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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내가‘희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

일러스트·송재호

2006. 08. 21

내가‘희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

술도 못 마시고, 운전도 못 하며, 디지털 카메라 대신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고 하면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결혼 역시 초혼, 재혼, 삼혼, 재결합 등으로 복잡해지는 가운데 처음 결혼한 남자와 20여년을 꾸준히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이 소수자로 남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한결같이 산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의 분류법으로는 점점 ‘희귀종’이 돼가는 것 같다.
일단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권할 때 “술 못 마시는데요”라고 하면 내숭떨지 말라는 눈빛으로 “아유, 조금만 드세요”라고 한다. 담배도 안 피운다고 하면 “언제 끊으셨는데요?”라고 묻는 이들이 많다. 겉모습이 조신하게 보이지는 않나보다.
또 모임을 마치고 나올 때 “차는 어디에 주차하셨어요?”라는 질문에 “저는 운전면허도 없는걸요”라고 하면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겁이 많아서 최근에야 귀를 뚫었다거나(그것도 비싼 귀걸이를 선물받아 꼭 달아보겠다는 욕심에) 집에서 손바느질로 치맛단, 바짓단을 직접 줄여 입는다거나(워낙 팔다리가 짧다보니),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고 하면 거의 원시인을 바라보는 듯한 망연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다. 취향이 독특해서가 아니라 급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요즘 내가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 중에는 20년간 한 남자와 꾸준히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있다. 얼마 전 중년 여자 6명이 모였는데 5명이 이혼, 별거, 독신 등으로 혼자 사는 여성이었고 나만 유일하게 남편과 한집에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잉꼬부부, 닭살부부로 소문났던 이들도 있고 별거 중인 커플은 아주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친정에서도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정작 사람들에게 수시로 “도대체 남편인지 남의 편인지, 웬수가 따로 없다” “이혼을 하려고 해도 서류를 떼 오거나 법원 가기 귀찮아서 못하고 있다” “시아버지 아들하고 어떻게 뽀뽀를 하냐” 등의 불평만 늘어놓던 나는 아내 자리를 사수하고 있다.
요즘 주변에서는 별거, 이혼, 재혼하는 커플들이 늘어나면서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히고설켜 지켜줘야 할 비밀이 쌓이고, 궁금해 미치겠는데도 쿨한 척 입을 오므리고 있어야 할 상황이 많아져 혼란스럽기만 하다.

얽히고설키는 인간관계, 현대 결혼생활 백서
최근 아는 여류 사업가가 이혼을 했는데 전남편의 재혼 상대가 내 친구다. 내 친구의 전남편은 또 내가 아는 여자와 교제 중이다. 그 친구의 오빠는 부인과 별거 중인데 내 후배의 친구와 열애에 빠져 이혼하면 재혼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오빠의 부인은 내 사촌언니와 절친한 사이…. 한 여자의 전·현 남편을 모두 잘 알거나 한 남자의 전·현 아내와 모두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특수대학원이나 친교모임 등이 많은데 이렇게 헤어지고 새로 결합한 이들이나 배우자가 동시에 나타나 엉뚱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고 지내시면 좋을 거예요. 이분은~”이라고 소개를 받는 기묘한 만남도 연출된다. 또 지인의 소개로 한 사교모임에 참석했는데 남편의 전부인이 이미 회원이어서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는 에피소드도 들었다.
그날 모였던 6명의 40대 여성 중 유일하게 유부녀 생활을 지속하는 나는 ‘나만 시대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다 내가 소수자가 됐을까’란 생각에 약간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마 인경씨는 평소에 말로 스트레스를 다 풀고, 남편 흉을 보면서 해소가 돼 이혼하지 않고도 사는 걸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줘. 솔직히 이혼해서 몸과 마음이 참 편하고 아이들도 잘 이해해주는 편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혼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관대하지 못해. 그런 편견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모범적인’ 마누라로 살아.”

내가‘희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

또 다른 이혼한 여성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하필 전남편이 재혼한 여자가 내 친구랑 친구야.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내 친구며 전남편 친구들이 미주알고주알 근황을 전해줘 아주 미치겠어. 어디에 같이 왔더라, 옷차림이 어떻더라, 저번에는 무슨 일로 대판 싸웠다더라. 다 걱정해서 해주는 말이지만 고마운 마음보다는 아직 혼자 사는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아 속상해.”
이젠 노처녀가 아니라 ‘독거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싱글 여성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죽기 전에 면사포를 써야 처녀귀신 되지 않는다며 아직까지 중매를 서려는 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정말 내 취향이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독신남이면 다 들이대는데 화도 못 내겠어요. 띠동갑 노인에다, 아이 넷 달린 홀아비에다, 두 달 전에 이혼한 남자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남의 결혼에 관심이 많은 거죠? 그리고 왜 다 결혼해야 하고, 계속 살아야 하고, 혼자 살면 꼭 다시 짝을 맺어줘야 하죠? 왜 다들 모이면 남의 결혼생활에 대해 떠드는 거죠? 그렇게 대화할 게 없나.”

‘올드한’ 나의 결혼생활 유지 비결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하고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2위인지 3위인지 상위권이라고 해도 여전히 이혼에 대해 ‘호감’을 보이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아무리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도 여전히 전남편의 아이에게 재혼한 남편의 성을 갖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게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암튼 아이스크림 하나도 31개 종류 중에서 골라 먹어야 하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고를 때도 10가지 종류가 넘는 것 중에서 크기마저 선택해야 할 만큼 다채로운 빛깔의 세상이 되다보니 결혼 역시 초혼, 재혼, 삼혼, 재결합 등으로 복잡해지고 ‘처음 결혼한 남자와 20여 년을 꾸준히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이 소수자로 남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모임이 있던 날도 남편은 술에 찌들어 새벽에 들어왔다. 술만 마시면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는지라 방, 화장실, 마루를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알코올이 들어간 몸에 열이 나는지 맨바닥을 구르다가 코를 드르릉 골며 잠이 들었다. 벗어던진 바지 주머니에서는 한 달치 식료품비가 넘는 술집 계산서가 빠져 나왔다.
너무 피곤한데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자 짜증이 나 남편에게 찬물을 끼얹어 주거나 실컷 두들겨주고 싶었다. 그대로 쫓아내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에 개구리처럼 뻗어있는 남편에게 담요를 덮어줬다. 이 ‘게을러서 이혼 서류를 못 챙겨오는’ 남편 덕분에 우리는 보기 드문(?) 초혼부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서로 가엾어서, 아이에게 설명하기도 피곤해서, 새 파트너를 만나 다시 시작하는 게 귀찮아서 한 남자와 계속 사는 것이 나의 결혼생활 유지 비결이다.
유인경씨는...
내가‘희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얼마 전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펴낸 뒤 KDI,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등 ‘아저씨’들이 많은 곳에서 강의 초빙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현재 30대 여성들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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