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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삶이 걸려있는 갤러리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에로 관장’ 별명 마다하지 않는 이명옥

■ 글·이영래 기자 (laely@donga.com) ■ 사진·최문갑 기자

2003. 01. 14

사비나 미술관 이명옥 관장은 미술계의 뉴스메이커다. <이발소 그림전> <일기예보전> 등의 파격적인 기획, 점심을 먹으며 미술관을 관람하는 <런치 프로그램> 등 대중 속으로 한발 다가서려는 그의 노력은 그칠 줄을 모른다. “미술관을 찾지 않는 대중이 아니라 대중을 외면한 미술관이 문제”라는 그의 인생 속 미술 이야기.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에로 관장’ 별명 마다하지 않는 이명옥

“그쓰레기 같은 것들을 당장 치우시오. 세상에 온통 벌거벗고 있잖소. 더구나 망측하게 털까지 그렸으니.”
1917년 파리,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로 베유 화랑 앞 거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관조차 그림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경찰서장의 명령으로 전람회가 중지되면서 진정된 이 소동은 음부의 털까지 묘사한 누드화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드화 때문에 생기는 이런 해프닝은 세계 미술사에서 여러번 반복된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하나인 에곤 실레도 그의 집에서 발견된 그림 때문에 감옥살이까지 겪어야 했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표현 욕구 때문에 벌어졌던 이런 미술사의 에피소드를 엮어 사비나 미술관 이명옥 관장(47)이 최근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란 책을 냈다. 책 제목 자체도 자극적인데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헉!’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실려 있는 그림 또한 충격적이다. 아무리 미술사 이야기라 하지만, 현직 미술관장이며 대학교수인 사람이 이런 주제의 책을 내놓은 것은 의외다.
“지하철에서 화집을 보는데, 옆자리의 남자가 목을 길게 뺀 채 제 책을 훔쳐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누드화였죠. 놀라서 호들갑스럽게 화집을 덮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 미술이 일상에 지친 남자의 눈꺼풀에 밥풀처럼 끈끈하게 눌러붙은 잠을 털어버릴 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한 적이 있던가?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금기, 에로티시즘, 탐미, 열정을 주제로 책을 구성하기로 했죠. 그게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의 시작이었어요.”
재벌가와 연계돼 있는 것도, 무슨 재단에서 운영하는 큰 규모의 미술관도 아니건만 미술계 소식란에서 이 관장의 이름은 빠지는 날이 없다. 낯설기는커녕 오히려 미술계의 뉴스 메이커란 칭호가 더 어울릴 듯싶다. 그가 인사동에 조그맣게 갤러리를 낸 것이 지난 96년. 그리고 미술관으로 승격, 안국동으로 터를 옮긴 게 2002년 7월이니 미술관의 이력이나 이관장 개인의 이력으로 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유명세의 비결은 바로 ‘기획’이다. 이관장은 항상 참신한 기획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미술전 타이틀은 추상적이라는 선입관을 깨고 <교과서 미술전> <이발소 그림전> <개(犬)전> 등의 파격적인 기획을 선보였고, 최근엔 점심을 먹으며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런치 프로그램’을 도입, 화제를 낳았다. 그가 꿈꾸는 미술관은 주부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와 편하게 그림을 보다가 돌아가는 ‘문턱 낮은 그림집’이다. 그런만큼 여느 미술관과 분위기부터 다르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관장 생애의 소산이기도 하다.
“전 전형적인 미술학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아니었어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 상황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 유학을 떠나면서 미술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그전에도 화실에 한 5년 다녔지만 직장인의 취미생활 같은 거였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느 순간 무언가 나만의 것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수많은 충돌, 갈등을 이기고 유학을 떠났다면. 누군가 ‘당신은 돈이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비난을 할까봐 두려워요. 그래서 말하는 게 더욱 조심스럽지만 너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제 내면의 욕구에 따랐던 거예요.”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에로 관장’ 별명 마다하지 않는 이명옥

어린이를 위한 미술책을 두권이나 낸 바 있는 그는 스포츠 신문과 어린이 신문 등에 쉽게 풀어쓴 미술이야기를 기고하고 있다. 어떻게 더 쉽게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 큐레이터와 상의하고 있는 이관장.


딸만 둘인 교육자 집에서 그는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인도 되고 싶고 화가도 되고 싶고 여러가지 꿈이 있었지만 부모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당연히 교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범대에 진학했고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단에 서겠다는 생각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내면에서 자라고 있던 건 ‘뭔가 나만의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예술가적 욕망이었다. 결국 그는 방송국에 취직했다. 교양국 PD로 6년여 일했지만, 방송국 PD란 직업도 그의 예술가적 갈증을 해소해주진 못했다. 방송 또한 정해진 규범과 틀에 순응하며 사람들 속에서 하는 작업이었다. ‘나만의 것’이란 그의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혼하고 자녀까지 둔 30대 중반의 어느날, 일상에 매몰돼 가는 자기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낀 그는 갑자기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 살다 홀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것이 쉬운 결정일 리 없다. 당연히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아무도 안 가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어서 불가리아로 떠났어요. 연고도 없고, 한국 사람도 없는 동구의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마음속에 있었던 거죠. 하지만 화가가 되진 못했어요. 실력은 안되는데 눈은 이마에 달려서 제가 그린 그림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어요. 화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천재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자기 그림을 볼 때 느끼는 열패감을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30대 후반에 느낀 좌절. 이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식까지 떼어놓고 이국에 나왔던가 하는 생각에 그는 한참 동안 방황하고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꿈을 접어놓고 살아온 ‘아줌마의 인내’는 그에게 삶과 타협할 것을 충고했다. 꼭 화가가 아니더라도, 격정적인 예술가의 삶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그림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을 가라고, 그러면 되지 않겠냐고. 그는 귀국 직후 인사동에 사비나란 조그만 갤러리를 열었다. 사비나는 그의 가톨릭 영세명이자 그가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화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 혼자 느끼는 걸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림이 주는 평온과 기쁨을 같이 느끼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 얻는 기쁨,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전람회를 열고 칼럼을 쓰고, 책을 내는 거죠. 제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미술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선택받은 유희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유롭게 와서 자유롭게 보고 즐기면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사비나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진입로는 차 한대가 편하게 지나지 못할 정도로 좁다. 그러나 그의 미술관은 모든 사람을 포옹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곳이다. 2003년 새해, 김밥을 담은 접시를 들고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점심식사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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