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이 사람의 목소리

‘여성 중심의 생명평화운동’ 주창한 시인 김지하

“여자의 모성, 자애로움, 포용력 같은 부드러운 힘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예요”

글·강지남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5. 10. 10

90년대부터 생명사상의 발전에 힘써온 ‘오적’의 시인 김지하씨가 지난 9월 초 ‘세계생명문화포럼-경기2005’를 열고 “생명과 평화의 문명이 이 땅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애로운 여성성의 부활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시인 김씨를 만나 자애로운 여성성이 갖는 힘과 그 의미에 대해 들었다.

‘여성 중심의 생명평화운동’ 주창한 시인 김지하

“여자가 칼을 맡겠지만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이 그것이다. 여성이여, 세상의 모든 권력을 넘겨받아 잃어버린 원시의 평화를 되찾고 모든 권력, 욕망, 금기를 짓밟으시오!”
지난 9월2일 경기도 파주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는 시인 김지하씨(64·생명과평화의길 이사장)가 대본을 쓴 ‘천지굿’이 무대에 오르면서 3박4일간 개최될 ‘세계생명문화포럼-경기2005’가 그 막을 열었다. ‘천지굿’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력을 여성에게 넘겨 새로운 시대의 주역을 맡기자는 내용으로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1871∼1909)이 미래시대를 예견하며 벌인 종교의식인 천지공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재연한 마당극.
맨 위의 대사는 아내 고판례에게 식칼을 건넨 강증산이 아내에게 자신을 찌를 것을 요구하며 외치는 대사로 ‘천지굿’의 하이라이트이자 김지하씨가 이 마당극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아내 고판례는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리를 달라”고 외치며 남편 강증산에게 식칼을 겨누기 직전 흰 천으로 식칼을 감싼다.
“군사력, 술수, 힘 등을 상징하는 식칼을 흰 천으로 감쌌다는 것은 비폭력적이며 자애로운 여성성을 상징하는 행위예요. 19세기 등장한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현세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는 사상)인 동학은 남녀평등의 세상을 희망했습니다. 그동안 억눌렸던 여자가 좀 더 설쳐야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이룩된다는 게 강증산의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새로 권력을 잡게 되는 여성은 무서운 어머니, 과격한 페미니스트여서는 안 됩니다. 자애로우며 포용력을 가진 어머니, 위대한 ‘살림’의 능력을 가진 여성이어야 남자들과 더불어 평화와 생명존중의 문화를 일궈낼 수 있지요.”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세계생명문화포럼의 행사가 모두 끝난 다음 날인 9월6일 오전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만난 김지하씨는 무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는 “오래된 양피지가 쉽게 부서지듯 몸이 사그라지는 기분”이라며 힘겨워했지만, 일단 말문을 열자 또렷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여성 중심의 생명평화운동’ 주창한 시인 김지하

“올해 행사는 ‘동아시아 문예부흥과 생명평화’라는 주제로 열었습니다만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생명평화의 문화를 일궈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여성과 청소년이 맡아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지금 전 세계는 전쟁, 테러, 생태오염, 환경파괴 등으로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문명을 실현하는 것은 아주 다급한 과제가 되었지요. 60억 인류가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차가운 합리성과 효율성의 논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약한 자의 입장에서 모든 생명을 보살피는 여성의 부드러운 힘이 요구되는 거죠.”
이번 행사의 일부였던 학술대회도 여성성에 대한 논의에 큰 비중을 뒀다. 학술대회의 두 번째 주제마당을 ‘생명운동과 여성주의’로 정하고 전쟁과 여성의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팔레스타인의 여류작가 아에샤 오우다, 중국 어머니들의 환경보호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 여성 왕 밍잉 등 국내뿐 아니라 많은 국외 여성들을 초청했다.
“‘살림’이란 우리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살림은 ‘살리다’라는 우리말의 명사예요. 즉 생명을 살리는 게 우리 어머니들의 ‘살림’입니다. 고대 에게해 연안의 여신문명 또한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 자연과 문명을 가르지 않아요. 죽임의 문화가 아닌 살림의 문화였죠. 그런 모성, 자애로움, 포용력, 살림의 능력이 가정에서 사회로 옮아가 확장돼야 하는 시대입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 없으니 목숨을 모시고 살리는 것이 생명학의 핵심
1970년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장시 ‘오적’을 쓴 김지하씨는 오랜 옥살이를 마친 후 생명학과 생명평화운동에 천착해왔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낯설고 어려운 생명학이란 개념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생명학의 핵심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여성 중심의 생명평화운동’ 주창한 시인 김지하

9월2일 경기도 파주에서 선보인 ‘천지굿’의 한 장면.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어요. 그걸 알고 ‘목숨을 모시는 것’이 바로 생명학의 첫 번째 핵심이에요. 두 번째 핵심은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귀한 목숨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해야지요. 마지막으로 모든 생명이 변화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겁니다. 변화하지 않고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생명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김지하씨가 여성과 청소년에게 이러한 생명학과 생명평화 사상을 실천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 것은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거대한 폭발처럼 일어났던 붉은 악마들의 거리응원전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과, 젊은 여성들과, 젊은 엄마들과, 엄마 손을 잡고 거리에 나온 어린아이들이 온몸으로 보여줬던 열정과 혼돈, 그리고 거대한 혼돈 속에서도 유지됐던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김씨는 병든 현대사회가 갈망하는 대안 문명의 하나를 목격한 것. 그는 그것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붉은 악마들의 응원구호에서 질서 중심의 서양철학을 깨뜨리는 동아시아적 철학의 예언을 발견했습니다. 3박자는 역동을, 2박자는 안정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응원구호였던 ‘대∼한/민국’은 3박과 2박의 결합이에요. ‘짝짝∼짝/짝짝’이란 박수도 마찬가지로 3박과 2박의 결합입니다. 역동적인 유목민의 3박과 안정적인 농경민의 2박이 결합된 혼돈박인 거지요. 한국과 스페인 경기 때 다큐멘터리 작가인 제 친구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었는데 경기 다음 날 스페인 신문이 패전 소식을 전하며 뽑은 뉴스 제목이 바로 ‘리듬의 실패’였다고 합니다. 농경문화에 익숙한 스페인 선수들은 붉은 악마들이 경기장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쳐대는 혼돈박에 무척 당황해 패전하게 됐다는 지적이지요.”
김지하씨는 두 번째로 붉은 악마의 로고 ‘치우’를 꼽았다.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일컫는 전설적인 인물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을 결합시켜 부족 연맹체 국가를 세우고 양 민족의 평화를 도모한 동이족의 추장이다.
“서양사람들은 미래사회의 특징을 ‘도시 유목’으로 규정합니다. 휴대전화, 노트북, 무선 인터넷, 비행기, 주유소 등이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 보여주듯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가죠. 하지만 유목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미 그 부작용으로 세계화의 병폐, 환경파괴, 빈부의 격차 등이 나타났어요. 절반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즉 유목과 농경의 통합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상징이 치우예요. 우리의 붉은 악마들은 치우의 깃발을 전 세계를 향해 힘차게 흔들면서 대안 철학의 미래상을 주창한 거지요.”
마지막으로 김지하씨는 ‘몸’으로 내려온 태극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얼굴에 그리고, 망토로 두르고, 심지어는 윗도리나 아랫도리로 ‘입었다’. 김씨는 “경건하게 깃대에 꽂아 우러러보던 태극기가 몸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태극사상을 존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태극을 잘 보세요. 양이 음을, 음이 양을 이끌어가는데, 전체를 보면 양과 음은 하나지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이 바로 이겁니다. 분리, 구별, 차이가 아닌 통합의 철학이지요.”
열아홉의 나이에 4·19 혁명을 겪었던 김지하씨는 당시 자기 세대가 어떤 의미의 일을 해낸 것인지 몰랐다고 한다. 1년 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야 그의 세대는 4·19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고. 김씨는 2002년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당시 거리로 뛰쳐나와 마음껏 논 아이들, 청소년들, 여성들은 아직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 모릅니다. 이제 그 의미를 배워나가야 할 때예요. 혼돈박의 의미를 추적하고 치우를 앞으로 우리가 만나야 하는 문명의 모습과 연결해보고, 또한 세계철학으로 확대될 수 있는 태극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연원(自己淵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샘물이 있음을, 즉 자신 안에 스승이 있음을 일컫는 말이지요.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곱씹어 배우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공부예요.”

2006년부터 생활 속에서 생명과 평화 실천하는 작은 운동들을 전개할 터
김지하씨가 이끄는 세계생명문화포럼은 내년 행사에서 생명과 평화의 문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의논한 후에 보다 구체적인 작은 운동들, 즉 생활 속에서 생명과 평화를 실천할 수 있는 운동들을 벌일 계획이다. 김씨는 “내년 행사는 올해 행사보다 더 젊은 여성들과 청소년 중심으로 꾸려나갈 계획”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마지막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전쟁, 테러, 기상이변, 생태계 오염 등 극한 혼돈에 빠진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여성들이 맡아줘야 할 역할이 매우 크지요. 앞으로도 계속 펼쳐질 생명평화운동에 많은 주부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