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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950m 한라산을 오르다

한여진 기자의 제주도 여행기

글&사진·한여진 기자

입력 2011.09.06 09:54:00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티비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 하늘 아래로”

지난봄 ‘한 달에 한 번 산에 오르자’며 등산화를 샀습니다. 등산화 사던 날 커다란 전국 지도를 방바닥에 쫙 펼치고 앞으로 갈 곳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설레기도 했죠. 봄에는 지리산, 여름에는 한라산, 가을에는 설악산을 가겠노라며 굵은 펜으로 별표도 치고요. 가격표를 떼지도 않은 등산화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모셔두고 지내길 4개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던 등산화가 언젠가부터 보기만 해도 한숨 나오는 애물단지가 돼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7월 말, 여름이 가기 전에 등산화를 개시하겠다고 마음 먹고 가볼 만한 산을 물색하던 중 한라산이 눈에 들어왔어요. 해발 1950m, 대한민국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제주도로 가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4박 5일 일정으로 왕복 비행기표만 끊고서 말입니다.
숙소는 만화가 ‘메가쇼킹’이 7월 초에 오픈한 게스트하우스 ‘쫄깃센터(010-3230-1689)’와 30대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레이지박스(070-8900-1254)’, 80개국을 여행한 뒤 제주도에 정착한 말레이시아 여인의 ‘아일랜드 게스트하우스(070-7096-3899)’ 중 고민하다 협재해수욕장에 위치한 쫄깃센터로 결정했고요.
여기서 잠깐! 요즘 제주도를 여행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게스트하우스가 인기예요. 올레길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 올레길 근처에서 하루 2만원 정도로 저렴하게 지낼 수 있고, 여행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각광받고 있죠. 최근 오픈한 게스트하우스는 홍대 앞 카페를 제주도에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에 펜션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씩 휴식을 취하다 가는 이들도 많더라고요.
여행 콘셉트는 ‘천천히 걸으면서 찬찬히 보고 조용히 느끼기’로 정하고 자동차를 렌트하는 대신 시외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답니다. 드디어 제주로 가는 날,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제주의 푸른 밤을 노래하며 등산화 하나 배낭에 넣고 제주도로 고고싱~!

해발 1950m 한라산을 오르다


1 협재해수욕장이 속해 있는 올레길 14코스에서 바라본 비양도 모습.
2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950m 한라산 등반이 이번 여행의 목표.
3 홍대 앞 북카페처럼 꾸민 게스트하우스 쫄깃센터. 넓은 창 너머 보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해발 1950m 한라산을 오르다




사실 한라산을 오르고 올레길을 걷기로 계획했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습니다. 공항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고기국수, 해물짬봉, 흑돼지 수육 생각만 가득이었죠. ‘뭐 산이야 오르면 되고, 길이야 걸으면 되지’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오후 4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 공항에서 100번 버스를 타고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서부순환일주 버스를 탔습니다. 이때부터 좌충우돌 여행이 시작됩니다.
우선 제주도가 그렇게 넓은지 몰랐던 것! 시외버스는 동네마다 정차해서 제주시에서 협재해수욕장까지 가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더라고요. 렌터카를 타고 관광 코스를 투어하는 제주도 여행에 익숙한 터라 제주도가 서울의 3배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죠. 4박 5일 동안 올레길 2~3코스를 걷고 한라산에 오르고 맛집까지 투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란 예감이 스멀스멀 들었답니다. 해질녘 협재해수욕장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짐을 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으로 형성된 화산섬인 비양도와 푸른 바다, 붉은 노을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더군요. 석양을 마주보며 골목을 걷는데 올레 표시인 파랑과 주황색 화살표 표시가 보였어요. 이곳도 올레 코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제주도 올레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 밭고랑 등 제주의 자연스런 모습 속에 있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올레길을 걸어본 이들은 계속 찾아온다고 하네요. 다음 날 올레길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모슬포항에서 송악산, 산방산으로 이어진 올레 10코스 걷기에 도전했어요.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입고, 플립플롭을 신고 아주 편한 복장으로 말입니다.
마침 모슬포 5일장(1, 6일로 끝나는 날 장이 열림)이 열리는 날이라 장터 구경을 한 뒤 아침 겸 점심으로 모슬포 중국집 홍성방(064-794-9555)에서 해물짬봉(7천원)을 먹었답니다. 캬~ 맛도 맛이지만 그릇 넘치도록 수북하게 나오는 홍합, 꽃게, 오징어, 조개 등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죠. 먹고 또 먹어도 양이 줄지 않아 마치 요술 램프 같더라고요.
든든하게 속을 채운 뒤 올레길 걷기 시작! 올레길은 시계 방향인 순방향과 시계 반대방향인 역방향으로 걸을 수 있는데, 순방향은 파란색 화살표로, 역방향은 주황색 화살표로 표시돼 있어요. 저는 모슬포에서 시작해 산방산으로 가는 역방향이라 주황색 화살표를 쫓아 걸었답니다. 10코스는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 한여름인데도 걷는 이들이 많더군요. 바다를 보며 한참 걷다 보니 주황색 화살표가 넓은 밭을 가리켰습니다. 검은 돌담과 붉은 흙, 푸른 농작물이 어우러진 제주의 밭 풍경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작은 오름도 두세 개 오르고, 말들이 뛰어노는 넓은 풀밭을 지나니 송악산이 나왔어요. 5km 남짓의 짧은 거리였는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훌쩍 지났더라고요. 산방산까지 걸어가서 산방산을 오르고 싶었지만 내일 한라산 등반을 위해 여기서 멈추고 버스를 타고 다시 모슬포로 돌아가기로 했죠. 아~ 문제는 제가 멈춘 장소가 한 시간마다 버스가 들어오는 외진 곳이었다는 것. 10분, 20분… 처음에는 버스 찻길만 뚫어지게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죠. 그러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네 풍경이 너무 예쁜 거예요. 돌담 사이로 키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회관 앞에 오래된 나무 아래 낡은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찐 감자를 먹고 있는 할머니들, 저 멀리 보이는 말 엉덩이 모양의 우스꽝스러운 산방산….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버스를 타고 모슬포항으로 오는 내내 동네 모습을 생각하며 행복했습니다. 모슬포항 주변에는 제주도 별미인 고기국수, 밀면, 보말칼국수, 수육, 갈칫국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많아요.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산방식당(064-794-2165)의 밀면과 수육으로 결정했답니다. 저는 ‘육식 동물’로 통할 정도로 고기 요리에 일가견이 있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 수육은 처음 먹어봤습니다. 제주도의 맑은 공기와 물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가 그 비결이 아닐까 추측하면서 한 접시 뚝딱 비웠죠.
올레길의 매력에 흠뻑 취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보니 티셔츠와 반바지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몸이 까맣게 타 있었어요. 얼굴은 촌부처럼 검붉고! 그제야 완전무장하고 올레길을 걷던 사람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올레길을 걸을 때는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팔 토시와 목에 손수건을 두르는 건 필수. 맑은 제주 공기와 햇볕으로 인해 10분만 노출돼도 저처럼 우스꽝스런 몸이 되거든요.

해발 1950m 한라산을 오르다


1 올레길을 걷다보면 몸집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젊은이들도 종종 만난다.
2 협재해수욕장의 밤은 초록빛 비양도와 에메랄드빛 바다, 붉은 석양이 어우러져 환상 그 자체!
3 모슬포항의 홍성방에서 맛본 해물짬봉.
4 모슬포 5일장에는 제주도 먹을거리, 토산품이 가득하다.
5 올레길 10코스에서 만난 조랑말.

셋째 날 새벽 5시30분, 따르릉~ 알람시계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오늘은 한라산 등산하는 날입니다. 한라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성판악과 관음사 두 코스인데, 협재에서 가려면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성판악행 버스로 갈아타고 2시간 넘게 가야 하고, 오전 9시가 넘으면 성판악 입구에서 등반을 막기 때문에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죠. 성판악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물 한 병과 우비를 사서 가방에 넣고 한발 한발 오르기 시작.
한라산의 신비로운 자연에 감탄하며 룰루랄라~ 등산을 했습니다. 성판악휴게소(해발 750m)에서 정상 백록담(해발 1950m)까지 총 9.6km거리, 보통 사람 걸음으로 9시간30분 정도면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오후 1시까지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지 못하면 정상에 오를 수 없다고 해서 처음에 속도를 좀 냈습니다. 아~ 그런데 등반로가 흙길이 아니고 돌밭이었습니다. 비가 온 뒤라 돌이 미끌거려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등산 스틱을 짚고 가네요. 생각보다 올라가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한라산의 멋진 경치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사실 발 끝만 보고 걸어서 기억에 남는 건 온통 검은 돌뿐입니다. 4시간을 걸으니 진달래밭 대피소가 나왔습니다. 어제 산방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아침 일찍 서둘다 보니 빈속으로 왔는데, 먹을 수 있는 건 컵라면뿐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미리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먹더군요. 이 더위에 컵라면이라니! 흑~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2km 남짓 남은 백록담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아~ 그런데 길이 더욱 험해졌습니다. 아래쪽보다 돌이 더 크고 울퉁불퉁하고 안개도 자욱해 힘이 두 배로 들더군요. 마지막 1km는 계단으로 돼 있어 무릎에 무리도 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정상 도착!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곳이 백두산 천지라고 했습니까? 변화무쌍한 날씨를 자랑하는 제주도의 백록담도 천지 못지않게 보기 힘들다고 하는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가 싹 걷히고 햇볕이 반짝! 청명한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백록담이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부드러운 연둣빛 풀밭과 하늘의 구름이 비쳐 물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안 되는 백록담은 가히 환상이었습니다. 5분 정도 사진을 찍고 나니 다시 구름이 몰려와 백록담을 감췄지만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산할 시간. 풍경이 좋다는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관음사 쪽에는 대중교통이 없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성판악 방향으로 내려왔죠. 원래 산은 내려오는 길이 더 짧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한라산은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고 길게 느껴지더군요.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산까마귀 밥이 될 것 같아 근육 풀린 다리를 질질 끌고 겨우 내려왔죠. 한라산을 11시간 오르내리다 보니 저절로 묵언수행이 되더라고요. 성판악 입구에 도착해 한라산 등반 인증서도 받았습니다. 다음 날은 다리 근육통으로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게스트하우스와 협재해수욕장에서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한 후, 5일째 되는 날 오전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생각해보면 한라산 등반이 꼭 꿈속 같습니다. 자욱하게 안개 낀 숲길과 맑은 새소리, 백록담에서 본 늙은 노루도 아련합니다. 등반을 마친 후 너무 힘들어 다시는 한라산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관음사 코스와 윗세오름 코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집니다. 또 다른 올레길에는 어떤 행복이 있을지도…. 다음에는 등산복과 장비, 먹을거리를 제대로 챙겨가서 여유 있게 한라산을 오르며 제대로 느껴봐야겠습니다.

해발 1950m 한라산을 오르다


1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백록담.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지 미리 알았다면 아마 더 일찍 한라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2 한라산 정상을 코앞에 두고 사진 한장 찰칵.
3 안개가 끼었다가 구름이 드리우는 듯하면 어느새 바람이 불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신비의 산 한라산을 걷다보면 영화 ‘반지의 제왕’의 장면이 떠오른다.

여성동아 2011년 9월 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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