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ENA가 몇 번이야?”
지난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실시간으로 ‘본방 사수’하려 했던 시청자라면 한 번쯤 했을 말이다. 0.9%의 미미한 시청률로 출발해 3회 만에 4% 돌파, 결국 17.5% 시청률로 마무리한 ‘우영우’는 소위 ‘듣보잡’ 채널이었던 ENA 인지도를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KT 그룹 내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인 스카이TV와 미디어지니가 리브랜딩을 통해 야심 차게 내놓은 ENA는 시청자 기반의 ‘남다른(extraordinary) 즐거움’을 채널 아이덴티티로 삼고 있다. 실제로도 남다른 즐거움을 위해 연일 파격적인 행보 중이다. 특히 ‘포스트 우영우’가 언제 나오느냐는 냉소적인 시선 속에서도 꾸준히 선보인 웰메이드 드라마 라인업에서는 신생 채널의 패기가 느껴진다. 올여름 방영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과 ‘신병2’ ‘남남’ ‘유괴의 날’ 등은 높은 시청률과 함께 내용 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유괴의 날’ 같은 경우 유괴범과 유괴를 당한 11세 소녀가 서로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미스터리와 휴머니티를 잘 녹여내 2049 타깃 시청률이 ‘우영우’에 이어 ENA 역대 2위를 기록했다. 겨울에는 정우성과 신현빈의 정통 멜로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관심을 이어갈 예정이다. 여기에 제51회 국제 에미상 ‘베스트 드라마’ 부문 후보작에 포함된 ‘우영우’가 미국 뉴욕에서 승전보를 전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한 해 마무리일 터.
11월 9일 ENA 사옥에서 오광훈(52) ENA 콘텐츠사업본부장을 만났다. 오광훈 본부장은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2049 타깃 시청률 기준으로 ENA가 지상파와 종편 다 합쳐 10등 안쪽까지 들어왔다”며 “원래 30~40등 하던 채널이었던 걸 생각하면 많이 컸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한다”며 웃었다.
오늘 시청률 표는 만족스럽게 나왔나요.
원래 수·목요일 저녁 시간이 ENA에서 주력하는 시간대예요. 드라마 이후 ‘나는 솔로’가 이어지거든요(일반인 짝 찾기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솔로’는 지난 16기의 경우 7~8%대 시청률을 기록했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방영 초반이긴 해도 ‘낮에 뜨는 달’이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하긴 현재 방송사에서 수목드라마를 편성한 곳은 ENA가 유일합니다. 자신이 있는 건가요.
보통 금·토요일 블록에 드라마가 몰립니다. 그럼 우리도 그 시간에 편성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가 없는 시간대에 도전해보는 게 나은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년에도 수목드라마는 계속 편성될 겁니다. 자신감이라기보단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중이에요. 다행히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아요.
파격을 통해 얻은 성과가 아예 없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 컸죠. ‘우영우’만 하더라도 SBS와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끌어온 작품이잖아요.
사실 내건 조건이 크게 다른 건 아니었을 거예요. 조건보다는 의사 결정이 몹시 신속했다고 할까요. 당시 KT 그룹 제작사인 스튜디오지니가 금요일 저녁에 시나리오를 보내주면서 내일 아침까지 빠르게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드라마 시나리오 검토하는 팀이 밤새 돌려가며 대본을 읽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끝까지 고민했던 SBS 본부장님으로부터 ‘우영우’ 2회가 끝나고 전화가 왔어요. 속은 쓰리지만 축하한다고요. 운이 좋았죠(웃음).
운도 운이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난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저는 사전에 대본을 보지 않아요. 제가 재미있다고 하면 콘텐츠전략팀 팀원들 생각은 그렇지 않더라도 영향을 미치게 되잖아요. 우리는 ‘그린 라이트 커미티’라는 집단 토론 체제로 결정을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ENA로 재론칭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사온 재방 채널로서 나름의 빅데이터 시스템을 갖고 있어요. 한 10년 동안의 드라마 데이터를 입력해놓고 그 수치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예상 시청률을 뽑아 일정 기준 이상 작품만 사는 거죠. 이 시스템이 업계에 소문이 나서 팔라는 곳도 있고, 드라마를 판매하는 측에서도 작품 팔 때 ENA가 산다, 괜찮을 것 같다고 홍보하는 수준까진 온 것 같아요.
오로지 시스템 덕분이라기엔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우영우’의 박은빈, ‘마당 있는 집’의 임지연, ‘낮에 뜨는 달’의 표예진 등 ENA 드라마 속 여배우들이 연기 잘하는 30대 초반이란 공통점이 있어서 일부러 노린 건가 생각했거든요.
일단 우리가 메인 타깃으로 하는 시청자는 2049, 특히 30대 여성이에요. 이들은 어디서 무얼 먹고, 하루에 몇 시간 TV를 보고, 직업은 무엇인지 조사해 우리 채널의 ‘페르소나’를 만들고 최대한 거기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지향하는 방향인 남다른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 좀 다를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채널A와 공동 제작한 ‘애로부부’나 ‘강철부대’처럼 타 채널과의 협력도 업계 최초로 시도하게 된 거죠.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맨날 보던 인물보다는 인상 깊은 신선한 캐스팅을 선호해요.
이런 다양한 시도 안에서 ‘남남’과 ‘유괴의 날’ 같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웰메이드작이 나온 거군요. 자식에게 무조건 헌신하지 않는 ‘남남’의 엄마 캐릭터가 좋았어요.
저도 좋아해요. 지금은 ‘악인전기’ 같은 과격한 드라마도 해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같은 잔잔한 작품도 해보면서 우리한테 최적인 콘텐츠를 찾아가는 시기예요. 물론 무모한 시도가 아니라 모든 과정을 스튜디오지니, KT와 그룹 차원에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죠.
그룹 차원의 협력인데 오히려 말이 나오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신하균과 김영광의 ‘악인전기’는 ENA 외에 지니TV에서만 볼 수 있잖아요. 넷플릭스, 티빙 등 다른 OTT에 유통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그런데 OTT 플랫폼은 영원한 숙제 같아요.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 우리 드라마가 나오는 게 우리 시청률에 도움이 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 드라마가 다른 OTT에 없으면 어떻게든 TV를 통해 실시간이나 재방 편성으로 보겠죠. 그런데 ‘우영우’처럼 넷플릭스로 보다가 이거 봐야겠다 싶어 본방송을 챙겨 볼 수도 있거든요. 도대체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넷플릭스 연간 최상위권에 있는 콘텐츠 중 대다수는 우리 같은 방송국들이 제공합니다. 넷플릭스 덕분에 세계로 가는 고속도로가 한 번에 깔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콘텐츠를 제공해 넷플릭스를 키운 건 우리이다 보니 스스로에게 총을 쏜 셈이기도 하죠.
OTT 오리지널 때문에 드라마 제작비가 엄청 오른 것도 문제고요.
요즘 드라마는 방송국에서 돈 먹는 하마예요. 실패 시 타격을 줄이기 위해 편성 자체를 덜하게 되니까 제작해놓고도 내보낼 방송사가 없어 쌓여 있는 작품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K-콘텐츠를 위한다며 방송사는 제외하고 중소 제작사 위주로 지원하고 있어요. 잘 만들면 뭐 하나요. 틀 곳이 없는걸요. 생각해볼 문제예요.
스카이라이프, 지니TV, Btv, U+tv 등 가입처에 따라 채널 번호가 들쑥날쑥한 점도 넘어야 할 산이에요.
우리도 어떻게든 채널 번호를 보다 앞쪽으로 당기려는 노력을 당연히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에요. 또 번호가 안 좋으면 시청률 0.1%를 절대로 못 넘는단 업계의 오래된 정설을 우리가 ‘우영우’를 통해 깬 바 있잖아요. 지금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좋은 콘텐츠 만들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좋은 콘텐츠가 이번 달 3명의 시청자에게 ENA를 알렸다면 다음 달은 5명이 보고 이런 식으로 조금씩이라도 채널 인지도에 연속적인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결국은 콘텐츠 싸움이군요. 그래서 오리지널 제작 드라마에 더 집중하는 건가요. 앞으로 눈여겨볼 작품은 무엇인가요.
일단 11월 27일 첫 방영되는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정우성 배우의 11년 만의 멜로드라마 복귀작이에요. ENA 첫 정통 멜로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멋있는 배우여도 수어로만 연기하는데 멋있을지 걱정했거든요. 기우였어요. 역시 멜로 눈빛이 멋있더라고요. 또 ‘우영우’를 함께 했던 에이스토리와 ‘모래에도 꽃이 핀다’란 작품을 같이 합니다. 대본이 좋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어요.
‘우영우’ 시즌 2는 내년에 하나요.
같은 작가님이 집필에 들어가긴 했는데, 법률용어라든지 자폐 관련 부분 등 자료 조사가 워낙 많아 뚝딱 나올 수 있는 대본이 아니에요. 게다가 일단 ‘우영우’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배우도 제대해야 하고요. 내년 4월에 제대한대요. 그 친구는 입대 전날까지도 광고 촬영을 했다는데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까봐야 알죠. 드라마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지 않으면 순탄하게 갈 수 없는 비즈니스입니다(웃음).
2002년 스카이라이프에 입사한 오광훈 본부장은 2017년 스카이TV에서부터 콘텐츠 사업을 담당해오고 있다. 오광훈 본부장이 ENA에서 하는 업무는 재무나 인사, 광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이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제작 전반에 대한 결정과 타 콘텐츠 구매, 그렇게 확보된 콘텐츠들을 최적의 시간대에 편성하는 일을 담당한다. 스스로는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하지만 드라마를 줄줄 꿰고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함께 가주는 ‘힙한’ 중년이다.
어떻게 방송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IMF 당시 현대상선(현 HMM)이었는데 일하다 보니 저는 노는 쪽 분야와 잘 맞는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게임 회사로 옮겼다가, 그리고 또 노는 것의 정점은 무엇이든 다 다루는 TV 아니겠어요. 어려서부터 노는 걸 좋아했어요. 성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부모님한테 혼도 많이 났죠. 하지만 회사를 다니다 보니 저절로 성실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럼 성실하게 평소에도 콘텐츠를 많이 보는 편인가요.
몇 해 전만 해도 의무감으로 드라마를 봤어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지금은 눈물도 많아졌고 정말 푹 빠져 봅니다(웃음).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도 좋아해서 ‘펜트하우스’나 ‘쇼윈도: 여왕의 집’도 재미있게 봤어요. 다만 정작 우리 작품은 시청자 입장에서 푹 빠져 보는 게 불가능해요. 실시간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과 시청률 추이를 살펴가며 보기 때문에 방영 당시에는 몰입이 힘들어요.
다양한 드라마를 접하는 입장에서 K-드라마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K’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는 아무래도 ‘더 글로리’처럼 등장인물 간의 갈등 구조가 과장된 작품이 인기가 많고, 또 그만큼 많이 만들어지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과장의 정도가 ‘말도 안 돼’와 ‘그럴 수도 있겠다’의 경계를 오가는 게 K-드라마의 묘미인 거죠. 드라마든 예능이든 결국은 사람이 나오는 거잖아요. 내면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풀어가는 데 있어 우리나라 제작진의 역량이 뛰어난 것 같아요.
세계 3대 방송상 중 하나인 국제 에미상에 ‘우영우’가 최종 후보로 올랐습니다. 수상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점치나요.
방정맞은 이야기는 안 하려고요.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숫자에 민감한 삶을 살고 있는데, 올 한 해를 점수로 매긴다면요.
흠.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좋은 직장 상사도 아니었던 것 같아 후하게 주면 75점 정도 되겠어요. 저도, 회사도 내년에는 100점을 목표로 좀 더 잘 살아봐야죠. 올해도 많이 빠지긴 했는데 10kg 이상 더 감량하는 게 개인적인 목표예요.
혹시 시청률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서 빠진 건 아니죠.
하하하. 아닙니다. 보통 저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먹어서 푸는데요. 올해는 마음고생이 덜했나 봅니다. ENA가 견조한 흐름을 보여줬고, 물론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드러났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 성적은 90점이었어요. 이왕이면 내년에는 ‘우영우’에 필적하는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ena #우영우 #여성동아
사진 제공 ENA
지난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실시간으로 ‘본방 사수’하려 했던 시청자라면 한 번쯤 했을 말이다. 0.9%의 미미한 시청률로 출발해 3회 만에 4% 돌파, 결국 17.5% 시청률로 마무리한 ‘우영우’는 소위 ‘듣보잡’ 채널이었던 ENA 인지도를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KT 그룹 내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인 스카이TV와 미디어지니가 리브랜딩을 통해 야심 차게 내놓은 ENA는 시청자 기반의 ‘남다른(extraordinary) 즐거움’을 채널 아이덴티티로 삼고 있다. 실제로도 남다른 즐거움을 위해 연일 파격적인 행보 중이다. 특히 ‘포스트 우영우’가 언제 나오느냐는 냉소적인 시선 속에서도 꾸준히 선보인 웰메이드 드라마 라인업에서는 신생 채널의 패기가 느껴진다. 올여름 방영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과 ‘신병2’ ‘남남’ ‘유괴의 날’ 등은 높은 시청률과 함께 내용 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유괴의 날’ 같은 경우 유괴범과 유괴를 당한 11세 소녀가 서로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미스터리와 휴머니티를 잘 녹여내 2049 타깃 시청률이 ‘우영우’에 이어 ENA 역대 2위를 기록했다. 겨울에는 정우성과 신현빈의 정통 멜로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관심을 이어갈 예정이다. 여기에 제51회 국제 에미상 ‘베스트 드라마’ 부문 후보작에 포함된 ‘우영우’가 미국 뉴욕에서 승전보를 전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한 해 마무리일 터.
11월 9일 ENA 사옥에서 오광훈(52) ENA 콘텐츠사업본부장을 만났다. 오광훈 본부장은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2049 타깃 시청률 기준으로 ENA가 지상파와 종편 다 합쳐 10등 안쪽까지 들어왔다”며 “원래 30~40등 하던 채널이었던 걸 생각하면 많이 컸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한다”며 웃었다.
신생 채널의 이유 있는 파격 실험
지난해 스카이티브이 역대 최대 매출의 중심축이 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원래 수·목요일 저녁 시간이 ENA에서 주력하는 시간대예요. 드라마 이후 ‘나는 솔로’가 이어지거든요(일반인 짝 찾기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솔로’는 지난 16기의 경우 7~8%대 시청률을 기록했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방영 초반이긴 해도 ‘낮에 뜨는 달’이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하긴 현재 방송사에서 수목드라마를 편성한 곳은 ENA가 유일합니다. 자신이 있는 건가요.
보통 금·토요일 블록에 드라마가 몰립니다. 그럼 우리도 그 시간에 편성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가 없는 시간대에 도전해보는 게 나은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년에도 수목드라마는 계속 편성될 겁니다. 자신감이라기보단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중이에요. 다행히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아요.
파격을 통해 얻은 성과가 아예 없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 컸죠. ‘우영우’만 하더라도 SBS와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끌어온 작품이잖아요.
사실 내건 조건이 크게 다른 건 아니었을 거예요. 조건보다는 의사 결정이 몹시 신속했다고 할까요. 당시 KT 그룹 제작사인 스튜디오지니가 금요일 저녁에 시나리오를 보내주면서 내일 아침까지 빠르게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드라마 시나리오 검토하는 팀이 밤새 돌려가며 대본을 읽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끝까지 고민했던 SBS 본부장님으로부터 ‘우영우’ 2회가 끝나고 전화가 왔어요. 속은 쓰리지만 축하한다고요. 운이 좋았죠(웃음).
운도 운이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난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저는 사전에 대본을 보지 않아요. 제가 재미있다고 하면 콘텐츠전략팀 팀원들 생각은 그렇지 않더라도 영향을 미치게 되잖아요. 우리는 ‘그린 라이트 커미티’라는 집단 토론 체제로 결정을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ENA로 재론칭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사온 재방 채널로서 나름의 빅데이터 시스템을 갖고 있어요. 한 10년 동안의 드라마 데이터를 입력해놓고 그 수치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예상 시청률을 뽑아 일정 기준 이상 작품만 사는 거죠. 이 시스템이 업계에 소문이 나서 팔라는 곳도 있고, 드라마를 판매하는 측에서도 작품 팔 때 ENA가 산다, 괜찮을 것 같다고 홍보하는 수준까진 온 것 같아요.
오로지 시스템 덕분이라기엔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우영우’의 박은빈, ‘마당 있는 집’의 임지연, ‘낮에 뜨는 달’의 표예진 등 ENA 드라마 속 여배우들이 연기 잘하는 30대 초반이란 공통점이 있어서 일부러 노린 건가 생각했거든요.
일단 우리가 메인 타깃으로 하는 시청자는 2049, 특히 30대 여성이에요. 이들은 어디서 무얼 먹고, 하루에 몇 시간 TV를 보고, 직업은 무엇인지 조사해 우리 채널의 ‘페르소나’를 만들고 최대한 거기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지향하는 방향인 남다른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 좀 다를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채널A와 공동 제작한 ‘애로부부’나 ‘강철부대’처럼 타 채널과의 협력도 업계 최초로 시도하게 된 거죠.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맨날 보던 인물보다는 인상 깊은 신선한 캐스팅을 선호해요.
이런 다양한 시도 안에서 ‘남남’과 ‘유괴의 날’ 같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웰메이드작이 나온 거군요. 자식에게 무조건 헌신하지 않는 ‘남남’의 엄마 캐릭터가 좋았어요.
저도 좋아해요. 지금은 ‘악인전기’ 같은 과격한 드라마도 해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같은 잔잔한 작품도 해보면서 우리한테 최적인 콘텐츠를 찾아가는 시기예요. 물론 무모한 시도가 아니라 모든 과정을 스튜디오지니, KT와 그룹 차원에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죠.
그룹 차원의 협력인데 오히려 말이 나오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신하균과 김영광의 ‘악인전기’는 ENA 외에 지니TV에서만 볼 수 있잖아요. 넷플릭스, 티빙 등 다른 OTT에 유통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그런데 OTT 플랫폼은 영원한 숙제 같아요.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 우리 드라마가 나오는 게 우리 시청률에 도움이 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 드라마가 다른 OTT에 없으면 어떻게든 TV를 통해 실시간이나 재방 편성으로 보겠죠. 그런데 ‘우영우’처럼 넷플릭스로 보다가 이거 봐야겠다 싶어 본방송을 챙겨 볼 수도 있거든요. 도대체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넷플릭스 연간 최상위권에 있는 콘텐츠 중 대다수는 우리 같은 방송국들이 제공합니다. 넷플릭스 덕분에 세계로 가는 고속도로가 한 번에 깔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콘텐츠를 제공해 넷플릭스를 키운 건 우리이다 보니 스스로에게 총을 쏜 셈이기도 하죠.
OTT 플랫폼과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
‘악인전기’ ‘남남’ ‘마당이 있는 집’. 웰메이드 작품으로 입소문 난 올해 ENA 드라마 라인업.
요즘 드라마는 방송국에서 돈 먹는 하마예요. 실패 시 타격을 줄이기 위해 편성 자체를 덜하게 되니까 제작해놓고도 내보낼 방송사가 없어 쌓여 있는 작품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K-콘텐츠를 위한다며 방송사는 제외하고 중소 제작사 위주로 지원하고 있어요. 잘 만들면 뭐 하나요. 틀 곳이 없는걸요. 생각해볼 문제예요.
스카이라이프, 지니TV, Btv, U+tv 등 가입처에 따라 채널 번호가 들쑥날쑥한 점도 넘어야 할 산이에요.
우리도 어떻게든 채널 번호를 보다 앞쪽으로 당기려는 노력을 당연히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에요. 또 번호가 안 좋으면 시청률 0.1%를 절대로 못 넘는단 업계의 오래된 정설을 우리가 ‘우영우’를 통해 깬 바 있잖아요. 지금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좋은 콘텐츠 만들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좋은 콘텐츠가 이번 달 3명의 시청자에게 ENA를 알렸다면 다음 달은 5명이 보고 이런 식으로 조금씩이라도 채널 인지도에 연속적인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결국은 콘텐츠 싸움이군요. 그래서 오리지널 제작 드라마에 더 집중하는 건가요. 앞으로 눈여겨볼 작품은 무엇인가요.
일단 11월 27일 첫 방영되는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정우성 배우의 11년 만의 멜로드라마 복귀작이에요. ENA 첫 정통 멜로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멋있는 배우여도 수어로만 연기하는데 멋있을지 걱정했거든요. 기우였어요. 역시 멜로 눈빛이 멋있더라고요. 또 ‘우영우’를 함께 했던 에이스토리와 ‘모래에도 꽃이 핀다’란 작품을 같이 합니다. 대본이 좋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어요.
‘우영우’ 시즌 2는 내년에 하나요.
같은 작가님이 집필에 들어가긴 했는데, 법률용어라든지 자폐 관련 부분 등 자료 조사가 워낙 많아 뚝딱 나올 수 있는 대본이 아니에요. 게다가 일단 ‘우영우’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배우도 제대해야 하고요. 내년 4월에 제대한대요. 그 친구는 입대 전날까지도 광고 촬영을 했다는데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까봐야 알죠. 드라마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지 않으면 순탄하게 갈 수 없는 비즈니스입니다(웃음).
인간 내면 심리 표현에 강한 K-드라마
청각장애를 지닌 화가와 배우의 꿈을 키우는 여자의 사랑을 담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왼쪽). 원빈에 이어 또 한 명의 ‘국민 아저씨’ 윤계상을 남긴 ‘유괴의 날’.
어떻게 방송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IMF 당시 현대상선(현 HMM)이었는데 일하다 보니 저는 노는 쪽 분야와 잘 맞는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게임 회사로 옮겼다가, 그리고 또 노는 것의 정점은 무엇이든 다 다루는 TV 아니겠어요. 어려서부터 노는 걸 좋아했어요. 성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부모님한테 혼도 많이 났죠. 하지만 회사를 다니다 보니 저절로 성실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럼 성실하게 평소에도 콘텐츠를 많이 보는 편인가요.
몇 해 전만 해도 의무감으로 드라마를 봤어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지금은 눈물도 많아졌고 정말 푹 빠져 봅니다(웃음).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도 좋아해서 ‘펜트하우스’나 ‘쇼윈도: 여왕의 집’도 재미있게 봤어요. 다만 정작 우리 작품은 시청자 입장에서 푹 빠져 보는 게 불가능해요. 실시간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과 시청률 추이를 살펴가며 보기 때문에 방영 당시에는 몰입이 힘들어요.
다양한 드라마를 접하는 입장에서 K-드라마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K’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는 아무래도 ‘더 글로리’처럼 등장인물 간의 갈등 구조가 과장된 작품이 인기가 많고, 또 그만큼 많이 만들어지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과장의 정도가 ‘말도 안 돼’와 ‘그럴 수도 있겠다’의 경계를 오가는 게 K-드라마의 묘미인 거죠. 드라마든 예능이든 결국은 사람이 나오는 거잖아요. 내면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풀어가는 데 있어 우리나라 제작진의 역량이 뛰어난 것 같아요.
세계 3대 방송상 중 하나인 국제 에미상에 ‘우영우’가 최종 후보로 올랐습니다. 수상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점치나요.
방정맞은 이야기는 안 하려고요.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숫자에 민감한 삶을 살고 있는데, 올 한 해를 점수로 매긴다면요.
흠.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좋은 직장 상사도 아니었던 것 같아 후하게 주면 75점 정도 되겠어요. 저도, 회사도 내년에는 100점을 목표로 좀 더 잘 살아봐야죠. 올해도 많이 빠지긴 했는데 10kg 이상 더 감량하는 게 개인적인 목표예요.
혹시 시청률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서 빠진 건 아니죠.
하하하. 아닙니다. 보통 저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먹어서 푸는데요. 올해는 마음고생이 덜했나 봅니다. ENA가 견조한 흐름을 보여줬고, 물론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드러났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 성적은 90점이었어요. 이왕이면 내년에는 ‘우영우’에 필적하는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ena #우영우 #여성동아
사진 제공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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