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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세월을 엿듣다

‘은발의 청춘’ 신성일 바람처럼 산 50년 고백

“결혼 6개월 만에 별거하고도 47년 함께 산 엄앵란, 제가 속 많이 썩였죠 ”

글·김유림 기자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1.07.15 15:46:00

한국 영화계 거봉 신성일이 한 일간지에 ‘청춘은 맨발이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지난 세월을 연재하고 있다. 영화 얘기를 비롯해 첫사랑의 추억, 엄앵란과의 결혼생활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 아줌마 팬들의 환호 속에 여전히 청춘을 구가하고 있는 그를 한 강연장에서 만났다.
‘은발의  청춘’ 신성일 바람처럼 산 50년 고백

강연을 마치고 주부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신성일.



은발의 파마머리를 한 그가 무대에 오르자 1백여 명의 중년 여성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청바지에 타이트한 블루 셔츠를 받쳐 입은, 일흔 중반의 나이가 무색한 신성일(74)이다. 6월 중순 서울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주인공으로 나선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청중을 향해 “오늘 어머니들한테 잘 보이려고 밥까지 굶고 왔다”고 농담을 했다. 한 손에는 스포츠신문이 들려 있었는데, 신성일은 이 매체에 4월 중순부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이후 연재물은 책으로도 엮일 예정이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5백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특히 60년대에는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등을 히트시키며 엄앵란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70년대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에서 완숙한 연기를 선보이며 뭇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평생 한국 영화 부흥에 앞장서온 그는 분명 영화계 산증인이자, 톱스타 중 톱스타다. 현재 그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날 신성일은 화려했던 배우 시절, 하지만 문화적으로 억압받던 군부 시대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81년도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문민정부가 시작되자 문화에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12년이란 세월 동안 영화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가 됐어요. 신성일 영화도 다 사라졌습니다. 잘나가던 배우들도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벌이를 했습니다. 어디 노래만 부릅니까? 매일 밤 술을 마시니 몸도 금방 망가지고 결국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내일 대구에 큰 행사(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가 있어 내려갑니다. 그나마 아직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세기의 결혼식 치렀지만 결혼 6개월 만에 별거

‘은발의  청춘’ 신성일 바람처럼 산 50년 고백


대구가 고향인 그는 오래전부터 대구에 거처를 마련해놓았다. 78년부터 10년간은 엄앵란과 함께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간 가장 큰 이유는 ‘국회의원 출마’였다. 영화배우로서의 삶은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제2의 인생으로 정치를 택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 결국 그는 두 번 낙선 끝에 2000년 16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대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 나왔습니다. 정치하려면 다들 고향으로 가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였죠. 다른 건 할 게 없고 식당을 차렸는데 꽤 잘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그분이 경상도 출신이다 보니 청와대에 줄 대려는 사람들은 다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서울 분들이 오면 갈 데가 없으니까 ‘엄앵란이 하는 식당에서 만납시다’ 해서 그 덕분에 장사가 잘됐죠. 밥 먹으러 가서 엄 여사 얼굴도 한번 보고 좋은 경험 아닙니까(웃음). 하지만 엄 여사는 그때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신성일·엄앵란 부부는 1964년 11월1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는데, 이날 대한민국 대표 선남선녀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하객 수가 3천4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인파에 밀려 접수대가 연못에 빠지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온 국민 앞에서 사랑을 맹세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후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별거를 했습니다. 원인은 고부 갈등이었어요. 그나마 문제가 커지지 않았던 건 엄 여사나 저나 기자들 앞에서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입니다.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해요.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인터뷰 한번 잘못했다가 이혼으로 치닫곤 하잖아요. 물론 별거는 잘 이겨냈지만 후에 엄 여사가 저 때문에 속을 많이 썩었죠(웃음).”
문제는 ‘바람’이었다. 신성일의 ‘결혼 후 첫사랑’은 초창기 여성 조종사 김경오 여사의 여동생 김영애씨다.
“제가 참 좋아했던 애인입니다. 70년에 만났는데 84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 그 소식을 앙드레 김 선생한테 들었어요. 내가 엄 여사 앞에서 ‘일찍 갈 걸 알았으면 더 잘해주는 건데’라고 말했다가 엄청 혼났습니다.”



“방송에서 솔직한 엄 여사 모습은 내가 조종한 것”
그렇다면 결혼 전 첫사랑은 누구일까. 얼마 전 그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첫사랑은 ‘혜화동 여인’이라 밝히며 그녀와의 가슴 절절했던 러브스토리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6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뤄졌다. 당시 초짜 배우였던 신성일은 동료배우 손에 이끌려 광화문에 있는 한 다방을 찾았는데, 그곳 마담이 다방 문을 닫고 이들을 데려간 종로구 혜화동 어느 한옥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당시 그는 ‘여자와 키스신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배우냐’는 자책감을 품고 있던 터라 혜화동 여인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63년 영화 ‘새엄마’를 찍고 있을 때는 함께 출연했던 엄앵란의 차를 얻어 타고 점심때 혜화동 여인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목에 진한 키스마크를 달고 나타난 신성일은 촬영장에서 여배우들에게 심한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엄앵란의 적극적인 구애가 시작됐다는 게 신성일의 말이다.
사랑이 ‘충만한’ 남편과 살면서 엄앵란이 겪었을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솔직한 자세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나이 오십에 ‘아침마당’ 패널로 출연하기 시작한 엄앵란은 방송에서 힘들었던 결혼생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동시에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는 주부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대한민국 대표 아줌마로 부상했다.
“대구에서 식당을 할 때였는데 어느 날 ‘아침마당’에서 엄 여사한테 패널로 나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엄 여사는 무척 좋아했어요. 그때 제가 ‘당신은 다른 연예인들처럼 내숭 떨지 말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 내 욕 막 해도 괜찮아’ 하고 얘기해줬어요(웃음). 그랬더니 첫 방송에서 남편이 바람피워서 괴로워하는 주부 시청자에게 다짜고짜 ‘당신 남편이 신성일보다 잘생겼어? 나는 신성일이 바람피워도 가만있는데 뭘 그래?’ 하고 쏘아붙이대요(웃음). 당시 그게 크게 히트했습니다. 물론 요즘 젊은 주부들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는 큰일 나죠. 또 방송에서 몇 번이나 제가 애인 데리고 세계여행 다니는 동안 자기는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잖아요. 솔직히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거예요. 이혼이라도 해봐요. 당장 고소감이지(웃음). 어쨌든 엄 여사,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참고 산다는 건,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거죠. 엄 여사는 제가 국회의원 시절 2년간 감옥살이(뇌물수수 혐의)를 하고 나왔을 때도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줬습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은발의  청춘’ 신성일 바람처럼 산 50년 고백

5백6편의 영화에서 1백18명의 여배우와 호흡을 맞춘 신성일. 윤정희와는 무려 99번이나 함께 영화를 찍었다. 왼쪽은 윤정희와 출연한 이성구 감독의 ‘당신과 나 사이에’(1971). 오른쪽은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두 주인공 신성일·안인숙(1974).



‘은발의  청춘’ 신성일 바람처럼 산 50년 고백

대구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던 날 아내 엄앵란의 볼에 기쁨의 키스를 하고 있다.



신성일은 엄앵란을 두고 강한 여자라고 했다. 가까운 사람이 잘못되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의리파라는 것. 72년 평소 언니 동생하며 가까이 지내던 가수 현미가 작곡가인 남편 이봉조에게 배신당하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도 현미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사람이 엄앵란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60년대 이봉조가 유부남인지 모르고 사랑에 빠진 현미는 이봉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웠다. 하지만 어느 날 이봉조의 본처가 늦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고 현미는 그길로 짐을 싸 초등학교 6학년·4학년인 두 아이와 함께 엄앵란의 집으로 찾아왔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빈털터리가 된 현미를 안쓰럽게 여긴 엄앵란은 은행에서 자신의 신용으로 대출을 받아 현미에게 같은 단지 내 아파트를 마련해줬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신성일은 “그때만 해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전히 엄 여사의 신용대출이었다. 지금도 현미가 방송에서 엄앵란에게 신세졌다고 하는 건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성일은 현재 경북 영천 한옥에 살고 있다. 2008년 강원도 금강송으로 지은 건평 145㎡(약 44평)의 성일가(星一家)다. 그곳에서 그는 새벽 5시면 일어나 말을 돌보고 집과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몇 차례 방송을 통해 한옥 전경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나무 공예가가 선물한 원두막 옆에 직접 땅을 파서 만든 인공연못, 서예가가 바위에 새겨준 문패까지 그림 같은 풍경이다. 중년 팬들이 단체로 찾아올 만큼 영천의 명소가 됐다. 하지만 그는 아쉬움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영천 한옥 옆에 한국영화박물관 짓고 싶어
“직접 살림을 해보니까 이게 보통 복잡하고 힘든 일이 아니에요. 덕분에 주부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밥 먹고 나면 어찌나 그리도 꼼짝하기가 싫은지. 설거지 하기가 제~일 귀찮아요. 그래서 요즘 소원이 설거지해주는 여자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웃음). 많은 분들이 반찬도 가져다주고 하시는데 때로는 치우는 게 무서워서 못 먹어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마당에 너는 것도 일이에요. 정말 주부님들 대단하십니다(웃음).”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한 신성일은 평생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즘도 매일 아침 샌드백을 치고, 아령과 덤벨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걷기를 좋아해 웬만한 거리는 일부러 걸어 다닌다. 영천 한옥 옆에 한국영화박물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는 그는 “그때까지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열심히 운동하겠다”며 청중과 약속을 한 뒤 강단에서 내려왔다.

여성동아 2011년 7월 5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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