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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만나고 싶었습니다

‘극단 유’ 창립 10주년 기념공연 준비에 한창인 유인촌

“정계로 진출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지만 저는 2년 임기만 끝나면 본연의 자리인 연기자로 돌아갈 겁니다”

글·강지남 기자 / 사진·조영철, 홍중식 기자

2005. 12. 07

연극배우, 탤런트, 연출가, ‘극단 유’의 대표이자연극영화과 교수,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예술계에 유인촌처럼 많은 직함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지난 10월 초 ‘청계천 새물맞이 축제’를 총연출하고 35년 연기생활을 정리한 저서를 펴낸 그가 12월에는 얼룩빼기 늙은 말이 돼 무대에 선다. 뮤지컬 연습 현장과 출판기념회에서 그를 만났다.

‘극단 유’ 창립 10주년 기념공연 준비에 한창인 유인촌

“지금내가 두려운 건 젊음의 혈기가 아니라네. 자네들의 무분별한 행동들이 안쓰러워….”
그는 한 마리 얼룩빼기 늙은 말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말들은 축 처진 몸으로 마구간을 뒹구는 그를 놀려대기 여념 없고 주인은 쓸모없는 그를 도살해버리라고 지시한다. 늙은 암말이 나타나 그가 한때는 어느 말보다 빨리 달리는 명마 ‘홀스또메르’였음을 기억하자 그의 흐리멍덩한 눈빛이 재빠르게 변한다. 장난기 넘치는 어린 홀스또메르, 힘이 넘치는 젊은 홀스또메르…. 배우란 역시 변신과 표현의 마술사다.
지난 11월12일 오후 서울 삼성동의 한 지하연습실에서 20여 명의 후배 배우들과 함께 연기연습에 한창인 유인촌(54)을 만났다. 지난해 5월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맡은 이후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행정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던 그이기에 편안한 차림으로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더욱 반갑다.
12월9일부터 18일까지 그가 이끄는 ‘극단 유’는 창단 10주년을 맞아 뮤지컬 ‘홀스또메르-어느 말 이야기’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린다. 톨스토이 원작의 뮤지컬 ‘홀스또메르’는 늙은 말의 우여곡절 인생을 통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묻는 작품. ‘극단 유’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건 1997, 2000, 2003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인데 유인촌의 아내 강혜경 중앙대 성악과 교수(46)가 처음으로 예술감독을 맡았다.
“‘홀스또메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제가 연극을 해야 하는 이유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인생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에 충실한 작품이지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진짜’ 연극하고 싶어 극단 유 만들어
유인촌이 재미와 화려함을 좇는 연극이 아닌,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진짜’ 연극을 하고 싶어서 만든 ‘극단 유’는 지난 10년 동안 작품 면에서는 귀한 성과를 거뒀지만 경영 면에서는 지금까지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다. ‘문제적 인간 연산’ ‘파우스트’ ‘홀스또메르’ ‘택시드리벌’ ‘리어왕’ 등을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아왔고 소속 배우도 20명에서 1백여 명으로 늘었지만 극단 운영은 여전히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99년에는 연극의 불모지 서울 강남에 연극 전용 소극장 유시어터의 문을 여는 모험을 강행했는데, 최근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가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누리기 전까지 극장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해 가을 강원도 평창 봉평의 한 폐교에 ‘덕거 연극인촌’을 세우고 달빛극장까지 열기도 했다.
“돈이 없어 좋은 작품을 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운 좋게 스폰서가 나타나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극단 운영은 단순하게 적자나 흑자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때 유시어터를 강북으로 옮겨볼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꾸준하게 계속 노력해볼 생각이에요.”
유인촌은 지난해 5월 행정가로 변신했다. ‘서울시의 문화관광부’라고 불리는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를 맡은 것.
“여기저기서 여러 오해의 말씀들을 하시는데, 서울문화재단이 제가 지금까지 해온 문화예술 영역의 일을 하는 곳이라 대표이사직을 수락한 것뿐이에요. 이러다 유인촌이 정계에 진출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는데, 그런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서울의 예술문화 환경을 진작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많은 문화 관련 행정가들을 만났고 문화예술단체 사람들도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초 성대하게 열린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도 그가 총연출을 한 작품.

“청계천의 동대문 지점과 존치교각 두 군데에 수변 무대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어요. 내년에는 이곳에서 음악, 무용 등 다채로운 거리공연이 펼쳐질 겁니다.”

‘극단 유’ 창립 10주년 기념공연 준비에 한창인 유인촌

11월11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나란히 선 유인촌·강혜경 부부.


그는 또 어린이 놀이터를 문화 놀이터로 바꾸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30년 전 놀이기구가 그대로인 낡은 놀이터와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의 개성 없는 놀이터를 도전과 모험 정신이 가득한 문화 놀이터로 바꾸기 위해 산학협동으로 연구 중에 있다고 한다.
“기존의 어린이 놀이터는 안전성만 너무 강조돼 있어요.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하죠. 요즘 아이들은 학원 다니고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놀이터에 나와 놀지 않잖아요. 모험과 도전 정신이 가득한 놀이터를 만들어 아이들과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2년여의 작업 끝에 30년 연기인생을 총결산한 저서 ‘유인촌, 연기를 말하다’를 펴냈다.
11월11일 저녁 서울 세종호텔에서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동료 연기자들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로 행사장이 꽉 찼다. 22년 동안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그의 아버지로 등장했던 ‘양촌리 김회장’ 최불암은 축사를 통해 “몇 십 년 연기를 하면서 나도 못해낸 일을 둘째가 해냈다”며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유인촌의 아내 강혜경 교수도 참석해 손님들을 맞았다. 서로의 대외활동을 존중하며 대중 앞에 함께 나서기를 꺼리는 부부지만 이날만큼은 강씨도 남편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몹시 바쁜 사람이 재단 대표이사까지 맡는다고 했을 때 걱정도 됐지만, 잘할 거라 믿어 축하해줬어요. 얼마 전엔 남편과 함께 청계천 구경을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 또한 무척 행복했어요. ‘극단 유’를 꾸리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적도 많았지만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좋은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에 극단이 무척 자랑스러워요.”

두 아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환영할 거라는 부부
‘극단 유’ 창립 10주년 기념공연 준비에 한창인 유인촌

‘극단 유’가 창단 10주년을 맞아 12월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홀스또메르’로 유인촌은 늙은 말 역할을 맡았다.


유인촌 부부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대학생인 큰아들은 영국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부모를 두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쪽 분야를 접해온 아들들 또한 결국 부모가 하던 일을 물려받게 될까. 그와 강씨는 이구동성으로 “아직은 뭐가 될지 잘 모르지만, 뭐가 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환영한다”고 말했다.
탤런트 김혜자는 유인촌에 대해 “녹화가 있는 날이면 강남에서 여의도 방송국까지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빨간 면 스카프를 목에 질끈 매고 자전거를 타고 오던 근사한 배우”라고 회상했다. 그는 요즘 자전거를 타는 대신 운동화를 신고 달린다. 그의 오랜 취미는 마라톤. 체력 관리가 매우 중요한 직업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헬스클럽을 찾을 짬이 없는 그는 마라톤으로 체력을 다진다. 방송국이 있는 여의도에서 극단이 있는 청담동까지 13km와 6∼12km의 남산 코스가 그가 주로 달리는 코스.
“요즘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마라톤을 해요. 해가 늦게 지는 여름이면 한강 둔치를 달리면서 석양을 볼 수 있는데 참 아름다워요.”
내년 5월 유인촌은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직을 떠나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 예정이다. 내년 가을 ‘햄릿 2006’을 무대에 올릴 계획인데 형을 독살하고 형수를 빼앗는 햄릿의 삼촌 클로디어스 역을 맡는다고 한다. 30년 연기인생 동안 악역을 맡기는 이때가 처음이 될 거라고.
“공연문화가 활성화됐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미있고 신나고 화려한 작품만을 선호합니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작품을 찾는 관객이 없죠. 하지만 저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진지한 연극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끌어들이는 것, 그게 제가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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