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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삶을 비추는 여행

들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다

전북 김제

글&사진 한은희

2010. 10. 06

전북 김제는 사방을 둘러봐도 시야를 가로막는 산을 찾기 힘들다. 끝없이 펼쳐지는 김제·만경평야는 넉넉한 살림살이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햇살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것처럼 소작농들의 고단함은 어찌할 수 없었을 터. 그래서인지 이 땅에는 그들의 팍팍한 삶을 달래주던 문화들이 남아 있다. 힘든 농사일에 신명을 불어넣어주었을 농악, 백제시대부터 발달되어온 농사법,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장했을 옹기 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문화를 따라 김제여행을 시작해보자.

들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다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외부는 3층 구조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만들어졌다.



민중의 고단함 품어 안은 곳, 모/악/산
모악산은 전주·완주·김제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793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오르는 것은 녹록지 않다. 평지에서부터 시작되니 고스란히 산의 높이만큼 올라야 하며, 바위가 많고 가파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악산엔 늘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산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정비하기 위해서다. 옛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았던 듯하다. 산 곳곳에 다양한 종교가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미륵불을 모시는 금산사,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이어온 증산교, 신분의 벽을 깬 금산교회 등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곳은 금산사(www.geumsansa.org)다. 백제 법왕 원년(599)에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어졌다 하니 1천4백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조그맣게 지었던 사찰이 3층 법당을 가진 큰 규모의 사찰이 된 것은 신라 혜공왕 2년(766)이다.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할 금당을 지으면서 중창된 것. ‘미륵불이 돌아오는 날, 모든 중생이 구원된다’는 미륵사상이 담겨 있어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국보 제62호)은 3층 건물이다. 안쪽은 하나로 트여 있는 통층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진표율사가 지은 첫 번째 미륵전은 불타 없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미륵전은 조선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지은 것이다. 이 밖에도 석련대(보물 제23호), 혜덕왕사진흥탑비(보물 제24호), 5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6호), 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대적광전(보물 제476호), 대장전(보물 제827호) 등 수많은 보물이 있다. 금산사에는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 큰아들에게 유폐되어 몸을 의탁했다는 이야기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나 그의 시름을 덜어낸 곳도 종교였던 셈이다.
금산사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금산교회(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36호)는 개화기 우리나라 교회건축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ㄱ자로 지어진 단층 한옥으로 꺾인 부분에 강단을 만들고 좌우에 남녀 신도가 나눠 앉을 수 있도록 한 것. 남녀가 유별하다는 조선시대 유교적 생각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초기 기독교가 선택한 방법이다. 예전엔 강단 앞 트인 부분에 천을 드리워 서로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고. 금산교회는 지주가 아닌 마부를 첫 번째 장로로 선출한 교회이기도 하다. 인근의 지주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을 장로로 선출한 것. 이후 조덕삼은 이자익이 목사가 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줬다고 한다. 목사가 된 이자익이 구봉리교회로 옮겨가자 그 뒤를 이어 조덕삼이 장로가 됐다. 지금은 옛 건물 옆에 새 교회를 지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
지금 김제의 바다는 새만금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김제가 사람의 손에 의해 들녘이 풍요로움을 만든 것이 처음은 아니다. 1천7백여 년 전인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벽골제(사적 제111호, http://byeokgolje.gimje.go.kr)를 만든 것. 당시 김제지역을 부르던 벽골군이라는 이름이 제방에 붙여져 지금껏 전해진다. 벼가 많이 나는 ‘벼 고을’이라는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벽골’로 변했다고. 그만큼 예전에도 벼를 많이 재배하던 고장이라 볼 수 있다.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까지 3km나 이어지는 거대한 제방은 누가 어떻게 쌓았을까. ‘삼국사기’ 문성왕 편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 사람들이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되어 벽골제 제방 보수사업에 동원됐다고 기록돼 있다. 벽골제가 만들어진 것은 그보다 5백년 정도 앞서서인데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보수를 하며 사용해오던 벽골제가 지금처럼 저수면적이 없는 제방으로 남은 것은 일본강점기 때 제방을 터 수로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원형이 손상돼 물이 담겨 있었을 자리에 농토가 자리 잡게 됐다.

들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다

1 개화기에 지어진 금산교회 내부. ㄱ자 구조로 돼 있어 남자석과 여자석이 자연스럽게 구분되도록 했다. 2 벽골제 수문. 3 벽골제에는 평지에서 물을 옮길 때 사용되던 용두레가 남아 있다. 4 황룡과 청룡의 싸움에 관한 전설을 형상화한 모형.



벽골제 사적지에서 옛 제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원평천 가에 남아있는 두 개 돌기둥뿐이다. 이 돌기둥이 있는 곳은 벽골제의 수문 자리다. 벽골제에는 모두 5개 수문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수문의 수는 2개. 벽골제 사적지의 제2수문 장생거와 이곳에서 원평천을 따라 약 2km 내려간 곳에 있는 제5수문 경장거이다. 돌기둥은 제방 가장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기둥의 대부분은 제방으로 막혀 있어 이곳이 수문이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수문의 동작원리는 수문 앞 공원에 있는 수문체험장에서 알 수 있다. 양쪽 제방 위로 사람이 올라가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다. 백제시대 수리시설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지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수문 앞쪽에는 수로에서 논으로 물을 퍼올리던 다양한 농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은 평지 논에서 많이 사용되던 무자위와 용두레다. 무자위는 1시간에 50~60톤의 물을, 용두레는 15~20톤의 물을 옮겼다 하니 꽤 쓸모 있는 도구였을 듯싶다. 직접 농기구를 움직여볼 수도 있다. 물레방아처럼 둥글게 생긴 무자위 바퀴 위에 올라가 손잡이를 잡고 발로 바퀴를 밟으면 바퀴날개에 물이 담겨 논으로 옮겨지는 것. 삼각으로 세워진 지지대에 매달린 용두레를 움직여 물을 옮기는 체험도 해볼 것. 아이들이 체험하기에는 용두레가 더 쉽다.
벽골제 사적지에는 수리시설인 벽골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063-540-4986)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벽골제가 평지에 진흙을 다져 만든 제방이라는 것, 저수지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너른 지역에 물을 대주었다는 것 등등 벽골제가 가진 역사적 의의와 발굴경과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벽골제 주위에 남아 있는 농/경/문/화
벽골제엔 오랜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벽골제를 수호하려는 황룡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심술 사나운 청룡의 다툼에 관한 설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된 단야낭자 이야기,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우도농악 이야기와 논두렁에 앉아 먹던 들밥이야기 등이다.
벽골제 밖에도 농사와 관련된 문화들이 남아 있다. 한 해 농사의 길흉을 점치던 입석줄다리기 이야기와 오가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80kg짜리 쌀 70가마니가 들어가는 뒤주를 만들었던 정씨집안 이야기이다. 금산사에서 벽골제로 가는 길에 월촌주민센터를 지난다. 그 앞쪽에 커다란 입석이 서 있다. 멀리서 볼 때는 돌이 서 있다기보다 새끼줄을 매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한 후 그때 사용하던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놓기 때문. 입석 앞에는 당산제를 지내는 제단도 놓여 있다.
입석을 지나 벽골제 방향으로 가면 전장마을·후장마을이라 쓰인 마을입구 표식을 만난다. 돌로 만들어진 표식을 따라 우회전해 들어가면 장화리쌀뒤주가 있는 만석꾼 정구례 고가에 닿는다. 이 집 안채 오른쪽에 마치 창고처럼 보이는 쌀뒤주가 있다. 조선 고종 때 만든 이 뒤주에는 쌀 70가마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거대한 쌀뒤주가 집안에 있는 것은 그만큼 손님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뒤주를 가득 채운 쌀이 채 한 달이 못갔다 하니 손님의 수를 짐작할 수 있다. 뒤주의 크기는 높이 1.8m, 너비 2.1m나 된다. 집을 짓듯이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나무 몸체를 지은 뒤 초가지붕을 얹어 만든 구조도 특이하다. 앞면 가운데 판자 8개를 끼워 사용했다고. 맨 위의 판자에는 몸체에 고정시킬 수 있는 고리가 달려 있다.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니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볼 것.

김제평야의 전망대, 진/봉/산
진봉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사방 어디든 막힘없이 보이는 풍경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서해로 드나드는 배들이 정박한 심포항과 그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새만금방조제, 군산과 김제 사이로 흐르는 만경강과 드넓은 김제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봉산으로 가는 길은 산 아래 자리한 망해사를 이정표 삼아 가야 한다. 망해사 입구 언덕에 차를 세우고 5분정도 걸어 오르면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망해사로 길이 이어진다. 망해사는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은 사찰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워 저녁 무렵 사찰을 찾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낮의 풍경도 아름답다.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노거수들이 만든 그늘 아래 앉아 바다와 사찰의 고즈넉함을 누릴 수 있는 것. 백제시대 지어진 사찰이라 전해지는 망해사의 건물들은 근현대에 지어진 것이 많다. 다만 낙서전은 조선 선조 22년인 1589년에 진묵대사가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들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다

진봉산에서 바라본 심포항구 풍경



2백년 세월 이어온 옹기촌, 부거리 옹/기/가/마
백산면 부거리 부창마을에 등록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된 옹기가마와 작업장이 있다. 완만하게 경사진 오름가마에 장작을 때 옹기를 굽는 전통가마다. 2백여 년 전, 천주교 박해를 피해 마을로 모여든 사람이 많았을 때는 옹기가마가 6곳 정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1곳만 남아 있다.
이 공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작업장이 함께 있다는 것. 오래된 옹기가마는 종종 마주하게 되지만 이곳처럼 작업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작업장은 건물 벽이 아래로 흘러내린 듯 불룩한 황토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 주인인 안시성씨가 작업 중인 다양한 옹기를 볼 수 있다. 공간 안에 예부터 사용하던 흙을 손질하는 곳, 물레를 돌리는 곳, 옹기를 빚으며 사용하는 각종 도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만들어내는 옹기는 다양해졌다. 생활용기뿐 아니라 차를 우려마실 수 있는 다구, 향을 피울 수 있는 향로, 아이스크림도 담아낼 수 있는 후식용 그릇 등 작고 아기자기하면서 현대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것. 건물 앞에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듯 거대한 노거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옹기를 굽다 지친 몸을 잠시 쉬어도 좋은 공간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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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부거리 옹기작업장 내부와 옹기가마. 3 드넓은 김제평야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탁 트인다.



여/ 행/ 정/ 보/
[ Tip ] 가을 들녘의 넉넉함 즐겨요, 김제지평선축제
10월6~10일 벽골제 일원에서 김제지평선축제(http://festival.gimje.go.kr)가 열린다. 드넓은 농토에서 농사짓는 틈틈이 흥을 돋우던 우도농악, 벽골제에 얽힌 단야낭자와 쌍룡 이야기 체험, 예절을 배우는 명인학당 선비문화체험, 낟알을 수확하고 난 짚풀로 만드는 다양한 공예체험, 클레이점토를 이용해 청룡 만들기, 연날리기, 암줄과 숫줄을 만들어 풍흉을 점쳤던 입석줄다리기, 청룡과 황룡의 싸움을 놀이화한 쌍룡놀이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축제를 즐기느라 고파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들녘에서 새참 드세요’ 프로그램도 이용해볼 것. 논두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낙들이 가져온 새참을 먹던 옛 농부들처럼 축제장 어디에서든 새참을 먹을 수 있는 것. 지게 진 머슴들이 고구마·옥수수·개떡·연잎차 등을 한 바구니 담아 주문한 곳으로 배달해준다.
[ 찾아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를 나와 712번 지방도를 따라 금산사 방향으로 갈 것. 약 4km 거리에 금산사가 있다. 금산사에서 벽골제로 가는 길은 712번 지방도를 따라 원평을 지나 김제시내 방향으로 가면 된다. 김제시내 입구에서 벽골제 이정표 따라 좌회전할 것. 벽골제로 바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IC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들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다


[ 맛집 ] 김제시 농축산물 브랜드인 지평선 청보리를 먹여 키운 한우의 싱싱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맛볼 수 있는 육회비빔밥을 내는 원평지평선청보리한우촌(063-543-0076)과 심포항의 다양한 생합요리를 맛볼 수 있는 연서활어회(063-543-3007)를 찾아갈 것.
[ 숙박 ] 김제시내에 모텔촌이 형성돼 있다. 그중 샵모텔(김제시 옥산동 426-2, 063-548-5900~1)은 최근에 지어진 깨끗한 모텔이다. 심포항 인근에도 모텔궁(063-544-6790) 등 숙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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