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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오빠 남진 백스테이지에서

“라이벌 나훈아, 떠들썩했던 스캔들,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는 노래에 대한 애정…”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3.04.16 16:49:00

3월 16일 가수 남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열었다.
공연 제목은 ‘내 노래의 이력서’.
데뷔 50년을 앞두고 스스로 가수 생활을 점검하고,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자리였다.
흔히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늘의 이치에 가까이 닿는다고 말한다.
남진이 노래를 대하는 자세도 그랬다.
온갖 풍파를 이겨내고 항구에 다다르는 배처럼 노련하고 고요했다.
영원한 오빠  남진 백스테이지에서


남진(67)을 만난 건 공연 하루 전날, 세종문화회관에서였다. 더블브레스트 재킷에 뉴스보이캡을 매치한 모습은 한눈에도 남진이었다. “아따, 손 한 번 잡아봅시다” 하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스태프에게 일일이 악수부터 건넸다. 매니저 뒤에 숨어 복화술로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요즘 스타들에 비하면 확실히 격의 없이 친근했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그는 상경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입에 착착 감기는 전라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했다. “왠지 낯간지럽고, (서울말을 쓰면) 남진이 아닌 것 같아서” 서울말 익히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도 있다. 무대 위에 서는 걸로 남에게 보여주는 건 충분하다. 사투리를 고치면서까지 남들 눈 의식하며 가식적으로 살고 싶진 않다는. 그는 평균대 위에 선 체조 선수처럼 스타와 생활인으로서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텅 빈 객석을 눈으로 훑었다. 남진 평생의 희로애락이 무대와 객석에 있다. 공연 날을 받아놓고 그 넓은 객석을 어떻게 다 메울까 하는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샌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가장 큰 희열을 준 곳도 바로 무대와 객석이다. 특히 세종문화회관은 그와 인연이 각별하다. 1971년 월남 파병에서 돌아와 첫 단독 콘서트를 연 곳이 바로 여기다. 그는 40년도 더 된 일인데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3년 만에 컴백하는 무대였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했겠어요. 일찍 와서 2층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받으며 밖을 내다보니 매표소에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거예요. 당시는 예매도 없었고, 100% 현장에서 표를 사야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이제 망했다. 재기라는 게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한 30분 후에 다시 밖을 내다봤는데 그 사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건물을 두 바퀴 이상 감고 있더라고요. 오죽하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겠어요. 가수 생활을 하면서 한시도 그때를 잊은 적이 없어요.”

부러울 것 없었던 목포 도련님 풍각쟁이가 되기까지
남진은 목포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 신문사 사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고(故) 김문옥 씨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남진. 당시 그의 부친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조병옥 선생 등이 전라도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고 김대중 대통령도 종종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남진은 신익희·조병옥·김대중 같은 정치인들과 한방에서 자면서도 마음은 김승호·김진규 같은 영화배우들에게 더 끌렸다. 유명 배우들이 내려오는 날이면 목포 바닥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어린 남진의 가슴은 나도 저들처럼 인기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부풀어 올랐다.

▼ 어릴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고, 대학도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왔는데 가수가 됐네요.
“우연한 자리에서 노래를 한 번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그때 당시 가수로는 최희준 선배가 가장 인기 있었는데 발성이나 소리가 참 좋았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희준이 형 모창을 좀 했죠. 사람들이 구분을 못할 정도로 잘했어요(웃음). 주로 팝 스타일의 곡을 부르다가 한 번은 트로트를 해보라고 해서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곡을 불렀는데 뜻밖에 그게 히트를 했어요. 내가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니 노래를 잘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팝을 부르던 사람이 트로트를 하니까 색달랐던 것 같아요. 이상해서 성공한 노래예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죠. 남진이 최희준 스타일로 하면 최희준보다 잘해도 결국은 모창밖에 안 돼요.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게 중요하죠.”

▼ 장남이라 집안에서 기대가 컸을 텐데,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아버지한테는 말도 못 꺼내고 몰래 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4~5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거든요. 그래서 모르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TV를 켰다가 저를 보신 것 같더라고요. 저놈 당장 잡아오라 해서 끌려갔더니 ‘가업을 이어야 할 놈이 풍각쟁이가 웬 말이냐’고 노발대발하시더라고요. 그러곤 얼마 못 가 돌아가셨어요. 아마 눈감으실 때 ‘이제 우리 집은 망했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런 면에선 큰 불효를 했죠.”

영원한 오빠  남진 백스테이지에서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박수도 받아본 사람만이 그 느낌을 알아요.” 남진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한다.



▼ 집안 배경이 좋다는 건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다른 스타들에 비해 헝그리 정신은 좀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랬죠. 노래는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거고, 그중에서도 서늘하고 힘든 감정이 노래로 표현되면 더 가슴에 와 닿잖아요. 그런데 나는 고생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절절한 노래를 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젊었을 때 남들처럼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고요. 내가 지금까지 노래에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하는 원동력이 바로 그거예요. 그때 미련 없이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열심히 안 했을지도 몰라요. 뒤늦게 철들어서 진짜 가수의 길을 가게 된 거죠.”



▼ 나중에라도 정치를 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톱스타에 아버지 후광까지 있으니 정치인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은데요.
“한 번은 목포에서 출마해보라는 연락이 왔었어요. 내가 싫다고 하니 우리 어머니한테까지 연락을 한 모양이더라고요. 당시 고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이 우리 어머니에게 ‘형수 형수’ 했으니까. 어머니가 한번 나가보라고 하는 걸 ‘절대 안 할 거니까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말라’고 못을 박았어요. 나는 정치랑 안 맞아요. 일찌감치 그걸 알았어요.”

이대로 잊히기엔 아까운 나훈아, 건강 회복해 다시 돌아올 것
데뷔 초 남진은 헌칠한 키와 남자다운 외모로 큰 인기를 누리며 가수 활동 외에도 ‘형수’ ‘그리움은 가슴마다’ 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그는 1968년 홀연히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 왜 하필이면 군기가 센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나요.
“어릴 때부터 모름지기 남자는 해병대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육군 몇십 명이 해병 한 명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거야. 딱 봐도 멋있었어요.”

▼ 베트남에서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하던데.
“그랬죠. 우리 부대가 최전방에 있었으니까. 포탄이 바로 옆에 날아와 꽂혔는데 천만다행으로 불발되는 바람에 살아난 적도 있고, 옆에 있던 수통에 총알이 날아와 박힌 적도 있고…. 그때는 항상 죽음이 곁에 있었어요. 돈이나 인기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게 가장 소중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 군에서 스타니까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나요.
“나한테 온 위문편지가 베트남에 파견된 군인 전체한테 오는 위문편지보다 많았어요. 그래도 군대니까 내가 스타여서 어쩐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꿨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병대는 규율이 엄청나게 엄했어요. 멋모르고 까불다가는 두드려 맞기 십상이었지.”

가까스로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연예계에 컴백했을 땐 나훈아라는 걸출한 스타가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남진 대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최근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엠넷은 H.O.T-젝스키스, 소녀시대-원더걸스를 제치고 대한민국 가요사의 가장 치열했던 라이벌로 남진과 나훈아를 꼽았다. 요즘 가요계는 10대와 20대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당시 두 사람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의 사랑을 받았다. 국민 전체가 남진 팬과 나훈아 팬으로 나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으로 지역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남진이 곱상한 외모였다면 나훈아는 야성미 넘치는 스타일이었고, 남진은 부드러운 창법으로 편안하게 노래를 부르는 반면, 나훈아는 비틀고 꺾는 창법을 구사했다. 남진은 1977년 톱 가수 윤복희와 결혼했다가 6개월 만에 이혼했고, 나훈아는 한 해 전인 1976년 당대 최고 배우였던 김지미와 결혼했다가 파경을 맞았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대척점에 있었다.
이 때문에 팬들도 극과 극으로 갈렸다. 가요대상 시상식이 있는 날 한쪽은 축제장이 됐고, 다른 한쪽은 초상집이 됐다. 남진은 “누가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였다. 그 덕분에 우리도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당시에는 분위기가 살벌했던 것 같아요. 1972년 나훈아 씨가 공연 중 피습을 당했을 땐 그 배후가 남진 씨라는 소문도 있었잖아요. 나중에 거짓인 걸로 확인됐지만요.
“그런 일이 있었죠. 사실 당시 범인이 훈아 씨를 습격하기 이틀 전 새벽에 우리 집에 먼저 왔었어요. 그때 내가 월남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깡다구가 보통이 아니었죠. 혼쭐을 내서 보냈더니 훈아 씨를 찾아간 거예요. 그 범인이 나중에 목포 고향 집을 찾아가 방화까지 했어요. 남진-나훈아 라이벌 구도가 재미있으니까 그런 사건들도 생기고, 자꾸 전설 같은 이야기들도 만들어지고 그랬죠.”

▼ 라이벌이라고 해도 오랜 세월 함께 활동하면서 정이 쌓였을 법 한데, 두 분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관계였나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는 가요계의 위아래가 엄해서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진 못했어요. 또 훈아 씨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

▼ 가수로서 나훈아 씨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월남에서 돌아와 처음 훈아 씨 노래를 듣는데 대번에 멋진 가수가 나왔구나 싶어 무릎을 탁 쳤어요. 누구도 갖지 못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가수죠. 정말 대단했어요.”

▼ 나훈아 씨가 2008년 스캔들 기자회견 이후 잠적했습니다. 최근에는 이혼 소송에 건강까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안타깝죠.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인데. 하지만 워낙 건강한 친구라 곧 털고 일어나 돌아올 거라고 봅니다.”

▼ 예나 지금이나 톱스타가 되면 스캔들을 비켜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연예계는 남진·윤복희 스캔들로 떠들썩했습니다. 얼마 전 윤복희 씨가 한 방송에 출연해 “남진 씨와 애정 없는 결혼을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죠.
“윤복희 씨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얘기할 것도 없는 게, 당시 일에 대해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이 없어요. 실수였다는 것밖엔. 때로는 고통이 축복이 되는 것처럼 나는 살면서 어떤 것을 이루기에 앞서 항상 쓰라린 고통을 겪었어요. 윤복희 씨와의 일도 그런 쪽으로 보면 약이 됐던 경험이었죠.”

▼ 나훈아 피습 사건 때도 그렇고, 윤복희 씨와 헤어질 때도 이런저런 루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헛소문이라는 게 밝혀졌죠.
“그건 내 자존심이었어요. 지나간 일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하고 그러는 건 성격상 맞지도 않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거다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영원히 안 밝혀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사람이 참 희한한 게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했던 일도 다 잊히더군요. 지금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축복받은 반세기, 도 닦는 기분으로 노래해

영원한 오빠  남진 백스테이지에서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남진은 점차 방송 출연 기회가 줄었다. 그는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인 재미교포 강정연 씨를 만나 결혼했다. 강씨는 연예계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평범한 주부. 남진은 “우리 집사람은 내가 뭘 하든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아내가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했으면 피곤할 수 있었을 텐데, 아내가 무심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고 말했다. 미국 생활은 20대 초반부터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슬하의 1남3녀 중 세 딸은 모두 3년여의 미국 생활 중 얻었다. 둘째와 셋째는 심지어 11개월 차로 동갑이다. 막내인 아들은 1983년 귀국 당시 아내 배 속에 있었다.

▼ 부부 금슬이 좋으셨나 봐요.
“그때는 달리 하는 일도 없고 그랬으니까…(웃음).”

▼ 자녀들이 이제 모두 장성해서 든든하겠어요.
“그렇죠. 아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딸 셋은 한국에 있는데 큰딸은 몇 년 전 결혼해서 일가를 이뤘죠. 2년 전 손주를 얻었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요즘 그 녀석 보는 재미로 살아요. 우리 아이들 키울 때는 나도 처음 아빠가 돼서 당황하고 얼떨떨했던 데다, 아이들이 연년생이라 어머니가 아이들마다 유모를 붙여주셔서 스킨십 같은 것도 안 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참 미안한 일이죠.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 못해줬던 것들을 손주한테는 아끼지 않고 해주려고 해요.”

▼ 자녀 중 한 명은 아버지를 이어 가수를 했을 법도 한데.
“우리 일이 소질만 갖고는 안 되고, 정말 탁월해야 성공할까 말까 해요. 우리 아이들은 이쪽 일에는 그 정도 재능도 없고 관심도 전혀 없었어요. 한 놈이라도 한다고 했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오히려 잘됐다 생각해요.”

▼ 미국에 있었던 3년이 베트남전에 이어 가수 생활에 두 번째 공백인데, 컴백을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한국에 돌아와보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더군요. 물론 다시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그때 들고 나온 노래가 ‘빈잔’이었는데, 다행히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어요. 변함없이 지지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게 참 뭉클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국 생활이 가수 생활의 권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 가수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무대에서 팬들과 공감할 때 행복하죠.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박수도 받아본 사람만이 그 느낌을 알아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데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땐 떠나야죠. 어떨 땐 두려워요. 생각보다 그런 날이 빨리 오지 않을까 싶어서. 이 소중하고 귀한 걸 누가 놓고 싶겠어요. 하지만 인생이란 게 보물을 언제까지나 손에 움켜쥐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 최선은 다하고 있어요. 30년 전에 술 끊고 20년 전부터는 담배도 끊었어요. 하루 몇 시간씩 운동도 하고….”

▼ ‘오빠부대’의 원조인데, 이젠 ‘영원한 오빠’로 불리더라고요.
“언제 들어도 그 ‘오빠’라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웃음). 젊었을 때는 인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팬들에게 고맙고 짠해요. 말이 쉽지 반세기 가까이 사랑받았다는 건 큰 축복이죠.”

▼ 노래 말고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 노래하길 잘했지.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고 싶어요. 더 멋진 가수가 돼야지.”

▼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잘한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후회는 많아요. 부족한 게 없었기 때문에 늦게 정신을 차린 게 가장 아쉽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약이 됐어요.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바꿔가느냐가 인생의 포인트죠. 누구나 살면서 굴곡을 겪기 마련이지만 나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만큼 그분들을 실망시켜드려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흔히 열정은 젊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진은 나이들어서까지 치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게 한다. 역시 ‘영원한 오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여성동아 2013년 4월 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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