나토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

내가 여동생에게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한 적이 있다. 여동생은 “내 나라에서 내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하더라.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에서 살아갈 미래를 꿈꾸며 버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희생되고 있지 않은가. 우크라이나에게 전쟁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처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 #올레나쉐겔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AP뉴시스 



여성동아 2022년 4월 7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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