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골백번은 오간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짓눌리기도 잠시.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그는 기자가 근래 만난 사람 중 가장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본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연유를 묻자 박 교수는 “시간 여행자처럼 산다”고 표현했다. 과거의 고통 속에서도 기쁨의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을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연습이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 이를 바탕으로 박 교수는 최근 죽음을 둘러싼 오해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내서 ‘죽음 공부’를 펴내기도 했다. 죽음을 더 많이 알고, 더 일찍 고민하고, 더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이 녹아 있다. 그는 “의사도 신이 아니다”라며 “내 삶, 내 몸의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아내기 위해 죽음을 공부하는 박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죽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죽음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 얽혔던, 남겨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죠. 의사로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지켜보며 환자가 세상을 떠난 뒤 보호자들이 겪는 후회와 죄책감을 가까이에서 봐왔습니다. 나 혼자만 죽음을 준비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온 사람들과 어떻게 잘 작별한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곧 죽음에 관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잘 작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서로에게 후회와 앙금이 남지 않도록 생전에 충분히 인사하고, 감사하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투병 끝에 죽음을 맞았다고 해도 남겨진 보호자들은 미안함과 연민을 많이 느껴요. 긴 간병에 지쳤던 보호자라도 환자가 막상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어땠을까” “그때 왜 그렇게 말했을까”라며 후회하죠. 그런 감정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생전에 조금씩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준비는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미안한 마음을 미리 덜어내고, 고마움은 먼저 표현하는 것이죠. “내 아들로 살아줘서 고맙다” “우리 아버지여서 감사하다”는 한마디가 언젠가의 죄책감을 덜어줍니다. 특히 파킨슨병 환자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 꼭 보호자에게 ‘고맙다’고 하시라”고 말씀드려요. 병이 진행되면 목소리도 못 내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정작 말하고 싶은 순간에는 표현조차 어려워져요. 외래 진료를 할 때, 제가 보는 앞에서 감사 인사를 하라고 권하기도 해요. 처음엔 대부분 쑥스러워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나중에 보호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걸 현장에서 자주 목격했습니다.
교수님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나요.
그럼요. 늘 둘 사이가 좋을 수는 없기에, 평소 섭섭한 말을 하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은 꼭 건넵니다. 또 제 생일 때마다 어머니께 감사의 의미로 꽃을 선물해요. 나중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좀 더 잘해드릴걸’ 하면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요.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요(웃음).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만큼 ‘웰다잉’ 역시 혼자 고통 없이 죽는 문제가 아니라 곁의 사람들과 어떻게 잘 이별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떠나는 이뿐만 아니라 남겨진 이에게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렇기에 남겨진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받고, 자연스럽게 잊혀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1년에 한 번쯤 그분 생일이든 기일이든 모여 앉아서 생전에 그분이 남긴 목소리나 사진 같은 걸 함께 듣고 보며 “아, 저분 저랬지” 하면서 밥 한 끼 같이 먹고요. 꼭 형식적인 절차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하고 치유를 받기 위해서요. 장례식도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 시간이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80인치 TV 두세 대에 그분의 생전 영상을 틀어놓고, 좋아하던 노래를 배경으로 흘려보내는 거죠. 저는 밥 한 끼 대접하고, 따뜻하게 기억할 장례식을 상상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만약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생전 장례식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생전 장례식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 초대해서 밥 한 끼 대접한 후 “덕분에 풍요로운 인생이었다. 이제는 나 떠날게, 잘 있어라” 이렇게 인사하고 싶어요. 일종의 작별 파티처럼요. 아프리카 부족 중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서 불쌍하다”며 다 함께 울고, 오히려 죽을 때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축하하며 기리는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같은 방식에 공감이 갔어요. 잘 살아온 삶에 대해 축하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면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이 생의 마지막 하루라면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2003년 인턴 시절 처음으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했어요. 당시엔 환자가 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 흔했어요. 인턴이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숨을 지켜보다가 사망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죠. 그렇게 수많은 마지막을 지켜보며 느꼈어요. 나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요. 누구나 갑자기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이 올 수 있다는 걸 매일 보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보다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가 더 중요해졌어요. 죽음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어떻게 죽고 싶은지가 오히려 더 뚜렷하게 귀중해진 거죠.
사실 죽음은 준비할 새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기도 해요.
맞아요. 심지어 단순한 사고가 평생을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에는 술을 조금 마시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60대 환자 한 분이 오셨어요. 평소에 경추 척수증, 즉 목뼈가 좁아지는 질환이 있었던 분인데 그날 충격으로 척수가 눌리면서 사지 마비가 왔죠. 그냥 한 번 넘어졌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 거예요. 그 환자는 앞으로는 스스로 숨도 못 쉬고, 목에 구멍을 뚫어야 하고, 온갖 의학적 처치를 받으며 살아가야 해요. 그 환자한테 제가 “어디 아프세요?”라고 물었더니, 사지 마비 상태라서 통증은 없는데 “마음이 아프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그러한 사고는 모두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죠. 그런데 의사들조차 자신은 예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병은 환자에게만 오는 일이고, 자신은 아닐 거라고 여기는 거죠. 저는 그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요. 얼마 전에도 한 신경외과 전문의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설마 내가 그 병일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영상을 봤어요. 그런데 의사도 결국 사람이잖아요. 병에 걸릴 수도, 죽음 앞에 설 수도 있죠. 환자 입장에서 죽음은 단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기에 그 흐름이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늘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늘 옆에 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러한 태도가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결국 삶은 ‘한 일’과 ‘안 한 일’로 나뉘는 것 같아요. 내가 뭘 했고, 하지 않았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기면서 살고 있어요. 낯선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하거나 새로운 공간에 가는 일이 예전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해요. 같은 상황이라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가능한 한 긍정적인 면을 보려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더 충만해졌어요.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자’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어요.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오니까요.
이를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이 안 될 때가 많아요.
맞아요. 특히 파킨슨병이나 치매처럼 노인성 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은 “내가 이 병인데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치료는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에요. 계속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덜어지면 산책도 하고, 여행도 갈 수 있게요. 실제로 환자 한 분이 얼마 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기에 “너무 잘하셨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살아보라고 계속 치료를 하는 거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오늘 하루라도 잘 살아야 덜 아쉽지 않을까요.

박광우 교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아 에세이집 ‘죽음 공부’를 출간했다.
죽음이 선물한 오늘의 소중함
박 교수는 도보 여행자와 같은 삶을 지향한다. 그는 “집에도 꼭 필요한 물건 몇 개만 두고, 두세 달 동안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바로 중고로 팔아버린다”며 “마치 여행자가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 다니듯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당장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굳이 아등바등 살 이유가 있을까 싶다”며 “인생을 여행처럼 생각하면서 집도, 삶도 가볍게 유지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죽음을 늘 염두에 두면서 밝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요.
4년간 서울에서 원주까지 출퇴근하며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역 앞 나무들이 계절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지는 나무들을 살피다 보니 출근길이 단순히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감탄을 마주하는 시간이었죠. 고된 과정이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자 삶을 즐길 수 있게 됐어요. 너무 허망한 죽음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날이 오더라도 ‘이 정도면 잘 살았다’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오늘 하루를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들로 채우고 싶어요.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삶을 놓지 않으려는 저만의 방식이죠.
죽음을 자주 떠올리다 보면 오히려 삶이 더 선명해지는군요.
네. 최근에 동료 교수 한 분이 연구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어요. 동료들과 함께 조문 다녀오고 나서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마침 눈이 펄펄 내리는데, 그 눈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리고 다 같이 팥칼국수를 먹는데, 그게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요. 그때 생각했어요. 죽으려면 이유가 100가지는 되지만 살 이유도 100가지는 된다는 걸요. 죽음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분명 자살을 떠올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도 느끼게 돼요. 삶의 끝에 몰려서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팥칼국수 한 그릇만 더 먹고’ ‘오늘 밤 눈 한 번만 더 보고’ 이렇게 하루씩, 딱 하루씩 미뤄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그렇게 아름다운 순간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걸 보기 전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저도 당장 내일부터 출근길 나무의 변화를 지켜봐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똑같은 길을 오가더라도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여요. 저도 늘 같은 길로 출퇴근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은 변화들을 일부러 눈여겨보려고 해요. 소소하게 ‘앞차 후미등이 예쁘네’ ‘저건 무슨 차일까?’ 같은 것들이죠. 삶이라는 게 정상만을 보고 오르면 얼마나 지치고 힘들어요. 오르는 길에서도 작은 재미를 찾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참고 버텨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요.
일단 그 산이 정말 올라갈 만한 ‘정상’이 있는 산이어야 하겠죠. 말하자면, 내가 오르려는 산이 단단한 목표를 가진 의미 있는 산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결과에만 매몰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업무 중에 동료랑 커피 마시며 얘기하는 그 짧은 시간도 너무 소중하고 즐거워요. 삶이라는 게 결국 그런 작은 순간들의 축적이라고 생각해요. 버텨야 하는 날이더라도 그 하루 안에서 재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독자들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지금 마시는 커피 한 잔도 누군가 고생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또 여기까지 가져다준 것이고요. 보도블록의 경사로 하나도 누군가가 이를 이용할 사람들을 배려해서 설치한 것이죠. 주변에 있는 하나하나를 새롭게 보다 보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결국 모든 것에 감사하게 돼요. 언젠가 죽을 때 ‘더 못 해봐서 아쉽다’가 아니라 ‘재미있게 잘 놀다 간다’고 받아들이며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길 바랍니다.
#죽음공부 #호스피스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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