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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를 불렀다

editor 김명희 기자

입력 2017.06.07 14:30:05

디지털 시대에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이 있다. 문자에 대한 호기심과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들.
책이 나를 불렀다
EVERYDAY 일상 속의 성차별
‘의견이나 생각을 말하면 사람들이 생리 전이라거나 호르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이 듣기 싫으면 짧은 치마를 입지 말아야지. 마거릿 대처는 남자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지! 그렇다고 우리가 데이트 강간 약을 권장하는 건 아니다. 자네가 농담을 못 참는 사람인 줄 몰랐네. TV 출연에 적합한 외모가 아니다. 아가씨가 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책 같은데, 좀 더 쉬운 책을 찾아보지 그래요?’ 페미니즘 작가 로라 베이츠가 2년간 성차별 경험담을 공유하는 웹사이트를 운영, 거기에 올라온 글들을 기초로 쓴 책이다. 표지에 깨알같이 나열된 일상적인 차별과 폭력이 이 책을 외면할 수 없게끔 한다. 로라 베이츠/미메시스

상냥한 폭력의 시대

언제부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은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다분한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치부됐다. 속으로는 외로움을 견디면서 용감해지기를 원하다 무력해지길 거듭하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무심함을 주고받는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이 9년 만에 내놓는 소설집인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을 포착한 일곱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표지 일러스트가 보여주는 온기 하나 없는 삭막한 공간. 이곳에서 살아가고 소멸할 것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누군가가 저 캄캄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주기를, 그래서 상냥한 폭력에 균열을 내주길 바란다. 정이현/문학과지성사

사피엔스
콜래보이레션이란 패셔너블한 단어에 혹하고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말에 지갑이 열렸다. 물론 이스라엘 출신 젊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는 전 세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변방의 유인원에 불과했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살아남아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나’라는 질문에서 시작, 사피엔스가 걸어온 궤적을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집약해서 보여준다. 이 커버는 한국어판 30만 권 출간을 기념해 김영사와 교보문고가 한정판(5천 부)으로 제작한 것으로, 모든 책에는 고유 넘버가 적힌 빨간색 꼬리표가 붙어 있다. 커버를 빈틈없이 장식한 ‘人(사람)’은 사피엔스 무리를, 빨간색 ‘人’은 인류의 진화를 가져온 돌연변이를 의미한다.  유발 하라리/김영사×교보문고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이 책의 커버에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의 향기를 느꼈다면 당신은 눈썰미 있는 독자. 이들 두 권의 책은 스웨덴 작가가 쓴 노인 모험 소설이란 점 외에 같은 북 디자인 팀의 손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표지에 등장하는 태연한 듯하면서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노인들. 사실 이들은 지금 카지노를 털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중이다. 자신들을 찬밥 취급하는 사회에서 죽은 듯 사느니, 크게 한탕 터트려 그 돈으로 기부도 하고 세상을 바꿔보자고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친근한 일러스트와 레터링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열린책들




책이 나를 불렀다
이렇게 맛있고 멋진 채식이라면 vol.2
음식은 정성이다. 맛도 맛이지만 건강을 생각하면 더더욱 재료 선정부터 조리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부분 소홀히 할 수 없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 자신(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책의 커버, 신선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구운 채소 샌드위치 사진은 그 자체로 올바른 식습관에 대한 영감을 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화려하고 멋진 비주얼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채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이렇게 맛있고 멋진 채식이라면〉의 두 번째 책으로 ‘다이어트가 내 안으로’라는 부제가 붙었다. 가볍지만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106가지 채식 레시피를 담아, 먹는 즐거움도 느끼면서 올바른 식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생강(신주하)/동아일보사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갓 구운 스콘에선 밝고 마른 햇볕 냄새가 났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 신입 건축가 ‘나’가 존경하는 스승과 여름 별장에서 보낸 1년 남짓한 시간을 그린 이 소설은 일본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지만, 최고의 미덕은 역시 담백하고 막힘없는 문체다.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들은 모든 장면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내며 소설의 서사를 떠받친다. 당장 문을 열고 숲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도록 만드는 풍경 사진 같은 커버는 동양화가 이현호가 한지에 수채로 그린 ‘신공촌’이라는 그림이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에서 독자를 낚는다는 점에서 ‘그 소설에 그 표지’다. 마쓰이에 마사시/비채


나는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당당한데 미움 받지 않는 사람들, 반짝반짝 빛나는 생기 있는 사람들. 그들은 공통적으로 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다. 뻔뻔하고 이기적이다. 흔히 이기적이라고 하면 무조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위로 오해를 받지만,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는 거꾸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미움 받을 용기〉가 그랬던 것처럼 제목만으로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듯한 이 책은 사실 2007년 출간된 〈자존심〉이라는 책의 개정 증보판이다. 제목이 이렇게 중요하다.데이비드 시버리/홍익출판사


그런 여자는 없다.
이 책의 제목을 해석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목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는 ‘국민 여동생, 아줌마, 잡년, 꽃뱀, 철벽녀, 된장녀, 걸레, 창녀, 롤리타, 성녀, 공순이, 노처녀, 슈퍼맘, 요부, 꼴페미…’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을 따라다니는 고정관념들이다. 안 하면 철벽녀 하면 걸레, 10대 여성은 성인 남자를 ‘원한다’는 남자들의 잘못된 판타지에 의해 탄생한 롤리타. 책은 ‘##녀의 계보학’을 살피고 이런 관념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 게릴라걸스는 공공장소에서 고릴라 가면을 쓰고 성차별 반대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행동가 그룹이다. 게릴라걸스/후마니타스

사진 홍중식 기자 디자인 최정미




여성동아 2017년 6월 6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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