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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문화의 품격을 HYE 惠에 담다

인하대 의류디자인학과 정성혜 교수

글 · 정희순 | 사진 · 홍중식 기자

입력 2016.06.02 08:50:43

박물관이나 고궁에서 보았던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 패션 안에 녹아들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강단 밖으로 나온 인하대 의류디자인학과 정성혜 교수. 그가 말하는 우리 전통문화의 품격.
한국 전통문화의 품격을  HYE 惠에 담다
한국 전통문화의 품격을  HYE 惠에 담다
명품이란 무엇일까. 아트 컨설턴트 조혜덕은 〈명품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고급 재료로 비싼 제품을 만든다고 해서 모두가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 철학과 그 철학이 담긴 예술이 사람들과 소통할 때, 진정한 명품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명품 브랜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인하대학교 의류디자인학과 정성혜(57)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우리나라 전통의 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패션 브랜드 ‘혜(惠)’를 최근 론칭했다.

“30여 년 가까이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패션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웠어요. 한국패션디자인학회 회장과 한국의류산업학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해외에서 전시회나 패션쇼를 열 기회가 많았는데, 외교관들을 만나면 꼭 하시는 말씀이 ‘외국의 명사들에게 선물할 만한 한국의 문화 상품이 너무 제한적이다’였죠. 외국 명사들에게 패션 소품만큼 선물하기 좋은 건 없는 것 같다며, 산학 협력을 통해 제품을 개발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사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제가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취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데다 우리나라 문화 홍보에도 기여하는 일이 될 것 같아 브랜드를 개발하게 됐어요.”

정 교수의 말처럼, 사실 우리나라엔 세계에 자랑스레 내놓을 만한 이렇다 할 명품 패션 브랜드가 없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세계적인 브랜드 ‘이세이미야케’ ‘겐조’가 있고, 중국 역시 자국의 감성을 표현한 명품 브랜드 ‘상하이탕’이 존재한다. 막강한 한류 콘텐츠로 아시아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패션 분야에서만큼은 맥을 못 추고 있는 실정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해요. 저는 대학에서 줄곧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죠. 이번에 론칭한 브랜드 혜의 디자인 콘셉트는 ‘조선의 미를 찾아서’예요. 조선시대 규방의 자수와 조각보, 민화, 문양 등에서 모티프를 얻어 새롭게 디자인했어요.”

정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 유물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은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유명 건축물인 궁과 사찰 등을 함께 거닐며 자료를 수집했다. 규방 여인들이 만들었다는 조각보부터 민화에 등장하는 곤충들까지. 우리의 전통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왕실의 어전과 대웅전에만 사용됐다는 꽃살문은 그중에서도 제일이었다. 정 교수는 이 꽃살문에 우리 민족의 색인 백색과 조선시대 국가 색인 청색을 조합해 혜의 메인 디자인을 만들었다. 혜의 모든 패키지에 들어가 있는 이 꽃살 문양은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외국분께 저희 넥타이를 선물하고 문양의 의미를 설명해드렸더니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몇 백 년 전 전통문화에서 이런 세련된 디자인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면서요.”



학교 밖으로 나온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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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 교수가 처음부터 브랜드를 론칭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한두 곳에서 연구비를 받아 ‘문화 상품 전시회’를 여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막상 이를 실행하려니 상품화하기에는 수량이 너무 적은 탓에 무리가 있었다. 프로젝트성 전시가 아닌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연구 개발비를 받은 것만으로는 사업을 시작하기 힘들었어요. 내년이면 교수가 된 지 만 30년이에요. 굳이 사업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정년이 됐을 때 제가 학교나 학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1년치 월급을 쏟아부어서 학생들의 인턴십을 돕고 취업에 도움도 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사업이 잘되면 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정 교수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자연스레 배움의 폭이 넓어졌다.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우리의 전통문화가 디자이너의 감각을 통해  얼마든지 현대적인 느낌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된 것이다.

“조각보를 가만히 보면 마치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카피한 것 같은 느낌이잖아요. 몬드리안은 20세기 모던 아트의 선구자지만, 우리나라는 오래전 조선시대 규방 여인들이 즐긴 예술이에요. 색동은 또 어떤가요? 폴스미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귀부인의 치마에 등장하죠. 고리 금문이 꼭 구찌 체인 같다고요? 이건 조선시대 지어진 사찰에 있는 금고리 문양을 표현한 거예요. 우리나라 전통 예술이 서구의 모던 아트보다 1백 년 이상 앞서 있는 셈이에요.”

서울 반포동에 매장을 내기 직전인 2월에는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초대전에도 참여했다. 호텔 룸 한 칸을 혜의 스카프 작품들로 꾸몄다. 전시를 본 외국인 관람객들은 “한국은 케이팝이나 IT가 발달해 있어 굉장히 경쟁적이고 긴장감 있는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감성적인 전통이 있는 줄 몰랐다. 에르메스나 페라가모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전통을 모티프로 한 스카프나 넥타이 전문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소비자가 혜의 제품을 신선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매장을 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반응이 꽤 좋은 편이에요. VIP 선물용으로 단체 주문이 많이 들어오거든요.”

과거 제일모직과 앤클라인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교수 재직 중에도 현장 실무 조사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사업에 뛰어든 건 처음이다. 일평생 디자인 연구를 해온 정 교수에게 유통이나 회계, 마케팅 같은 용어들은 여전히 어렵다. 애초부터 경영을 공부한 사람이었다면 매출을 가장 1순위로 생각했을 테지만, 정 교수는 혜의 가치가 ‘깊이 있는 디자인’에서 비롯된다는 걸 안다. 혜가 명품 브랜드로 자리하려면 ‘우리 문화를 담겠다’는 본래의 취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두 아들의 자랑스러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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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혜 교수의 큰아들 승윤 씨는 옥스퍼드대 재학 당시 한류 스타 싸이를 연사로 초청해 화제를 모았다.
▶ 정 교수의 두 아들 승윤 씨(좌)와 승준 씨(우).

사실 4년 전 정 교수는 자식 농사를 잘 지은 주인공으로 여러 언론에 소개됐다. 당시 큰아들 이승윤(26) 씨는 옥스퍼드대 학생 자치기구인 옥스퍼드유니언 회장에 한국인 최초로 당선돼 화제를 모았고, 한류 스타 싸이를 연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올해 〈포브스〉에서 선정한 30세 미만의 아시아 글로벌 리더이기도 하다. 둘째 아들 승준(24) 씨 역시 미국의 명문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엘리트다.  

“승윤이가 유명해지자 여러 출판사로부터 교육법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그게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고사했죠. 제가 패션 브랜드를 론칭했다고 하니 승윤이가 ‘엄마, 아들 덕 보길 기대하면 안 돼요. 엄마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해야죠’라고 농담처럼 말하더라고요. 자기는 외국에 있어서 도움을 못 주니 100세 시대를 생각해서 능력 계발에 힘써보래요(웃음). 건축을 전공한 승준이도 ‘늦게 시작해서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감각을 키워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놀리는 척 응원해 주었어요.”

이제는 장성해 외국에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아들은 정 교수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승윤 씨는 영국에서 스타트 업을  해 ‘래디쉬(www.radishfiction.com)’라는 미디어 기업을 운영 중이고, 승준 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건축 회사에서 일한다. 두 아들 모두 기회가 될 때마다 외국의 지인들에게 혜의 시그니처 아이템을 선물해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래디쉬에 투자한 투자가 중 한 분께 혜 넥타이를 선물했더니 환호를 하더래요. 현대적인 세련미와 한국적인 정서가 동시에 느껴진다며 미국에 언제 진출하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중국 투자 전문가로 미국 블룸버그 방송에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저희 제품이 방송에 노출됐어요. 저를 닮아 미적 감각이 탁월한 승준이도 혜의 홈페이지 제작과 로고 제작에 대해 컨설팅을 해줬어요. 이제 아들들이 저를 키워주는 것 같아요(웃음).”

‘엄친아’를 둘씩이나 키워낸 정 교수는 정작 자신은 자식 교육을 위해 양팔 걷어붙이고 나선 적이 없다고 했다. 스스로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제가 학교 일을 하느라 아이들을 잘 챙겨주지 못했어요. 초등학교 때 승윤이 표정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어두운 것 같더라고요. 순간 ‘내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명성을 쌓는다 해도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너무 슬프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외부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죠. ‘공부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옆에 앉아 책을 읽어줬고, 주말마다 박물관이나 주말농장을 찾았어요. 방학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고요.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것뿐이죠.”

정 교수의 바람대로 두 아들은 자신들의 흥미와 재능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초등학교 때 영어 학원 기초반 시험에도 떨어졌던 승윤 씨는 ‘영어를 잘하고 싶다’며 여행으로 떠났던 미국에 혼자 남았고, 승준 씨는 홍콩 여행 중 본 야경에 매료돼 건축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아이들 말이, 엄마가 쉬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제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엄마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적어도 엄마만큼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엄마와 자식 간에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비뚤게 자라지 않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언제까지나 자랑스러운 엄마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정성혜 교수가 제안하는 여름철 스카프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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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민소매 옷을 많이 입는데 실내에선 에어컨 바람 때문에 한기를 느낄 때가 있죠. 스카프 같은 걸 핸드백에 넣고 다니다가 좀 춥다 싶으면 숄처럼 활용하거나 목에 두르면 좋아요. 미국 유학 시절, 인도 친구와 방을 함께 썼는데 어느 날 친구의 서랍장을 열어보니 옷은 몇 벌 없고 다양한 색감의 천들만 곱게 포개져 있더라고요. 천을 몸에 둘러 옷 대신 활용하고 있는 거였죠. 요즘처럼 유행이 빨리 바뀔 땐, 기본적인 옷 몇 벌에 스카프를 여러 개 갖고 있으면 다양한 연출이 가능할 것 같아요. 부피도 작아 관리하기 편하니까요.

사진제공 · 디자인하우스 혜(02-532-1757 www.designhye.com)  | 디자인 · 이지은




여성동아 2016년 6월 6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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