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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story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엄마 조혜련

욕심을 내려놓으니 행복이 찾아왔어요

글 김지은

2021. 02. 01

요즘 조혜련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목구비가 바뀐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예쁘고 편안해 보인다. 무던히도 사춘기를 심하게 앓던 두 아이도 이제는 훌쩍 자라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행복이 찾아오더라’. 그가 알려준 삶과 교육의 지혜다.

“예전엔 그랬어요. 난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괴로운 일만 생길까, 왜 결과는 매번 비뚤어지는 걸까.” 

되짚어보면 정말 그랬다. 1993년 KBS 개그맨 10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조혜련(51)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억척스런 캐릭터로 주목받았다. 1990년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MBC ‘좋은날’의 ‘울엄마’에서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는 억척스런 경석이 엄마 역할을 맡았는데, 캐릭터의 실제 모티프가 된 인물이 다름 아닌 조혜련 자신이었다. 10대 시절부터 시장에 쑥갓을 내다 팔며 돈을 벌어야 했을 정도로 가난이 익숙했던 그는 학력고사 시절 명문고로 손꼽히던 안양여고에 입학하고도 어머니로부터 ‘형편이 어려우니 대학은 포기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말에 오기가 생겨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공부해 한양대에 입학한 경험이 바로 경석이 엄마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이다. 

“지난 연말 KBS ‘6시 내고향’ 안양시 특집편에 출연했다가 당시에 저랑 같이 장사를 하시던 분을 만났어요. 안양예술공원, 삼막마을 같은 명소들을 소개하면서 제가 학창시절 장사를 하던 안양중앙시장에도 들렀거든요. 아직도 딱 그 자리에 계시더라고요.” 

하루하루가 전쟁 같기만 하던 10대의 소녀가 중년의 여인으로 무르익는 동안, 소녀의 앳된 손이 못내 안쓰럽던 30대의 젊은 아낙은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8남매 틈바구니에서 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자랐던 조혜련의 유년은 또래의 그것에 비해 참 고달펐겠다, 싶다. 

조혜련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던 것도 그런 내면의 조바심과 강박이 불쑥불쑥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봐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냈으나 그 안에는 늘 생존본능에 가까운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그 생존본능이 때로는 과도한 탐욕이나 도전욕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가끔 TV에 나오는 예전 자료화면 속 제 모습을 보면 저도 깜짝 놀라요. 눈에 독기를 가득 품고 있더라고요. 내가 먼저 해내야 하고, 내가 제일 잘 해야 하고, 내가 제일 튀어야 하고, 그런 욕(慾)들이 저를 무섭게 몰아쳤던 것 같아요. 공인이니까 잘 사는 모습,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강박처럼 생각했던 것도 있었고요. 그러다보니 항상 무겁고 버거웠어요. 어릴 적부터 생활력, 자립심이 워낙 강했지만 사실은 그런 것 때문에 늘 괴롭고 힘들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으니 더 많이 오버하게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서 ‘개그우먼 조혜련’ 하면 으레 떠오르던 분주하고 억척스러운 분위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출연한 MBC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도 그는 김숙, 박나래 등 쟁쟁한 후배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기꺼이 박수를 쳐주는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단다. 어느 프로그램에서건 누군가 자기보다 더 튀거나 잘한다 싶으면 속이 상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를 다그쳐대던 모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안도감에 슬그머니 웃음도 났다고. “이제서야 일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는 그는 확실히 평온하고 행복해보였다.

일에 올인하느라 아이들의 마음 헤아리지 못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그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있을 만큼 무서운 일이다. 2012년 이혼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사람들 앞에 감히 ‘아프다’ ‘힘들다’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늘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스타의 불행이 사람들에게 어떤 실망을 안길지, 대중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사람들의 반응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날아갔죠. 거기서 8개월 정도 머물며 중국어를 공부하고 방송활동도 재개하게 됐어요.” 

2005년 자력으로 일본 진출의 꿈을 이루었던 그는 일본 진출 1호 개그우먼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뛰어난 어학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당시 6개월 만에 프리 토킹이 가능할 정도로 단숨에 일본어 실력을 쌓기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참을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던 그때가 그와 가족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할 나이였던 두 아이들이 바쁜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걸 알아챈 건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은 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의 연예계 생활 역시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어 말로 웃겨야 한다는 강박은 종종 뜻하지 않는 실수를 낳았고, 그런 순간들이 한일(韓日)간의 예민한 정치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왜곡된 형태로 전달되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그런 소문들이 루머임이 밝혀졌으나 힘들다, 외롭다 한마디 하지 못하고 ‘나는 다 잘할 수 있다’만 보여주려 했던 강박은 그를 점차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었다. 

“2016년 TV조선 리얼리티 예능 ‘엄마가 뭐길래’ 출연 당시가 절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땐 아이들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라 저도 아이들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거든요. 당시 그 방송이 많은 걱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저와 제 아이들이 겪은 과정이 그다지 특별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방송이라 유독 극단적인 면이 많이 노출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부모와 자식 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과정이잖아요. 당시엔 제 눈에 어린 아이로만 보이는 자식들이 급격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라 많이 힘들었지만요. 막상 방송에서 하차하고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제일 가슴에 박힌 건 중학교 내내 전교 1등만 하던 딸 윤아(21)가 명문고에 입학한지 두 달 만에 자퇴를 하고 던진 말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건 공부가 좋아서가 아니라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는 딸의 아픈 한 마디는 긴 세월 묻어두고 살았던 그의 유년시절을 반추하게 했다. 8남매가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이 복작대는 집에서 딱 중간에 낀 다섯째인 그가 부모님의 애정 어린 손길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집에 말도 없이 두 달간이나 친구네서 지낸 적이 있었어요. 엄청 혼날 거라 생각하고 돌아갔는데 막상 부모님은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매일 새벽같이 쑥갓단 묶어 시장에 나갔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늦게나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으니, 평소에도 얼굴 마주할 새가 없었거든요. 그때도 그냥 그런 줄로만 아셨던 거예요. 생계로 바쁜 와중에 아이가 여덟 명이나 되니 일일이 건사하기도 힘드셨을 거고요. 그땐 그게 어찌나 서운하고 허탈하던지,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조금이라도 관심 받고, 튀고 싶어서요.”

심한 성장통 앓은 후 어른이 된 아이들

조혜련과 아들 우주, 딸 윤아가 
눈 오는 날 함께한 모습. 
전쟁 같던 아이들의 
사춘기가 지나간 뒤 
가족 모두 성장한 느낌이다.

조혜련과 아들 우주, 딸 윤아가 눈 오는 날 함께한 모습. 전쟁 같던 아이들의 사춘기가 지나간 뒤 가족 모두 성장한 느낌이다.

삶에는 연습이란 것이 없다. 그저 모든 일에 열심히,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자라야 했던 아이들의 사춘기는 여느 집 아이들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힘겹고 어려웠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부모에게도 연습할 시간이 있고, ‘부모교육’이란 걸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자퇴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말했어요. 엄마가 정말 바라는 건 네가 행복해지는 거라고요. 학교는 다닐 수도 안 다닐 수도 있는 거고, 고등학교 같은 건 정말 안 나와도 된다고요.” 

그렇게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옆에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자퇴 후 기나긴 겨울잠을 자듯 누워만 지내던 윤아는 1년 후 잠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 것처럼 스스로 툭툭 털고 일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장학금까지 받고 미국으로 떠났던 아이는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 지낸 1년이 정말 컸던 거 같아요. 미국의 아이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대부분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는데 학비가 워낙 비싸니까 아르바이트를 엄청나게 하잖아요. 그런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더라고요. 처음엔 코로나19로 인해 귀국했던 건데 최근에는 학교를 한국에 있는 대학으로 옮기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외에도 영어 과외 수업 등 이것저것 하면서 새로운 학교를 찾고 있어요.” 

윤아보다 더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아들 우주(19)였다. ‘엄마가 뭐길래’ 촬영 당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대화도 거부한 채 게임만 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울화통을 터트렸던 우주는 어느새 훌쩍 자라 게임 기획으로 유명한 대학의 장학생이 되었다. 군대에 가게 되면 월급을 모두 모아 제대하겠다는 대견한 말도 하고 있다. 

“그만두기로 따지면 우리 우주가 우주 최강이었죠. 축구하다 그만두고, 드럼 치다 그만두고, 국제고와 기독교학교도 다니다 그만두고요. 재작년엔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다 관두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뭘 하고 싶니’ 물었더니 게임하고 싶다고 답하더라고요” 

우주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선 것은 2014년 재혼한 남편이었다. 남편은 우주가 ‘아빠’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따를 만큼 멋진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덕분에 우주는 남편이 추천한 게임아카데미를 다니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단번에 패스하고 1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게임 기획서를 작성해 6개 대학의 수시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화해의 시작

힘겹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사춘기는 그리 길지 않다’는 꿈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사춘기는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그때는 말 잘 듣고 얌전하기만 한 아이는 어쩌면 어른으로 여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때로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를 낭떠러지 아래로 물어다 버리듯, 그의 엄마가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도록 내보냈듯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엄마 없이도 혼자 힘으로 해내야 하는 절박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부모의 역할은 그 피나는 과정을 담대하게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마냥 안타까워 무엇이든 대신 해주다보면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걸 조금 쎄게 사춘기를 보낸 두 아이를 키워본 엄마 조혜련이 세상의 또 다른 엄마들에게 해주고픈 조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이 대견해지는 순간이 온다고. 

“사실 최근 제 생일에 애들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요. 다른 날도 아니고, 엄마 생일은 좀 근사한 선물 같은 것도 해줄 법한데, 저녁이 다 되도록 축하한다는 인사 한마디 없더라고요. 제가 먼저 생일이다 했더니 ‘어, 몰랐어. 축하해’라고 하더군요.” 

영영 남이 되어버린 듯 투닥대던 사춘기 시절에 비하면 바랄 것 없이 화목한 가족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좀 더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엄마를 챙겨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있다. 늘 가까이 있어 더 소홀하고 외면해버리기 쉬운 서로의 진심 같은 걸 비뚤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살갑게 보듬어주었으면 하는 거다. 

“두 아이 모두 독립해서 따로 살다보니 아이들이 채소나 과일 같은 걸 챙겨먹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새벽배송 서비스로 토마토를 사서 보냈는데 그런 걸 왜 보냈냐고 하더라고요. 걱정되는 마음에 그런 건데 너무 몰라주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물론 서운한 일이 한쪽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tvN ‘신박한 정리’ 촬영 때 우주가 예전에 받았던 상패와 낡고 냄새나는 축구장갑 같은 걸 버리지 않고 예쁘게 진열했었는데, 그걸 보고 우주가 ‘엄마는 이걸 버리려 했다’며 울음을 터트려 난감했었다. 

“사실 ‘신박한 정리’에 출연하기 전까지 그 메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표면이 삭아서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축구장갑을 왜 안 버리고 놔두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제 눈에는 별것 아닌 것들이 아이들에겐 그렇게 소중한 의미가 담긴 물건이었던 거죠. 사람마다 성격과 관심사가 다 다른데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 다름을 인정하는 데 서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귀 기울이기보다는 ‘전공이 뭐가 중요해, 일단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라’고 다그치게 되고,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로서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해버리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도 알고 있잖아요. 인생이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걸요. 대학에 들어갔다고 그 후가 탄탄대로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조혜련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고 도전적이다. 지난해 여름엔 신곡 ‘사랑의 펀치’와 ‘아줌마 좀 봐!’를 준비하면서 줌바댄스지도자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어디에서나 별다른 운동기구 없이 즐길 수 있는 댄스 스포츠인 태보와 줌바를 테마로 한 트로트곡인 ‘사랑의 펀치’와 ‘아줌마 좀 봐!’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운동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운 이들이 자연스럽게 실내운동을 할 수 있도록 흥겨운 비트를 가미한 곡이다. 2003년 큰 인기를 모은 그의 태보 다이어트 비디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남편의 제안으로 기획되었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신앙생활은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될 만큼 만족스럽다. 최근에는 컴패션·월드비전 같은 해외아동 후원단체를 통해 세 아이의 후견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돈이나 명예가 되는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충만하게 빛나던 때가 있었나 싶도록 행복하다고. 

“지금은 인도네시아와 한국에 있는 여자아이 2명, 남자아이 1명을 후원하고 있는데 여력이 된다면 더 많은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어요. 남편과 저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이 아이들이 저희에겐 새로운 축복이거든요.”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전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준비하던 연극을 다시 하게 될 듯하고, 그 외 뮤지컬이나 웹드라마,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을 디렉팅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차근차근 성실하게 공부하고 전문성을 쌓아나가는 것이 먼저이기에 요즘엔 관련된 책들도 하나둘 찾아보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악바리 같고 조급해 보이던 예전의 조혜련이 아닌 한결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의 엄마이자 아내, 만능 엔터테이너 조혜련으로 한 발 한 발 느긋한 걸음을 내딛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새로운 전성기가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사진 홍중식 기자 
사진제공 조혜련 헤어 이수미(코코미카) 메이크업 김혜영(코코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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